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공력의 서 】
수만의 마계 전사들은 군단장의 명령으로 저 페른 구릉지에 서 있는 고작 백여 명의 페타레 존재들에 돌격했다. 이어 그 둘의 진영이 격돌했고, 믿기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그야말로 하늘을 뚫을 것 같던 엄청난 숫자의 마계 대군이 고작 100여 명의 페타레 존재들의 전방 근처에서 마치 불에 타서 흩날리는 재가 된 듯 허공으로 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뒤에서 계속 밀려오는 마계 전사들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고, 뒤이어 공격했지만 그들조차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전투는 시작하자마자 곧 막을 내렸다.
이제 평원에는 마계 전사들은 존재하지 않고, 단 한 사람인 마계 제7 군단장 헤르메스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는 것을 예감했는지 그저 무덤덤하게 페타레 존재들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페타레 존재 중 누군가 헤르메스에게 말문을 열었다.
“병사들을 잃고도 그런 태연한 표정을 보니 그대는 애초 이런 결과를 바랐던 것 같은데?”
그러자 헤르메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페타레인이여! 절대 바란 일은 아닙니다. 단지 받아들일 준비가 미리 되었을 뿐이지요.”
“받아들일 준비라니? 그건 무슨 뜻인가?”
이에 헤르메스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는다.
“하하하, 애초에 이런 결과는 오히려 페타레 그대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 아닙니까! 그대들이 창조한 피조물을 소멸시키는 것은 마치 내가 땅바닥에 침 한번 뱉는 것처럼 쉬울 테니까요.”
그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페타레 존재는 헤르메스에게 물었다.
“우리 페타레인이 어찌 마계인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헤르메스는 자신 있게 외쳤다.
“나는 그대들이 창조신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페타레 존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우리가 창조신이라……. 허허, 그거 흥미로운 얘기이군. 정녕 그대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네.”
“잘못된 생각이라니요?”
“암! 잘못되고말고! 우린 마계인들을 창조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어떤 생명체들도 창조하지 않았네. 아니, 그럴 능력도 없네.”
이에 헤르메스는 다소 당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도대체 뭡니까?”
“그건 오히려 네가 그대에게 묻고 싶은 거네. 왜 그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말일세.”
그때 헤르메스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 그건 전설에 내려온 일화를 보면…….”
“전설이라……. 흠, 전설은 전설일 뿐 그런 얼토당토않은 내용은 그 누구를 신격화시키기 위해 신화 혹은 설화를 꾸며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네.”
“그럼 페타레 그대들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내가 알기로는 세상 그 모든 것을 해탈한 신이 아닙니까?”
그러자 페타레 존재는 다시 한번 웃었다.
“허허, 해탈이라? 그럼 이렇게 묻겠네, 자네는 그 해탈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세상의 모든 고민과 번뇌를 초월한 신이라 생각됩니다.”
“내 생각은 다르네. 세상에는 신 자체가 존재하지 않네. 왜냐하면 이 우주에는 고민과 번뇌하지 않은 이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으니 말일세. 고로 우리는 신이 아니네.”
그 말에 헤르메스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페타레 존재는 그의 속내를 알기라도 한 듯 계속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설명함세. 우주에서 존재하는 것들 모두는 고민과 번뇌를 지니고 있으며 번뇌가 없는 존재라면 그는 필시 존재 자체를 하지 않는 무(無)이지. 아무것도 아닌 허상의 무 말일세.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우리 페타레 존재는 번뇌를 초월하지 못한, 그저 자네와 같은 평범한 존재에 지나지 않네. 이 정도면 설명이 되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 그대들은 제 마계 군단을 그리 쉽게 사라지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건 우리가 자네들보다 번뇌를 해결하는 그 방법이 조금 앞선다고나 할까? 즉, 그건 알기 쉽게 말해서, 세상에 고민과 번뇌를 줄이는 방법을 안다면 그 존재는 고도의 영역에 머물며 지상에서의 시각으로 보는 그 힘과 완력과는 다른 차원의 힘을 지니게 된다네.”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흠, 그럼 어쩔 수 없이 자네 세상에 어울리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겠군. 우리가 지닌 그 힘이란 ‘공력’이라는 말일세.”
