46화
“지드는 타르켄 전사 4,998호라네.”
수간 지드는 다소 놀란 듯.
“4,998호요?”
그때 지드는 다소 거친 음성과 말투를 내뱉었다.
“왜, 4,998호라니까 황당하게 보이나! 1호 양반아.”
론이 그를 만류했다.
“이보게, 지드. 오늘만큼은 그 성질 좀 누르게. 애초 레기온을 이곳에 초대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자네가 아닌가. 그러니 그냥 순한 말로 대화나 함세.”
이에 지드는 다시 큰소리를 냈다.
“대화나 하자고 저놈을 부르는 건 아니오!”
순간 레기온은 자신을 놈이라 하는 그 작자에게 화가 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예의가 없군! 처음 보는 사람한테 놈이라니!”
지드는 씩 웃었다.
“후후, 과연 타르켄 전사 1호답군. 물론 그렇겠지. 자기 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뭐라고?!”
급기야 레기온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정말 무례한 자로군!”
그때 론이 레기온의 팔을 잡아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
“이보게, 진정하게나.”
그때 레기온은 자신의 속내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니, 여기 무슨 이유로 타르켄 전사 4,998호가 온 거죠?”
그러자 이번에는 지드가 비웃으며 말했다.
“후후, 왜! 타르켄 전사 중 가장 하위인 4,998호와 함께 자리에 있으려니 자존심이 상하나! 후후, 주제에 1호라고 거들먹거리기는, 쯧쯧.”
결국 레기온은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았다.
슥!
“더 이상 그 입을 나불거리게 하지 않겠다!”
이번엔 론이 말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워낙 양쪽 다 기세가 사나웠기 때문이다.
지드는 다시 도발했다.
“나도 내 입 가지고 나불거리는 게 싫거든. 그러니 부탁 한번 하자. 거룩하신 1호님께서 저 벌레만도 못한 이 4,998호가 나불거리게 하지 못하도록 혼내 주소서, 후후.”
레기온은 도저히 상종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고, 검을 뽑아 지드에게 다가가 휘둘렀다.
홱!
탁!
지드는 레기온의 검을 자신의 검으로 가볍게 막아냈고, 이어 역공했다.
“이번에 내가 공격하지.”
홱!
지드의 검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순간 푸르스름한 빛 점들이 일어났고, 그것은 하나의 형체로 레기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그건 검강이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처럼 레기온의 몸을 칭칭 감아 버렸는데.
“뭐, 뭐야!”
그는 상대의 예기치 않은 검광 당황했지만 재빨리 신체 강기를 일으켜 채찍 같은 검광 줄기를 파괴해 버렸다.
“이얏!”
쾅!
폭발음이 들리며 검강은 이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레기온은 상대가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지드는 그런 그를 보며 다시 비웃었다.
“오호라, 과연 1호라서 그런지 내 스네이크 제3 단계까지 올린 검강을 단 한 번에 파괴하다니.”
짝! 짝! 짝! 짝!
4,998호는 박수까지 쳤다.
“하하하, 여기까지는 나를 실망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과연 다음에도 내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그때 레기온은 옆에서 멀뚱히 구경만 하는 제사장 론에게 외쳤다.
“도대체 저자 정체가 뭡니까!”
“타르켄 전사 4,998호라네.”
“아니,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도대체 뭐죠?”
론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자네가 조금 고생해서 직접 저자의 정체를 알아내게나.”
“뭐라고요?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순간 지드는 다시 공격해 왔다.
“후후, 그런 말은 얼마든지 있지.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말! 하지만 그 하늘 위에 더 높은 우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놈은 별로 없을걸. 바로 너 같은 놈 말이야.”
홱!
지드는 이번에도 검을 휘둘러 뭔가를 발사했다.
파팟!
휘리리릭!
“드래곤 검강 제9 단계, 궁극의 파괴!”
순간 그가 발사한 검강이 거대해지더니 드래곤의 형상을 하고 곧바로 레기온에게 공격했다.
“아아악!”
