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이제 각성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물론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너 정도는 충분히 죽일 만큼의 능력을 찾았기에 그에 대한 첫 번째 제물로 네놈이 선택된 것을 기쁘게 받아들여라.”
각성의 완성이라고?
역시 뭔가가 있었다. 아무리 천하의 안하무인 격의 그라지만 자신이 빤히 당하는 꼴을 알고도 저렇게 자신만만할 수는 없는 법이다.
홀론의 각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함은 전생의 능력을 거의 90퍼센트 이상 찾은 격. 그도 나처럼 뭔가 큰 기연을 얻은 모양이었다.
물론 클레이토스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가, 각성……? 지금 뭐래는 거야. 아무튼 내가 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는 데 익숙하지 않지만 그 말의 의가 곧 도전이라는 건 알지. 그리고 결과에 따라 죽는 건 당연지사. 그래도 겁 안나?”
나승구는 평소 그답지 않게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 나는 한때 행성을 공포에 떨게 했던 대전사 카르디엠! 자! 도전은 자네가 내게 하는 것임을 알라.”
으잉! 설마 전생의 기억도 완전히 찾은 것인가?
그렇다면,
이 싸움, 볼만하겠는데…….
그렇다.
홀론의 각성자들의 무서운 점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일반 헌터들처럼 그 어떤 원천으로부터 힘을 부여받고 각성하는 단계가 아닌, 전생이 곧 환생임을 자각하는 존재들.
하지만 과연 그 행성의 대전사라는 전생자의 전투 기술이 얼마나 강력한가에 따라 이 대결은 승패가 갈릴 수 있다.
솔직히 나는 만일 거액을 가지고 내기를 하라고 한다면 아직도 클레이토스에게 걸 용의가 있다. 그는 엑스를 제거한 장본인. 엑스 자체가 가히 무적일 만큼 초월적인 존재였기에 그와 비교해서 우위에 있는 클레이토스가 낫다고 여긴 것이다.
타다닥!
나승구가 먼저 대검을 조준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이 시발 새끼! 아주 가루를 만들어 버리겠다.”
전생에도 저렇게 쌍욕이 아주 입에 베였는지 궁금하다.
“얼마든지.”
클레이토스 역시 허리춤으로부터 검을 꺼내 그에게 달려갔다.
창!
창!
창!
창.
초반 격돌에 쉽게 끝나나 싶어 다소 걱정했는데, 다행스레 그 힘겨루기에 있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등함을 보였다.
나승구의 대검은 각성 단계가 올라서 그런지 이미 빛처럼 밝은 섬광을 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클레이토스의 검은 그저 초라해 보이는 철검에 지나지 않았다.
“예의상 한 수 내주고 부딪쳐 봤다.”
클레이토스의 자신만만함에 나승구도 뒤지지 않았다.
“몸풀기는 여기까지! 시발 새끼, 지금부터 진짜다.”
제발! 저 욕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명색이 우주선의 사령관 지위까지 올랐는데 하는 말투는 꼭 사춘기 여중생의 반항하는 듯한 저질 쌍욕.
“제발 이 대결에 격이 좀 있었으면 바란다. 진심으로.”
차라리 클레이토스가 보기보다 그런대로 점잖은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인간이던가.
“자! 힘부터 빼시고. 그처럼 육중한 대검은 갈대처럼 유연하고 절묘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진리를 모르시나, 후후.”
녀석은 마치 시인 같은 여유까지 곁들었다. 물론 내게 있어서는 강자의 권리인 양, 상대를 발아래로 봐야만 가능한 태도로 보였다.
“이얏! 빛검의 폭주!”
파파파팟.
쾅! 쾅! 쾅! 쾅!
나승구의 대검으로부터 발사된 빛줄기들이 사방으로 튀며 금속 기둥이나 벽면을 그대로 관통시켜 버렸다.
방금 전 ‘빛검의 폭주’라 그랬던가? 일단 그 파괴력 이전에 멋있었다.
물론 한낱 검강 따위를 더 멋들어지게 해석하여 빛검이란 용어를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클레이토스는 그 자리에서 피하지 않고 자신에 발산된 한 줄기 빛검을 손아귀로 감싸며 고체처럼 쥐고 있었다.
그는 마치 추운 날 온기를 느끼듯.
“따뜻해, 너무. 흠, 온몸이 훈훈해지는 것 같군. 겨울에 난방용으로 쓰면 아주 좋겠어.”
그리고 쥐고 있던 빛검을 역으로 나승구에게 던졌다.
홱!