그제야 헤르메스의 눈빛이 반짝였다.
“공력이요!”
“그럼세. 공력 말일세. 그 힘의 원천은 스스로 깨달음에서 오는 가장 강력한 영적이자 물리적 에너지, 즉 포스라고도 하지.”
그때 헤르메스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그에게 애원했다.
“공력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군. 공력이란 스스로 알아야 할 문제인 것을. 곧 알면 그게 자네들 세상에서 말하는 힘이요, 물리적 완력이라는 것을.”
결국 헤르메스는 다음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아직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 *
헤르시몬의 고대 마계 전쟁 문헌의 내용은 거기서 막을 내렸다.
나 역시 헤르메스와 마찬가지로 실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게 뭐야? 아니, 그게 다야?”
“응.”
정말이지 절망스러웠다. 나는 케논 검보다 강한 아이템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했는데 문헌에는 고작 철학적인 대화만 오고 간 게 진짜 짜증이 날 정도였다.
“빌어먹을!”
아, 결국 포식의 권능을 사용할 다음 아이템을 차지 못하고 마는 건가.
그렇다면. 현실에서 레아와 아서는 놈에게 끔찍한 죽임을 당할 테고.
눈앞이 캄캄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침대에 누워 다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반드시 내가 찾고자 하는 아이템이 있을 거야. 분명히. 아니, 반드시 있어야 해. 그래야만 레아를 구할 수 있고.”
그렇게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내 방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누구?”
“나야, 헤르시몬.”
“왜?”
“들어가서 말해도 될까?”
나는 일단 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잠 못 이루고 있는 이 늦은 새벽에 그녀가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나를 찾아왔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무슨 일인데?”
그녀는 며칠 전 고대 문헌 양피지 꺼내어 일단 탁자 위에 폈다.
“여기 내용 중 새로운 것을 발견해서 말이야.”
“새로운 것이라니?”
“저기 이것을 쓴 저자 이름이 적혀 있어. 물론 그냥 맨눈으로 보면 확인이 되지 않는데, 이 양피지가 우연히 물에 젖는 바람에 그 뒷장에 새로운 내용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당장 읽어 봐!”
“그래, 알았어.”
그녀는 양피지 뒷면을 조심스럽게 펴서 그 새로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빌라 오스이다. 그리고 나는 페타레인이다. 내가 이 전쟁 기록을 쓰게 된 이유는 후세가 이 글을 보고, 내 관념을 깨우치게 될 그 존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페타레인이 직접 쓴 거라고? 게다가 후대에 전할 메시지라니!”
헤르시몬은 마구 흥분한 나를 보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도대체 그렇게 방해하면 나더러 읽으라는 거야, 아니면 읽지 말라는 거야!”
“미안해! 계속 읽어 봐!”
그녀는 다시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마계 제7 군단장 헤르메스는 내게 질문을 던져 해답을 얻으려 했지만 내 설명의 부족으로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병사들의 전멸로 인한 책임감과 스스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아쉬움으로 자신의 검으로 복부를 찔러 자결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결하기 전에 나는 해답을 줄 수 있었는데 그걸 하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도 괴롭고 후회스러웠다.”
“…….”
“내가 해 주고 싶은 대답이란. 근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고민, 번뇌를 사라지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다시 살며 사랑하며 배운다면 적어도 당장 자신의 틀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말을 해 주지 못한 이유로 나는 이 공력의 서를 남기게 되었다. 헤르메스의 후대 마계인에게 그 보답을 해 주기 위해서이다.”
“…….”
