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그때 파탄이 손으로 내 머리를 잡더니만 고개를 갸웃했다.
“흠, 오랜만에 보는 인간인데 이놈은 어째 기류가 특이한데.”
노인이 옆에서 말했다.
“그냥 죽이시죠.”
파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이제 죽었구나 싶을 때 그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흠.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주군, 뭘 망설이십니까. 이 세계에서는 그야말로 벌레만도 못한 종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없애 버리시죠.”
그 와중에도 나는 여전히 그가 등 뒤에 찬 케논 검을 바라보며 그야말로 애원하다시피 했다.
‘제발, 포식의 권능이여! 발동돼 줘라! 제발.’
그때 귓가에 울려 퍼지는 음성.
[본 아이템은 인간에게 포식의 권능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뭐라고!
발동되지 않는다니.
인간이라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중요한 순간에 뭔 개소리란 말인가.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소리를 쳤다.
“빌어먹을! 개새끼야!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야. 시발.”
이런 게임 시스템을 만든 자가 아직도 누군지 모르지만 나는 이성을 잃었고, 그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어차피 뒈질 목숨.
그런데 억울했다.
이렇게 험하게 죽어야 하는지.
그리고 눈을 감고 체념을 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여기까지가 내 운명이려니,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다만 내가 미쳤는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후후, 그래도 그동안 즐거웠다. 나 이제 간다, 골로. 후후.”
…….
…….
조용했다.
잠시 후.
“이보게, 하론! 자네 혹시 내 앞에서 이렇게 감히 당당한 존재를 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인간일세! 인간! 하하하, 천계의 전사들마저 내 앞에서 벌벌 떨더만 어찌 한낱 미물인 인간이란 자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이리도 자신만만하던가, 하하하.”
노인이 말했다.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놈입니다. 그냥 제거하시죠.”
“아닐세, 나는 마계의 12사제 중 하나. 이런 당당한 자를 만났거늘 내가 하등에 인간을 죽였다는 말이 나돌면 그게 수치스런 일이로다!”
파탄은 나를 그 앞에서 놔주었다.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
“그래, 네 이름이 뭐던가?”
나는 어차피 죽은 목숨,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이시스프 2세이다.”
“허, 이름도 멋지구나. 그래 직업은?”
“황제이다.”
“화, 황제라고?”
그는 다소 놀란 듯 내 표정을 살폈다. 그러고는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어쩐지 다른 구석이 있었군. 한데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두렵다.”
“두렵다고? 지금 내 앞에서 그리 눈을 치켜올리고 감히 말하는 자가 그런 말이 나오는가?”
“체념하면 다 이렇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그러니 더 이상 놀리지 말고 죽여라.”
“오호! 이거 완전 물건일세.”
나도 이상했다. 내가 어찌 이리도 당당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이건 내가 말하는 게 아니라 황제가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치 엄청난 배포를 가진 존재, 나는 그가 되어 대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마음에 드는군!”
그때 파탄은 노인에게 말했다.
“이보게, 하론. 나는 이제 내 고향 마계로 귀환을 할 것이다. 내가 케논 검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다른 사제들의 시기와 질투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 몸을 사려야 할 것이다.”
“네, 제 생각 역시 같습니다. 케논 검을 얻으시고 이 정도 공을 세우셨다면 마왕께서도 군주님의 귀환을 흔쾌히 허락을 하실 것입니다.”
파탄이 이번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데리고 가주마.”
순간 노인이 깜짝 놀랐다.
“그건 안 됩니다.”
“안 되다니?”
“마계에 인간을 들여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하, 그런 법도 있었더냐.”
“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데려간다 하심은, 왜?”
“그래, 말 잘했다. 나는 방금 전 이자를 굳이 데려가야 할 명분이 생겼다.”
“명분이라니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자! 마계로의 포탈을 열어라.”
잠시 후.
파팟.
푸르스름한 게이트가 열리고, 나는 그들을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갔다.
* * *
여기까지가 내 한계란 말인가.
내가 인간이라서?
그럼 뭐가 되어야 포식의 권능이 발화되는 건가.
빌어먹을, 말 그대로 인간 차별을 당하는 기분이랄까.
그렇다면 이곳 나카스니아 대륙의 존재들은 얼마나 잘났기에 그런 템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인지.
내가 보기에는 별 대단하지 않은 것 같은데. 하다못해 내게 물을 떠 다 주는 저 붉은 피부의 마계 여자 시종.
“여기 물드세요.”
“…….”
나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생겼을까.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 혐오스러운 외형은 내 신경을 건들고도 모자라 결국 성질을 노골적으로 분출시키고야 말았다.
“제발, 내 방에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되겠소?”
“죄송합니다. 저는 다만 군주님의 지시에 따르고자.”
“됐소! 물잔은 거기다 놓고 나가 주시오!”
그 말에 그녀는 재빨리 뒷걸음질을 치며 방을 빠져나갔다.
“…….”
그리고.
나는 후회한다.
내가 왜 이리 과격하게 변했는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
방금 전 내가 한 행동과 말투는 내가 아니었다.
그건 황제가 분명했다.
그렇다. 나는 이곳에 와서 이중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닌 다중 인격자가 되어 버렸다.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분명 이형도와 황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어김없이 분노가 일었다. 생전 화를 크게 내 본 적이 없던 나인데도 내 안에 있는 그 뭔가가 나를 미치도록 화나게 만들었다. 그토록 착했던 이형도는 점점 사라지고, 황제가 나를 차지하고 점점 그 야욕을 드러내려고 했다.
오히려 그 거친 기질 덕분에 나를 이곳에 데려온 파탄으로부터 신임을 더욱 받게 되었지만…….
“황제여, 그대의 안색이 좋지 않구려.”
