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나는 레아가 너무도 걱정되었다.
“레아는! 레아는 괜찮은 거야?”
그러자 아서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 괜찮다고? 끝까지 나를 실망하게 하는군. 어차피 이 상황의 결말은 나와 레아가 죽게 되어 있어. 물론 너는 우리의 마법 결계 때문에 살아남을 확률이 반반이지만 그래도 살아남아야 우리가 저승에 가서도 눈을 편히 감지.”
“나는 상관 말고 당장 너희 둘은 도망가라고! 컥컥!”
“쯧쯧, 이렇게 피를 토하며 거의 죽을 놈 살려 놨더니 기껏 우리더러 비겁한 짓을 하라고 종용하네. 쳇.”
“아니면 레아라도 가서 구해 줘.”
“바보야, 레아는 아마 다시 볼 수 없을걸.”
“왜!”
“그녀의 마법 마나도 거의 고갈이 됐고, 아마 곧이어 푸른빛 전사에게 잡혀서 강간당하고 비참하게 죽을 거라고.”
“아, 안 돼. 절대 안 돼!”
아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긴, 이 상황이 안타깝기는 하다. 처음부터 레아가 너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거든. 레아 성격에 지금까지 그 어떤 남자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인제 보니 4,444호, 너 무척 잘생긴 얼굴이네. 그래서인가? 그래도 레아는 신관인지라 사람 외모 보고 판단은 하지 않지. 아마 너한테 맑은 영혼을 느꼈을까. 그런데 나는 그게 사랑일 수 있다고 생각해. 후후, 진정한 사랑을 하지도 않은 내가 다 느껴질 정도면 진짜 사랑일 수 있겠지.”
“제발 레아 좀 가서 구해 줘!”
“소용없는 일이야. 레아도 자신의 목숨보다는 네가 살아남길 바라고 있을 테니 오히려 나를 나무랄 거야.”
아…….
방법이 없었다.
나는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말이지 마지막으로 소원을 빌었다.
“그래, 내게 남은 희망은 하나. 꿈을 꾸는 거……. 제발 지금 당장 꿈에 들게 하소서.”
그 말을 들은 아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지금 이런 상황에서 꿈을 꾸고 싶다고. 정말 이 자식, 구제 불능이네! 아니면 미친 건지, 그도 아니면 미친 게 한 번 더 뒤집어 친 거냐!”
그때 내 눈이 저절로 스르르 감겼다.
이건 꿈을 꾸기 전에 느껴지는 감정.
아…….
* * *
천만다행 꿈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꿈의 전개는 지난번 상황과 그대로 연결이 되었고.
마계에서 파탄의 딸 헤르시몬의 피를 받고 고대 마법의 신체를 지니고 케논 검마저 포식의 권능으로 먹어 버린 그 상황.
헤르시몬은 나를 너무도 신기하게 바라보며 외쳤다.
“정말로 케논 검을 먹어 버린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럼 네 손에 쥐어진 그 케논 검은 뭐야?”
“이미 내 몸에 흡수한 케논 검의 잔재.”
“잔재라니? 그건 무슨 뜻이야?”
“앞으로 이 검은 내게 귀속이 되어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는 거지.”
하지만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냉큼 다가와서 내 검을 뺏으려 했다.
순간.
펑!
그녀는 케논 검에 발산하는 무형의 에너지에 의해 뒤로 나가 자빠졌다.
“아아.”
“사람 말을 그렇게 못 믿나? 하기야 너는 인간이 아니니까, 뭐. 그걸로 퉁 치지.”
그로부터 며칠 후.
마계의 성전에서도 가장 사치스럽고 은밀한 곳.
이곳은 오로지 파탄만이 기거하며 온갖 향락을 누렸던 비밀의 방.
과연 밀실답게 외부와는 멀리 떨어진 제일 높은 층에 위치해 있고, 밖에는 마계 전사들이 철통같은 경비를 서고 있었다.