“하지만 그조차 나는 걱정이 된다. 과연 마계인 중 내가 전하는 메시지처럼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다시 살며 사랑하며 배우는 그런 자가 있을까? 마계인은 천성적으로 마의 기운으로 태어난 자들인데… 아마 그것도 가능하지 않으리라 본다. 어쨌든 내 메시지를 이해하는 마계인이 있어 기적이라도 일어난다면 그는 곧바로 이 공력의 서를 얻게 되리라.”
헤르시몬의 읽기는 거기서 끝났다.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좌절감을 느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다시 살며 사랑하며 배운다는 것…….
그걸 이해하면 공력의 서를 얻는다니?
“아…….”
그 내용은 나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 아닌가.
내가 언제 살며 사랑하고 배우며 했던가.
잠시 후 헤르시몬이 방을 나가고, 나는 탁자 위에 놓인 공력의 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의 길. 헌터로서 온통 폭력과 전투 등으로 얼룩진 험한 세상을 걸어온 나에게 과연 그런 말귀가 해당이라도 된단 말인지.
그나마 지녔던 내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내 고통의 마음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흘렀던가.
공력의 서는 여전히 껍데기로 탁자 위에 남아 있었고, 내게는 그 어떤 포식의 권능도 작동되지 않았다.
어차피 가망 없는 일.
그리고 나는 갑자기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들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회상했다.
나는 지구에서 태어났다. 당시 외계 침공으로 지구에 던전이 생긴 지 수년 후였다. 그렇게 혼란한 상황에서 나는 성장하고 자랐으며 아버지를 일찍 여읜 엄마의 행상으로 겨우 하루하루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환경은 혹독했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나름 건강한 정신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건 엄마의 희생과 삶을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와 성질 등 너무도 소중한 말을 듣고 자란 덕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지금까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내 마음을 추스르고 용기와 신념을 얻곤 했다.
내가 헌터로서 병영 생활을 할 때, 그리고 초공간에 빠졌을 때도 홀론의 대원들과 함께 싸우면서 전우애와 배려를 배웠다.
그리고 생각나는 한 영혼.
그녀는 외계 공주 아레나였다. 나는 그녀의 경호 전사로서 다소 심한 말투로 상처를 주곤 했다. 그때마다 토레스가 나타나 다투었고…….
아. 이제 생각해 보니 그런 그들이 너무 보고 싶다. 포탈로 빨려 들어간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특히 아레나…….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묘한 감정이 솟아난다. 과연 그녀는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나 또한 그녀에게 어떤 존재로 비추어졌는지.
후회한다.
왜 당시에 그녀에게 잘해 주지 못했을까.
그리고 나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된다.
초인계 신관인 레아와 아서. 가슴이 아프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들 생각뿐이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미처 알지 못한 것들을, 그들은 나를 깨우쳐 주었다. 그건 희생, 사랑…….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내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 영혼일까?
부끄럽다. 내가 그들의 입장이라면 과연 나는 그런 숭고한 희생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게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했던 레아. 아서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를 좋아했다.
꼭 아서의 말을 듣고 그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좋아했다. 아서는 농담으로 그게 사랑이라 말하지만 나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도 스스로 감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회상하는 이 순간 레아가 너무 보고 싶은 것은 숨길 수 없는 감정이다. 그것도 너무 간절하게…….
그녀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나 역시 견디지 못할 것 같다. 만일 아서가 여기 있다면 그 또한 사랑이란 감정이라 말하겠지.
하지만 나는 아직도 조심스럽다. 과연 이 감정이 뭔지.
사랑일까?
엄마의 말씀에 의하면 누구를 사랑하는 게 절대 쉽지 않다고 했는데……. 그렇게 쉽게 입에 떠올릴 단어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레아…….
“아, 레아. 제발 살아 있어 줘. 반드시 그대를 구하러 갈 테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니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그대를 구할 것이오. 그러니 제발,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