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녀는 말문을 계속 이어 갔다.
“애초 초인 마법사들 수백 명이 무려 5,000개의 타르켄 포탈 차원 이동서를 제작할 때 그 안에 이곳으로 오는 차원 이동자들의 전투력을 구분하고 서열을 매기는 기능을 넣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시점에서 매긴 거죠. 하지만 초인 마법사들에게도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타르켄 전사들의 내면에 잠재된 이면의 전투력은 보지 못한다는 거죠.”
“이면의 전투력이라니요?”
“아직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숨겨진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의 타르켄 전사들의 서열을 믿지 않습니다. 하위 계열에는 지금도 폭풍처럼 성장하고 있거나 무서운 힘을 일부러 숨기는 자들이 수두룩하다고 보거든요.”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가 말하는 그 부류의 전사 중에 나 역시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기에.
솔직히 현재 나 역시 성장, 아니 레벨 업을 하는 유저 입장이니. 뭐,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하위 전사들은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 폭풍 성장하는지는 전혀 추측이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의 말 중 일부러 힘을 숨기며 스스로 하위 전사 계열에 들어간 자들, 당장 생각해도 그들의 목적이 뭔지 몰랐다.
그녀의 설명은 거기서 끝이 난 듯 더 이상의 내용은 없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우리는 땔감에 불을 붙여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해가 서녘으로 기울어질 무렵까지 사냥하러 간 아서가 돌아올 기색이 없으니 그녀는 걱정했다.
“왜 오지 않지?”
나 역시 조금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길을 잃은 걸까요?”
“아서는 신관이지만 초인 마법사 출신입니다. 길을 잃을 리가 절대 없죠.”
“무슨 이유가 있겠지요.”
그때 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일단 그를 찾으러 숲 안으로 가야겠어요.”
그녀는 발길을 서둘러 숲으로 향했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나섰고.
“같이 가요!”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어두운 밤이 되었다.
* * *
나는 이곳 초인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처음으로 초인들의 능력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레아를 통해서.
캄캄한 늦은 밤, 그것도 깊은 숲속에.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르지만 수만 개의 반딧불이 우리 앞길을 환히 비추어 주고 있었다. 그건 자연의 현상이 아닌 레아에 의해 만들어진 초인 마법.
나는 헷갈렸다. 그녀의 마법이 정말 반딧불 벌레들을 소환한 건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작은 빛점들을 창조한 건지.
그리고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수풀이 스스로 길을 터 주기 위해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양옆으로 갈라지는 놀라운 광경.
“당신이 한 겁니까?”
내 질문에 그녀는 말귀가 들리지 않은 듯 계속 정신없이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서의 행방을 찾는다는 생각밖에 없는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이내 후회되었다.
“아서! 어디 있어! 아서! 제발 대답 좀 해!”
레아의 안색은 걱정에서 이제는 사색이 되어 갔고, 더 깊은 숲 안으로 향했다.
잠시 후 갑자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앞 나무들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이어 고의로 우리 앞길을 막기로 작정한 듯 잔가지들이 서로 엉켜 장애물을 만들었다.
순간 저런 현상 역시 레아의 마법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다급한 그녀가 그런 일을 할 리 만무했고, 게다가 그처럼 환했던 반딧불이 점차 그 빛을 잃어 가면서 레아의 표정으로 굳어졌다.
“무슨 일이죠?”
내가 묻자 그녀는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아서가 저기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고, 이내 어두운 공터 한가운데에 모닥불이 지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럼 당장 그곳으로 가죠.”
순간 레아가 외쳤다.
“아니요! 가면 안 돼요!”
나는 무슨 일인가, 하고 다시 그 모닥불 주변을 살폈다. 이어 그곳에 아서가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아서가 분명해요. 당장 가요.”
하지만 레아의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몸마저 경직이 되어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내게 겨우 말문을 열었다.
“아서……. 옆에 앉아 있는 사람 보이나요.”
그제야 내 눈에도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이 들어왔다. 그때 모닥불이 갑자기 활활 타오르면서 그 정체불명의 인형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깨까지 길게 내려온 흑발의 생머리. 언뜻 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고 일단 그의 독특한 차림새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망토 자락이 몸 전체를 휘감고 있었고, 산악 지방의 날씨가 서늘한 듯 두 손으로 불을 쬐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는 아서는 뭔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불길만 바라보았다.
그때 그 생머리 존재가 말문을 열었다.
“날씨가 장난이 아닌데 당신들도 이리 와서 불 좀 쬐지.”
음성을 들어 보니 남자인 듯. 아무튼 이 묘한 상황을 당장 어떻게 파악해야 할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아서가 안전하다는 것에 안심했다.
그 생머리 청년이 다시 말했다.
“여기 이 사람 죽는 모습 보기 싫으면 당장 이리들 오시지.”
그제야 레아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그리로 향하는데,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가까이 가자 그 청년은 자기 신체를 휘감았던 망토를 활짝 펼치며 일부러 자신의 군장을 보라는 듯 모닥불이 환히 비추는 앞으로 다가서서 앉았다. 이어 내 눈에 들어오는 군장의 정중앙 문양.
파란 색깔 바탕에 레기온 가문이라 쓰여 있었다.
순간 나는 머리를 굴렸다. 아까 아서가 말한, 베른 종족의 색깔별로 등급을 나눈다는 그 내용.
그리고 푸른빛이라면…….
푸른 빛……. 베른 종족 제5색 푸른빛 전사…….
이어 내 머릿속이 갑자기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현재 초인계를 침략한 베른 종족의 주력 부대는 거의 제1색 흰빛 전사들. 그리고 소수의 지휘관인 제2색 노란빛 전사. 이어 아직 소문에만 들리는 제3색 주황빛 전사…….
