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현재 이곳을 위협하고 있는 가장 껄끄러운 대상. 가만 놔두었다가는 언제 어느 때 분명 놈은 복수할 것이라는 확신. 차라리 제거하는 것이 나은 판단이라 여겼다.
그리고 내가 검을 드는 순간, 그때 가린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안 돼!”
그와 동시에.
파팟!
내 앞에 커다란 포탈이 열렸다. 이어 그 포탈은 마치 엄청난 흡입력이 있는 듯 주변 사람들을 마구 빨아들이기 시작했는데, 그때 클레이토스가 가린샤에게 외쳤다.
“왜 포탈을 연 거야! 당장 거두지 못해.”
가린샤는 그를 향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고!”
“빌어먹을! 포탈을 열면 네가 죽어! 그건 정말 마지막 최악의 상황에 여는 것이잖아.”
“하지만 초공간에서 포탈을 열고 저들을 바깥세상으로 보내 버려야 해!”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바깥세상으로 보내다니? 그건 뭔 말……? 더군다나 여기는 초공간이라서 절대 외부로 나갈 수 없는 마의 공간이건만.”
클레이토스는 발악까지 했다.
“썅!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이라고! 그러니 당장 포탈 거두어!”
“아냐! 네가 상대하는 저자의 능력은 우리 상상을 초월해. 도저히 네 상대가 아니란 말이야!”
“젠장, 나 클레이토스라고! 설마하니 내가 저놈에게 당할 것 같아! 자존심 상하게!”
“지금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라고! 마침 포탈 작동서가 있으니 다행이지.”
“그 포탈은 우리 최후의 수단이라고! 단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빌어먹을!”
“지금이 최후의 상황이라고! 일단 포탈의 힘을 빌려서 여기 있는 자들을 다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야 해!”
그 순간 포탈의 강한 흡입력으로 나부터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아, 뭐야!”
이어 내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말이다. 나승구, 박병태, 그리고 공주 아레나와 토레스까지.
“아, 힘이 너무 강렬해!”
“내, 내 몸이!”
이어 나를 비롯해 사람들이 포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팟!
전함의 모든 존재들이 포탈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게이트는 닫혔다.
* * *
느낌은 그저 느낌대로 느끼면 되는 건데 현재 내 느낌은 뭔가 이상했다. 느낌 자체가 전혀 없다고 할까. 그건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존재하는 존재물이라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할까.
아니, 지금 이런 표현조차 헛소리라 여길 정도로 그냥 무(無)의 무(無)…….
……
……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건 굳이 내가 존재해야만 하는 그런 상념을 일부러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상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결국 존재한다는 증거이니 이제야 겨우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살긴 산 것 같은데…….”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궁금증.
“여기는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공간뿐. 혹시 우주의 한복판일 것으로 추측해 보았는데, 주변에 별 무리나 우주의 그 거무스름한 분위기가 아닌 대체로 밝은 대낮 같은 분위기.
게다가 나는 뭔가 바닥을 딛고 서 있었다.
“도대체 여긴 어디지?”
그렇다면 여긴 물리적 공간, 적어도 귀신이 되어 구천의 허공을 헤매는 그런 저승은 아닌 것 같은데. 문제는 아직도 주변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뭐냐……?”
그때였다.
주변이 갑자기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휘청거리더니만 이내 맨눈으로 느낄 수 있는 사물들이 서서히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어 확실한 광경이 그 모습을 완연하게 드러내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나는 그 한가운데 공터, 뭔가 제단석 같은 곳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두 명의 소년과 소녀가 쭈그리고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서, 나타났어.”
소녀가 말하자 소년은 다소 시무룩한 말투로 말했다.
“흠, 늦게도 나타나네.”
나는 그들이 뭔가, 하고 살펴보았는데 대략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정도로 보였고, 마치 신관의 제사장처럼 흰색 로브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
이번에는 소년이 먼저 말문을 꺼냈다.
“레아, 보기보다 젊어 보이는데……. 대략 17살 정도……. 우리 또래 같아.”
소녀 역시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음, 진짜 어리다. 그런데 타르켄 전사라니? 이거 뭔가 사기 캐릭 같은데.”
“어쨌든 나타났으니 됐지. 3개월을 여기 신전 제단에서 지루하게 기다린 보람이 있어서 좋긴 좋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은 후 제단 석상에서 내려와 다가가서 물었다.
“너희는 누구지?”
그러자 그중 소년은 펜과 양피지를 꺼내더니만 다소 귀찮다는 듯 내게 물었다.
“이름부터 뭔지 말해 줄래.”
“이름?”
“응, 이름.”
나는 다짜고짜 퉁명스럽게 질문하는 그 녀석에게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뭔 이름.”
그때 소녀는 소년을 나무랐다.
“아서, 너무 예의 없는 거 아냐? 그래도 저분은 타르켄 차원 이동서로 이곳에 온 전사라고.”
그러자 소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쳇, 그래 봐야. 4,444번째 전사, 아주 하위라고.”
“아서! 너, 정말. 타르켄 전사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분들이라고. 그러니 예의를 차려.”
“그런 건 필요 없고, 그냥 내 식대로 할래.”
소년은 다시 내게 물었다.
“이름.”
나는 여기가 어떤 곳이고, 저놈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뒤질래?”
내 말에 소년이 다소 놀란 듯.
“…엉? 성깔 있네.”
이번엔 소녀가 내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아서 얘 원래 착한 애인데 말투가 이래요. 그러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나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나오니 일단 진정하기로 했다. 사실 무엇보다도 첫눈에 그녀의 그 인상에 반했던가.
내가 원래 여자를 보기를 돌 보듯 했고, 좀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뭔가 달랐다.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무척이나 매력 있어 보이는 소녀였다.