내가 포식의 권능으로 케논 검을 먹기 전까지는 여기 있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이제 나는 마계에서조차 가장 강력한 전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이런 향락의 장소를 일부러 선택하고 놀러 온 것은 아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방 안을 이 잡듯이 뒤졌다.
“흠, 헤르시몬이 분명히 이 방에 어딘가에 있다고 했는데…….”
내가 찾는 것은 파탄이 가지고 있는 마계 고대 전쟁사에 관한 문헌이었다.
나는 헤르시몬에게 절실한 마음으로 물었다. 이곳 마계에서 케논 검보다 훨씬 더 마법의 능력이 강한 병기가 없냐고?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런 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말에 내 가슴은 그야말로 찢어질 듯했다. 내가 지금보다 강해지지 않는다면 현실에서 레아는 분명 그놈에게 능욕당하고 처참하게 목숨을 잃는…….
내가 고통의 신음을 흘리고 있었을 때 그녀가 나를 안으며 울먹이던 그 음성, 그 눈빛. 그 모습이 내 저 안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세포 하나하나를 발발이 찢는 기분이다.
이런 꿈속에서조차 나는 현실과 꿈을 분간조차 못하고 영혼은 산산이 부서져 재로 허공에 영원히 소멸하여 그저 존재하지 않는 무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 정말이지 한 여인의 희생에 대한 그 절절함에 금방이라도 숨통이 끊어질 것 같았다.
“찾아야 해! 반드시! 분명 고대 전쟁 문헌에 케논 검보다 더욱 강력한 그 뭔가 존재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헤르시몬이 그랬어.”
나는 다시 서랍을 뒤졌다. 이번에 다섯 번째……. 하지만 문헌 비슷한 양피지는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2시간여가 지났을까.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계속 생각에 집중했다.
“서둘러서 좋을 건 없어. 그래, 침착해야 해. 이럴수록. 여긴 파탄의 방. 만일 내가 그였다면 가장 중요한 물건을 어디에 두었을까. 그의 처지에서 생각을 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1시간이 더 흘렀다.
나는 거의 체념하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흠, 그냥 일반적으로 볼 때 서랍 같은 데 두지는 않을 테고, 그렇다면 금고? 하지만 이런 시대에 금고가 존재할 리 없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시대의 금고 역할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을 앞으로 꺼내어 벽면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영화를 너무 봤나? 주로 밀실에는 벽에 통로나 구멍이 있어 비밀 장치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번에도 실패했다. 절실함은 더욱 밀려왔고.
“아, 레아. 결국 당신을 살리지 못하는 건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냥 포기하자. 레아와 아서는 신관으로서 자신들의 임무를 다할 뿐. 아마 내가 아닌 다른 타르켄 전사였을지라도 그렇게 희생을 감행했을 거야.”
그렇게라도 위안으로 삼고 싶었다. 아니, 그 방법 외에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없었다. 나 자신이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하지만 아서의 그 말이 내 가슴을 더욱더 저리게 만들었으니.
‘하긴, 이 상황이 안타깝기는 하다. 처음부터 레아가 너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거든. 레아 성격에 지금까지 그 어떤 남자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인제 보니 4,444호, 너 무척 잘생긴 얼굴이네. 그래서인가? 그래도 레아는 신관인지라 사람 외모 보고 판단은 하지 않지. 아마 너한테 맑은 영혼을 느꼈을까. 그런데 나는 그게 사랑일 수 있다고 생각해. 후후, 진정한 사랑을 하지도 않은 내가 다 느껴질 정도면 진짜 사랑일 수 있겠지.’
[사랑.]
사랑…….
사랑이라고! 그녀가 나를.
“빌어먹을!”
결국 나는 손으로 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빌어먹을 개 같은 세상!”
그렇게 발악하다 나는 내 몸을 주체 못하고 침대 아래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때 내 발밑의 무엇인가가 걸려 넘어졌다. 보니 그건 쓰레기통이었는데, 넘어지면서 그 안의 쓰레기들이 나왔다.