레기온은 그 힘이 너무나 강대하여 자기 신체 방어 마법으로는 감히 저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뒷걸음질을 치는데.
결국 드래곤이 뿜어내는 화염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뒷벽으로 폭 박혔다.
“아아.”
정신을 잃고 마는 레기온.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떠보니 침대 위였다. 레기온이 주변을 살펴보는 데, 그때 제사장 론이 방문을 열고 마실 물을 가져왔다.
“깨어났는가?”
레기온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그자는요!”
“4,998호 지드를 말하는 건가?”
“네! 그자 말입니다. 도대체 정체가 뭐죠?”
론은 일단 그에게 잔을 주었다.
“물부터 마시고 정신을 차리게나. 지드는 여기를 떠났으니 안심해도 되네.”
“그자는 누굽니까?”
“초월 타르켄 전사일세.”
“초월 타르켄 전사라니요?”
“말 그대로 자네 같은 타르켄 전사들의 전투력을 초월한 존재랄까.”
그 말에 레기온은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저, 저기 초월 타르켄 전사는 처음 들어 보는데요.”
“자네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초월 타르켄 전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와 군주 아르엠 님, 그리고 초인 마법사 수장 카시아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네. 하지만 그래도 타르켄 전사 1호인 자네는 알 필요가 있어 그를 만나게 해 준 것이고.”
레기온은 그 말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론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초월 타르켄 전사들의 존재 여부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상부의 치밀한 계획과 전술 덕분이지.”
“계획과 전술이요?”
“사실 자네를 속이고 싶은 게 아니라 베른 종족을 속이는 게 목적이라네. 어차피 베른 종족은 제1색에서 7색까지 엄청난 전사들이 존재하니 그들의 상위 전사들 때문에 우리도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자 초월 타르켄 전사를 숨겨 놓은 걸세.”
“숨겨 놓다니요?”
“초월 타르켄 전사는 타르켄 전사 하위 그룹에 해당하며 거기서 비밀리 활동하네. 그러니까 지드와 같은 경우 그는 4,998호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셈이지.”
그 말을 들은 레기온은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렇다면 나와 같은 타르켄 전사 상위 서열은 결국 미끼용에 불과했군요.”
그러자 론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건 아닐세. 절대 아닐세! 현재 자네와 같은 타르켄 전사 상위 전사들 역시 베른 종족에게 엄청난 위협이 되고 있네.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 말게.”
그래도 레기온은 실망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위 그룹에 초월 타르켄 전사들은 몇 명이나 되는 거죠?”
론은 그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켰다.
레기온이 다시 물었다.
“그것도 일급 비밀입니까?”
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하지만 자네에게는 내 특별히 언질을 줌세. 초월 타르켄 전사는 스물일곱 명.”
“스물일곱 명이요?”
“후후, 사실 이 초인계는 그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자, 인제 그만 쉬게나. 자네도 해야 할 임무가 수두룩하니 말일세.”
론은 물잔을 들고 방을 나갔다. 그가 사라진 곳을 멍하게 바라보는 레기온.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 하늘 위에 하늘, 그 하늘 위에 우주가 있다는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나는군.”
* * *
나는 레아와 아서와 함께 지난 며칠 동안 끝이 없을 것 같은 드넓은 평야를 지나 드디어 숲이 있는 지역을 발견하고 초입에 들어서는 중이다.
그리고 정말이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 녀석, 바로 아서 때문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주로 지난번 내가 어떻게 제5색 푸른빛 전사를 꼼짝 못하게 제거할 수 있었느냐는 집요한 질문들…….
물론 나는 아직까지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하기야 녀석에게 말해 줘도 내 꿈과 현실의 그런 개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도 레아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언제나 나를 보면 상냥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투, 그리고 그 해맑은 웃음을 보낼 뿐이었다. 마치 그녀는 내가 살아남아서 그저 한없이 기쁘고 행복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 자신에게 하나의 변화가 일었다. 정말이지 나조차 인정할 수 없었던, 내 안의 진한 감동이 서서히 밀려오는…….