현재 초인계는 주황빛 전사의 출현 소문에 전 지역이 극도의 긴장을 하는 상태라 했는데……. 그보다 한단 계 더 위인 제4색의 초록빛도 아닌 두 단계 위인 푸른빛 전사라니…….
당장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그 청년이 다시 말했다.
“내가 성질이 급한 편이라 초인계에 미리 넘어왔는데, 정말 큰 실수를 한 것 같군. 젠장, 상부에서 도대체 여긴 뭣 하러 정벌하러 온 거지? 타르켄 전사들은 보이지도 않고……. 이해가 가지 않는군.”
묘하고 묘한 이 대처 상황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아니, 대처 상황이 아닌 하나의 존재에 의해 꼼짝하지 못하고 그저 그의 표정만 살필 뿐.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아주 얌전하게 두 손을 내밀어 모닥불을 쬐는 이 상황 자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저 청년의 의지 때문에 나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행동하는, 그런 자포자기의 마음이랄까.
그건 애초에 엇비슷한 기류를 지닌 자들끼리, 서로의 기선을 제압하는 것과는 반대로 가히 신과 같은 존재 앞에서 감히 어찌해 보려는 것조차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 미물의 겸손함, 공손함, 더 나아가 자신의 덧없는… 그런…….
청년이 이번엔 나를 보며 말했다.
“이름이 뭐지?”
순간 나는 그의 관념의 압박에 눌렸는지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그것도 이름이 아닌 내 번호.
“4,444호.”
그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4,444호? 그럼 타르켄 전사? 하하, 그랬군. 어쩐지 저 두 연놈하고 기류가 다르더니만 그런데 4,444호라면…….”
청년은 이내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빌어먹을! 퉤!”
그는 침까지 뱉고는 다짜고짜 내 뺨을 후려갈겼다.
짝!
“억!”
순간 나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뒤로 자빠졌다. 청년이 불같이 화를 냈다.
“염병! 재수 없으려니까. 초인계에 와서 타르켄 전사들을 그렇게 찾아 돌아다녔는데 처음 본 놈이 서열 4,444라니!”
그는 다시 내 멱살을 일으켜 뺨을 갈겼다.
짝!
“악!”
나는 다시 뒤로 자빠졌고.
“컥컥!”
각혈을 마구 토해 내는 와중에 그의 발길이 내 복부를 사정없이 걷어차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개새끼! 아니, 재수 없는 새끼.”
그의 무자비한 폭행에 나는 전혀 항거할 수가 없었다. 그건 전투력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닌 공력 수준 차이가 하늘과 땅과도 같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뭔가 내 생각을 휘어잡아 조종이라도 하는 듯 나는 전혀 몸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예전에 읽었던 판타지 소설 내용이 기억이 났다.
생각대로 전투를 펼치는 존재.
[관념의 전사.]
혼란스럽지만 그가 그런 부류일 수 있다는 기우가 들었다.
퍽! 퍽! 퍽! 퍽!
“이 병신아! 아무리 4,444호라도 명색이 타르켄 전사가 아니더냐! 그럼 뭐라도 보여 주어야지 그렇게 개처럼 얻어맞고도 대항할 생각을 전혀 못하는 거야.”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다.
관념의 힘이 뭐기에 내가 이토록 복날 개 잡듯이 맞고도 죽을까 봐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지 말이다.
청년은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아예 한 손으로 내 머리칼을 잡아 몸뚱이를 허공에 마구 돌렸다.
홱! 홱! 홱! 홱!
내상을 입고 피를 너무 많이 토했는지 현기증이 났고 의식을 잃어 갔다.
결국 그렇게 기절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겨우 눈을 뜰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저벅저벅.
순간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가 정신이 든 나를 폭행하려는 두려움이 들었다.
“아, 안 돼!”
순간 들려오는 친숙한 음성.
“4,444호님.”
레아였다. 나는 여전히 피투성이가 된 채 겨우 실눈을 뜨고 그녀를 살펴보았는데, 옷이 거의 다 찢겨 알몸에 가까웠다.
“레, 레아…….”
“말하지 마세요. 그에게 들켜요.”
나는 그녀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 혹시 놈이 당신을?”
“아직 아니에요……. 하지만 곧 그가 저를 능욕하고 죽일 거예요.”
“도, 도망가요. 당장 도망…….”
그러자 그녀는 울먹거렸다.
“그럴 수는 없어요.”
“왜?”
“당신을 두고 우린 갈 수 없어요. 여기 마법으로 은둔 막 안에서 이대로 쉬고 계세요. 지금 아서가 그를 유인하며 시간을 벌어 주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어요.”
나는 의아했다.
“아서가? 그가 아직도 여기 있나요?”
나는 그의 성격에 벌써 이곳을 떠나 자기 살길을 찾으러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왜 그가.
“4,444호님, 우리 신관들에게는 임무가 있어요. 아서가 아무리 당신을 미워해도 그건 그의 본래 마음이 아니랍니다. 그는 당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희생을 택했고, 지금도 그를 다른 방향으로 유인하고 있어요.”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 저급한 오해에 나 자신이 창피한 순간이었다.
“다, 당신이라도 피해요.”
“그럴 수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당신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요.”
그때 이쪽으로 황급히 달려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레아!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네 마법으로 놈을 유인하는 데 한계가 있어. 그러니 이번에는 네가 해!”
레아는 즉각 대답했다.
“알았어! 대신 4,444호님을 보호해 줘.”
“물론이지!”
레아는 아서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아서는 내 옆에 앉아서 나를 지켜보며 말했다.
“이봐. 4,444호. 우린 죽어도 너는 반드시 살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