그때 내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저건 낡은 양피지 묶음…….”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쓰레기통에 왜 양피지가 있지?”
나는 무심코 그걸 집어 묶여 있는 끈을 풀고 그 안을 살폈다. 그리고 표지에 쓰여 있는 문구.
[고대 전쟁 기록 문헌서]
* * *
그 날 오후.
마계 언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이 양피지 안의 글 해석을 헤르시몬에게 들어야만 했다.
“이봐, 황제. 전쟁사 기록 문헌에 나온 내용들은 워낙 태곳적 고대라서 과연 신빙성이 있는 건지 확신이 가지 않아.”
“네가 신경 쓸 일 아니니까 읽기나 해.”
“흠, 일단 소제목을 보면 두 개의 전쟁 기록이 있는 것 같은데. 하나는 고대 마계와 천계의 메트론 제3 차 전쟁.”
“메트론 제3 차 전쟁?”
그녀는 그 내용을 읽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여기 케논 검이 등장해.”
“케논 검?”
“그래, 케논 검.”
나는 무척 실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른 나머지 전쟁 기록은?”
“글쎄, 이건 연도와 시대가 정확히 나오지 않았는데. 아마도 케논 검이 등장했던 고대 시대보다 훨씬 오래된 그 위쪽 고대 시대 같은데.”
“읽어 봐.”
“소제목이 ‘마계와 페타레 영역’이라 나오는데.”
“페타레 영역? 그게 뭐지?”
“몰라, 나도 처음 들어 봐.”
“그럼 전쟁 기록 내용을 읽어.”
“알았어. 잘 들어. 일단 여기 첫 문구부터 말할게.”
“뜸 들이지 말고!”
“마계의 제7 군단장 헤르메스는 전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제군들이여! 그대들 손에 마계의 운명이 달려 있다. 하지만 그건 진부한 연설이 될 테고, 나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나는 전장에서 군단장으로서 애석하게도 이런 말을 하고 싶다.”
“…….”
“제군들이여! 그들에게 저항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페타레 영역에서 온 존재들이니까. 그저 감사하고 영광으로 여기리라. 페타레 영역 존재들과 우리가 지금 에른 평야의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에! 그건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에게 피조물이 알현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실제로 페타레 존재들은 수많은 대지를 창조하고 그 위에 생명들을 탄생시켰다. 그 대상이 우리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드는 게 내 심정이다.”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다가 말을 끊었다.
“뭐야, 페타레 존재들이 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헤르시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신이 아닌 이상에 어떻게 생명체들을 탄생시켜?”
“너희 같은 마계인들조차 신으로 여기는 존재들이라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어떤 존재이지?”
“그건 나도 모르지. 적어도 넌 지금은 인간이 아니라 마계인이라는 사실.”
“여기서는 마계인이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인간이라고.”
“현실이라니?”
“하기야, 너한테 여기가 꿈속이라는 얘기를 해 봤자 내 입만 아프지.”
“꿈이라니?”
순간 나는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아니지… 꿈속에서 얻은 능력이 현실에서 그대로 뻥튀기해서 이어지니 꿈이나 현실이나 똑같이 실제 상황……? 그렇다면 나는 현실에서도 마계인 신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흠, 머리 아파.”
그런 헤르시몬이 나를 보며 웃었다.
“호호, 하여간 인간들이란 정말로 알 수 없는 존재들 같아.”
“생각해 보니 나 마계인 맞는 것 같다, 아무튼 흠. 계속 읽어. 단, 군단장의 연설은 생략하고. 전쟁, 아니 전투 기록을 읽어 봐.”
“쳇, 알았어. 하라면 해야지. 이제 마계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대장인데.”
“아놔! 진짜 서론 기네! 당장!”
“정말, 알았다고! 당장 읽을게. 여기 전투 상황 부분 같은데, 그것부터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