파파파팟.
쾅!
순간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놀랍게도 그는 나승구의 검강을 받아 그걸 수십 배로 증폭시켜 역공격을 했던 것인데, 과연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구덩이 파인 곳에서 나승구의 멀쩡한 모습이 보일지.
“아냐! 아냐! 이렇게 끝나면 안 되지. 난 아직도 제대로 된 퍼포먼스를 보여 주지 않았다고. 그러니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고.”
클레이토스는 정말 걱정을 하는 표정이었다. 대결이 너무 쉽게 끝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듯.
“하하, 개새끼. 기대했던 대로다. 고작 제1장에 네놈이 뒤질 뻔했을까 내가 오히려 걱정이었다.”
역시나 대장다웠다.
욕만 빼고.
그나저나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할까. 분명 제1장이라 말했건만. 그렇다면 이제 시작이라는 건가.
보통 제1장으로 시작하면 제2장, 3장, 건너뛰어 제5장까지는 있는 게 상식이다.
혹시 전생에 중국 중원에서 살았던가. 다소 무협지에서 봤던 무공 냄새가 났다.
하지만 엄연히 다른 행성 출신이라 했으니 그건 아니겠고…….
어쨌든 이 싸움, 점점 재미있어 지려 한다.
나는 아예 소파에 걸터앉아 최대한 편한 자세로 영화 관람하듯 편안하게 시청하기로 했다.
다만 내 손에 리모컨이 없는 탓에 빨리 돌리기가 없는 게 아쉬울 뿐.
그때 클레이토스는 갑자기 싸우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여유만만하게 자신의 전투력을 즐긴다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그 눈빛이 다소 묘했다.
빌어먹을!
이런 틈을 보여서는 안 되는데. 아무래도 내가 실수 한 것 같다.
나승구는 다시 대검을 들어 클레이토스에게 조준했다.
“너, 이 새끼! 다음엔 끝이다!”
“후~ 영혼 없는 말투. 툭하면 뭐 너는 죽었다는 둥 하는데, 그런 말들이 많은 자치고 제대로 된 전투 실력을 보여 준 놈 하나 없더라. 그러니 그 지겨운 대검으로 할 수 있는 최상의 공격을 펼쳐 봐라. 제1장이니까 제2장의 순서대로 따분하게 굴지 말고, 좀. 제발 부탁이다.”
어쩜 나랑 똑같은 생각일까. 나는 어째 저 클레이토스라는 놈이 점점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아차! 남 일이 아니지. 이제 초반의 전투만을 보여 주었을 뿐 만일 저 녀석이 내 상상을 초월하는 그 어떤 전투 기술을 펼친다면 나는 그때부터 마음을 졸여야 할 것이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시 시선을 저 둘에게 두었다.
타다닥!
역시 몸으로 날뛰는 자는 나승구.
착!
가만히 서서 그걸 손으로 받는 자는 클레이토스. 레퍼토리는 이미 정해진 듯.
힘과 정적의 대결 추세.
“제3장 빛의 권리!”
급하긴 급했나 보다. 제1장에서 하나 건너뛰고 곧바로 제3장이 나온 거 보니. 한데 권리가 뭔가. 뭐, 헌법 조항 읽는 것도 아니고.
파파파팟.
클레이토스가 받아 쥔 대검의 공격 섬광이 커지는 것을 보니 빛의 공격이 맞긴 한데…….
“우욱!”
처음으로 클레이토스가 신음을 흘렸다.
“뜨거워!”
“어디 한번 태양의 핵 고열을 견딜 수 있나 보자, 하하하.”
핵 고열? 뭔가 있어 보였다. 어림잡아 태양의 온도가 수천 도에 달하는데, 과연 그런 물질적 기준 수치를 말하는 것인지.
“아, 정말 뜨거워 미치겠네.”
클레이토스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나거나 피하지도 않았다.
그 의미는?
“후후. 식혀 주지, 빙결로.”
쩍!
빛 주변의 얼음 조각들. 하지만 얼었다 녹았다 반복한다.
“빙결 따위로 빛의 권리를 제압할 수는 없지. 태초에 빛이 있으라 했고, 만물은 얼음에서 해빙되어 창조의 그 시작을 하게 되었으니, 하하하.”
도대체 저렇게 멋진 말을 해 놓고 마지막에 재수 없게 웃는 모양새는 뭔가.
하여간 아군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도 일그러졌던 클레이토스의 표정이 한층 밝아진 것이 아닌가.
“태초에는 원래 암흑이 존재했지. 빙결로 안 되면 어둠이 휩싸이게 하노라.”