“내 황궁이 아니거늘 어찌 마음이 편하겠소.”
“하하, 그 성질 여전하군. 내 일찍이 그대와 같은 배포를 가진 존재를 만나 보지 못해 무료했건만 마치 옛 교우를 만난 듯 이렇게 기쁘니, 내가 혹시 미친 것이오?”
“내가 보기에는 미친 것이 맞는 것 같소.”
순간 아차 싶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뱉어 버린 너무도 담대한 말투, 이 또한 내 내면 속의 황제가 한 말이었다.
그 덕분에 파탄은 좋아했다. 다소 묘한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목숨이 또 연장되었고. 그렇기에 지금 당장 나를 대신하는 황제를 뭐라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일단은 그가 조종하는 대로 말할 뿐.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티어야 하는가.
최소 내 본질이 이형도라는 것을 느끼고 있을 때 나는 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황제에게 완전히 먹히기 전에 말이다.
“자, 황제여. 드디어 내가 그대에게 보여 줄 것이 있도다. 그래서 여기 마계에 데려온 것이고.”
“후후, 무슨 수작을 부리시려고 하오.”
“하하, 수작이라? 맞소! 나는 지금 그대에게 수작을 부리는 거요.”
그로부터 며칠 후.
내가 지금까지 본 것들 중에 제일 넓은 방이었다. 아니, 방이라기보다는 천장이 돔 구조에 엄청난 두께의 대리석 기둥이 떠받쳐진 강당 같았다.
파탄은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오더니 그냥 나가 버렸다.
도대체 나더러 여기서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왠지 불안했다.
일단 주변을 살펴보니.
저 앞쪽으로 소파 같은 것이 있었다. 그때 들려오는 여자의 음성.
“이번에도 그저 그렇고 그런 놈이 들어왔다면 전에 그자들처럼 생으로 살갗을 쫙쫙 찢어 버리고 그 속살에 소금을 뿌려 잘근잘근 씹어 먹어 버릴 테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으니 한 번의 기회를 주지. 당장 나가.”
“…….”
순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여자의 음색부터 뭔가 내공이 실린 듯 표독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 실제로 그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귀를 못 알아 처먹었나. 내 소문 들어서 알 텐데. 지금까지 수십 명이 방금 전 내가 말한 대로 고통스럽게 죽었어. 아마 아버지가 또 어디서 얼간이 하나 구해 가지고 내 방에 들인 모양인데, 분명 기회를 준다고 했다. 나도 더 이상 이 짓거리 하고 싶지 않거든.”
사, 살려 주세요. 하마터면 이 말이 나올 뻔했다.
파탄의 의도가 뭔지 눈치 차렸을 때 이미 때는 늦었다. 자기 딸과 대적할 수 있는 자, 혹은 가정교사, 혹은 말동무라도 해 주라고 이 방에 들여보낸 것 같은.
빌어먹을! 완전 속았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또다시 내 내면으로부터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 툭 튀어나왔다.
“미친년, 지랄하네!”
황제였다.
‘아.’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내 안의 문제를 놓고 생각 중에 있었고.
내가 왜 이럴까, 하는…….
상대가 강하면 저절로 더 강하게 반응하는 말투.
이제 보니 내 안의 황제는 내 원래 본질이라 말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론의 각성자이다.
그 기질을 하나둘씩 각성하는 존재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찢어 죽인다고 말은 헛소리인가! 자, 어서 내 껍질을 벗기고 생살을 씹어 먹어라! 어차피 황제가 된 이 몸이 계집 따위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도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수치스러울 뿐!”
그때.
“황제라고……?”
소파에서 일어난 붉은 피부의 여인. 그 색깔과 어울리지 않게 금발을 늘어트린 채 내게 다가왔다.
“인간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그녀는 코를 들이대고 킁킁 냄새까지 맡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만 이내 방긋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사과하지.”
“…….”
상대가 다소 약하게 나오자 원래의 내 모습인 이형도가 발동을 했던가.
“아, 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이 등신아.”
순간 분노가 다시 일었다.
“이 계집년이 감히 누굴 놀리는가!”
“감히라고? 인간 따위가 내 앞에서 ‘감히’라는 말을 써!”
순간.
짝!
뺨따귀가 날아왔다.
그 즉시 나도 모르게 손이 치켜 올라갔으니.
짝!
보기 좋게 그녀의 뺨을 갈긴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후후, 아버지가 이번엔 제법 잘 골랐네. 인간치고 이렇게 배포가 큰 남자가 있다니. 정말 놀라워! 하지만 아직은 속단하기 이르지.”
그때 그녀가 팔을 뻗쳐 내 목을 졸랐다.
홱!
“우욱!”
“또 짖어 보시지.”
“컥!”
엄청난 완력이었다. 나는 이내 허공에 매달려 발을 동동 구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니, 목이 졸려와 점점 숨을 쉬지 못했다.
애석한 일이지만 내 안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네 이년! 컥컥! 차, 차라리 단칼에 내 목을 베어 죽여라! 컥.”
그녀가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야, 이 인간.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눈빛이네.”
“이년! 더 이상 수치스럽게 하지 말고 당장 죽여라. 컥! 컥!”
그녀는 땅바닥에 나를 내려놓았고, 신기한 얼굴로 나를 살폈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만 손으로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계속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뭘까? 이 인간…….”
그녀는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며 갑자기 삿대질을 했다.
“야! 이 새끼야! 아까 네가 내 뺨을 때렸냐?”
순간 나도 모르게 힘껏.
짝!
그녀의 뺨을 또 강하게 후려쳤다.
“이건 감히 황제인 내 목을 조른 대가이다.”
“…….”
그녀는 너무도 어이가 없는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가 날 살려 준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살려 준 것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