나는 물었다.
“여기는 어디지?”
“초인계(超人界)입니다.”
“초인계?”
“정확히 조홀 우주 제34 차원 아스트랄 영역에 속하는 초인계이죠.”
뭔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궁금한 게 있었으니.
“내가 왜 여기로 온 거지?”
“당신은 선택받았습니다.”
“선택이라니?”
“초인계에서 제작한 5,000개의 타르켄 차원 이동서를 통해 4,444번째 전사로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잠시 말을 잊었다.
“…….”
그건 뭔 헛소리인가. 나는 클레이토스와 대결했고, 그의 연인 가린샤가 열어 둔 포탈 때문에 이곳에 떨어졌는데 갑자기 4,444번째 전사이니, 초인계이니…….
“그래서 뭘 어쩌라고?”
그때 소년이 화를 냈다.
“어쭈, 상당히 공격적이네. 이봐, 아무리 타르켄 전사라도 앞으로 우린 신전 제관이라고 그러니 예의를 차려.”
나는 다시 성질이 났다.
“이 미친놈이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네.”
“미친놈? 와, 정말 이자, 성질이 개차반인 것 같아.”
그때 소녀가 다시 소년을 나무랐다.
“아서! 그만해. 먼저 예의가 없는 건 너였잖아. 그러니 너부터 예의를 지켜!”
그러고는 이번에 나를 바라보며 그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름부터 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형도.”
“아, 네. 이형도 님. 일단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많이 당황하고 계실 것입니다. 원래 저희 임무는 타르켄 전사를 관리하는 것인데, 먼저 이곳에 오게 된 연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늦어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해 봐. 궁금하니까.”
그녀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문을 열기 시작했는데 나 역시 그녀의 그 해맑은 표정에 절로 녹아들 듯 마음 편하게 귀를 열어 두었다.
“이형도 님,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여기는 초인계입니다. 초인계란 말 그대로 초인들이 거주하는 영토이며 우리는 오랜 세월을 거쳐 이곳에서 평화로운 삶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이 서두부터 길어지는 것 같아 말했다.
“웬만하면 짧게 말해.”
“아, 네. 그럼 요점만 말하겠습니다. 초인계는 현재 적대국인 베르니아 종족에게 크나큰 위협을 받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곳 초인계에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고, 결국 오늘날 그들에 의해 전 영토가 거의 함락 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은 오래전 초인계 상부에서 초인 마법사들 수백 명이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에 관여했습니다. 바로 타르켄 차원 이동서.”
“…….”
“그 목적은 우리 초인계를 구하기 위한 전사를 전 우주와 각 차원에서 모이도록 하는 건데, 그 숫자는 정확히 5,000개입니다. 그리고 초인 마법의 힘으로 각 차원 이동서로 올 전사들은 그 전투력의 등급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곳에는 당신을 비롯해 거의 5,000명이 올 수 있었습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 보니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다. 뭐,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다른 차원으로부터 더 강력한 전사들을 모집한다는 것. 소위 용병의 개념 같았는데.
젠장, 내가 기분 나쁜 것은 내 서열 순위였다.
5,000명 중에 4,444번째…….
정말 하위 그룹이 아닌가. 그래도 내가 레벨 1,000이 넘고 고대 마계 신체에 케논 검까지 지니고 있는데 4,444번째라니. 도대체 여기는 어디기에 내 현재 능력을 가지고도 하위에 속하냐, 그 말이다.
물론 나는 긍정의 아이콘. 뭐 내 밑으로 적지 않은 하위 전사들이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으로 삼아야 하겠지.
게다가 나는 아직 포식의 권능으로 얻을 템이 있고…….
뭐, 아쉽지만 어쩌랴.
문제는 당장 이곳에 대해 알아 가는 것부터…….
“그럼 지금부터 내가 뭘 어떻게 해야지?”
소녀가 말했다.
“저희와 동행하면서 대륙에 베른 종족의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서 그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쳇, 무슨 게임 퀘스트 NPC 말하는 듯하네. 뭐, 하기야 현재 내 상황이 레벨 업 아닌가. 나는 게임 속 유저이고…….
그런데 그 게임을 누가 만들었냐 하는 궁금증. 아직 나는 내가 왜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살고 있다.
마치 근본도 모르는 자식처럼, 현재 내 기분은 그랬다.
“가자. 뭐, 어디든 일단 부딪쳐 봐야 뭐를 알 수 있는 법.”
“네, 이형도 님.”
“그런데 네 이름은 뭐지?”
“레아입니다.”
“저 싸가지 없는 놈의 이름은?”
“아서입니다.”
순간 아서는 성질을 버럭 냈다.
“이봐. 4,444호. 말조심해!”
“4,444호……?”
레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이형도 님은 정식으로 타르켄 전사 4,444호로 불립니다.”
“쳇. 이거 뭐, 공장에서 찍어 내는 통조림 일련번호도 아니고!”
* * *
뾰족한 봉우리만 수백 개였다. 대부분 구름을 뚫고 그 만년설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높은 곳은, 유난히 크고 정상이 평평했다. 놀랍게도 그 위에는 거대한 성이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성루 중앙에는 한 백발노인과 중년인이 보였다.
그들은 바로 초인계의 군주 아르엠과 초인 마법사 수장 카시아스.
“이보게, 카시아스.”
“네, 군주님. 말씀하시죠.”
“타르켄 전사의 초인계 입성 숫자가 어느 정도 되나?”
“어제부로 정확히 5,000명이 차원 이동되었습니다.”
“흠, 자네와 자네의 동료 초인 마법사들의 노고가 컸네. 그나마 그들로 인해 베른 종족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