순간.
웅!
진동음이 일며.
작은 검은 구체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소형 블랙홀마냥 순식간에 빛을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슈슈슈슉.
“아악, 빌어먹을!”
나승구는 자신까지 빨려 들어갈 것 같아 당황해서 소리쳤다.
“안 돼!”
나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차피 이쯤에서 내가 나서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파팟.
어디선가 표창 한 개가 클레이토스의 등을 공격했다.
팅!
“제길, 누가 기습 공격을!”
파팟.
그와 동시에 블랙홀이 사라졌고 나승구는 그대로 뒤로 밀려 바닥에 고꾸라졌다.
클레이토스는 화가 나서 외쳤다.
“누구야!”
그러자.
“미안하오. 본의 아니게 기습 공격을 해서.”
박병수 아저씨였다.
사실 그가 나설 줄 알긴 알았지만 워낙 상황이 급해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박병수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클레이토스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상대하겠소.”
그러자 녀석이 삐죽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더러 다리 병신하고 싸우라고?”
하여간 악당들은 다 저 모양인가. 말투가 다 거기서 거기다.
“내 기술은 주로 표창을 던지는 것으로 그리 많은 움직임이 필요치 않소.”
“뭐라고! 그렇다면 내가 움직이게 만든다면?”
녀석이 눈빛이 번쩍하고 빛나는 순간!
우두둑!
천정으로부터 철근 기둥이 하나 쑥 뽑혀 박병수의 머리 쪽으로 떨어졌다.
홱!
쾅!
우두두.
박병수가 던진 표창이 철근을 가격함과 동시에 폭발시킴으로써 기둥은 가루가 되어 우두둑 쏟아졌다.
이에 클레이토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지루해. 누군가 표창 던지는 기술을 이미 수십 년 전에 한번 봤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 내 위치에서 그걸 다시 꼭 봐야 하나. 정말 귀찮다. 같지도 않은 무기 가지고 설치는 것들. 제발 좀 사라져 줘라.”
그가 말함과 동시에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허공에 형성된 수십, 수백 개의 별 모양 표창들.
“이런 것들로 나를 공격하려는 거지.”
오히려 박병수 대신 표창들을 만들어 낸 클레이토스가 선제공격을 했다.
“박아!”
홱! 홱! 홱! 홱!
퍽! 퍽! 퍽! 퍽!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박병수는 피하지 못하고 그만 그 표창들에 다 박혀 고슴도치 시세가 되고 말았다.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표창 같은 건 절대 다루지 마라. 무기 중 가장 쓸모없는 것이 바로 표창이니까. 에휴, 참.”
녀석은 이미 승부가 끝났다고 보고 등을 돌리려 했는데.
“그 정도만 보여 주고 그대로 가 버리면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봅니다.”
표창에 이미 피투성이가 된 박병수 아저씨의 반전이 있을 줄은 사실 처음부터 알았다.
스윽!
몸에 박혔던 표창들이 절로 뽑혀지면서 역으로 클레이토스를 공격했다.
파파파팟.
녀석이 손을 휘두르자 표창들이 그 자리에서 정지되었다.
퉁!
둘 사이에 멈춰 버린 표창들이 어디로 방향을 틀까, 하고 마구 진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니 그것들을 조종하는 두 대결자의 공력 싸움으로 변환되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아니!
공력이라니?
설마 박병수 아저씨가 저 무지막지한 놈을 상대로 정말 공력을 펼치려는가.
그게 전공이 아닌데.
클레이토스는 갑자기 쭈뼛 서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 박병수를 보며 한마디 한다.
“후후. 이제 보니 공력자로구먼. 제법 세게 나오는데. 표창 기술은 그저 치장용.”
박병수의 고요한 표정, 그저 가만히 서 있는 듯 녀석의 눈만을 주시했다.
중간 허공에 떠 있는 표창들의 날이 클레이토스로 향하는 순간.
파팟.
착!
표창들이 클레이토스의 코앞에 이르러 그 자리에서 멈췄다. 공력의 힘겨루기가 그 균형을 깬 듯.
그때 클레이토스는 안주머니에서 안경 비슷한 도구를 얼굴에 썼다.
“어디 보자.”
“…….”
“대단해. 정말이지 뜻밖의 복병을 만났군. 도대체 공력 수치가 1,000이 넘어가는 게 말이 되나?”
공력 수치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던가. 그는 안경을 통해 그 숫자를 확인한 것 같았고, 이내 두 주먹을 쥐고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