그런 감정의 종류가 뭔지 모르지만 확실히 나는 이들과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았다. 특히 지금처럼 아서가 사냥 가고 레아와 단둘이 남는 경우 예전의 그 어색함도 사라졌고, 이제 우리는 자연스레 아주 유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후후. 4,444호님. 아서가 오늘도 사냥이 늦네요.”
“하하, 이번에도 베른 종족에 잡혀간 거 아닌가? 하여간 놈은 사냥하러 간다면서 오히려 사냥당하는 꼴이라니. 쯧쯧, 그냥 타고날 때부터 팔자가 그런가 보지.”
“호호, 설마 그럴 리가요. 사람은 타고난 운명대로 사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 길을 개척한다고 그랬어요.”
“스스로 개척이라?”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동의해. 스스로 개척한다는 말.”
그때였다.
“살려 줘! 누가 쫓아와!”
숲에서 나와 이곳 공터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아서.
나는 그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쯧쯧, 조금 전 스스로 삶을 개척한다는 말 취소할게. 저 녀석은 도저히 아닌 것 같으니 말이야.”
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서에게 향했다.
“누가 쫓아온다는 거야!”
“나도 몰라. 그냥 나를 보더니 미친놈처럼 실실 웃으며 다가오는데 그냥 도망쳐 왔지.”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숲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웬 전사 차림의 금발 청년이었다. 그는 아서 말대로 히쭉히쭉 웃으며 우리에게 말을 건넸는데.
“큭! 큭! 드디어 사람들을 발견했다. 아이고, 정말 다행이야. 심심해서 죽을 뻔했는데. 그나저나 안녕하세요! 저는 카이라고 합니다!”
그는 인사를 하자마자 우리에게 다가와 갑자기 자기 배낭을 뒤적거리며 뭔가를 꺼냈다.
“이거 먹을래요? 말린 육포인데.”
우린 그의 행동에 다소 멍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 그 독특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큭, 싫으면 말고요.”
그는 냉큼 육포를 입안에 집어넣고 아주 게걸스럽게 씹었다.
“아이고! 맛있어라! 큭, 역시 육포는 들쥐 말린 게 최고지!”
들쥐라는 말에 아서는 깜짝 놀랐다.
“들, 들쥐라고? 그걸 먹는 거야?”
잠시 후 자신을 카이라고 소개한 그는 육포를 다 먹고는 다시 배낭을 뒤적거렸다.
“목이 마르니 이번엔 뱀 피를 마셔야겠다.”
가죽 통 마개를 열어 꿀꺽꿀꺽 마시는데, 정말 뱀 피인지 빨간 핏물이 그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서가 이번엔 짜증을 냈다.
“너 뭐냐! 보자마자 이상하고 비위생적인 음식을 먹질 않나. 그리고 지금 언제 우리가 너를 초대했다고 마음대로 와서 그러는 거냐?”
그러자 그는 다시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큭, 어차피 사람 사는 세상인데 사람이 사람 만나서 얘기하는 게 죄는 아니겠지요.”
이번엔 레아가 공손히 물었다.
“뭐 하시는 분인데요?”
“저는 타르켄 전사입니다.”
순간 나와 일행은 깜짝 놀랐다.
“타르켄 전사라고? 정말이야?”
아서의 말에 그는 갑자기 정색하며 따져 물었다.
“어! 이 사람 처음부터 반말이네. 그런 나도 지금부터 반말해야지. 일단 너! 회색 로브로 복장으로 보아서 신관 같은데 여기 다른 사람들보다 인상이 제일 고약하게 생겼네.”
아서는 화를 냈다.
“뭐라고!”
“큭. 농담이야, 농담. 뭐, 그 정도 용모면 어디 가서도 여자들에게 제법 먹어 줄 만한 미남인데 여기 이 사람에 비하면 뭐라 할까? 향기가 절로 풀풀 나는 고급 손수건과 빨아도 빨아도 지저분한 손걸레랄까.”
순간 아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주먹을 쥐었다.
“너 말 다했어!”
그러자 청년은 뻔뻔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다 말 다 하지 않았어.”
그러고는 내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