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이곳은 전장인데 하필 그 좋은 곳을 놔두고 분쟁 지역에 오셨소.”
“이분의 바람이 그렇소. 직접 그대들의 전장을 체험 하고 싶다고.”
“아, 그렇소. 그렇다면 잘 오셨소. 어차피 여긴 후방 지역이니 안심하셔도 될 테고, 이곳에 막사를 내줄 테니 일단 두 분께서 쉬기 바랍니다.”
그때 사내가 손을 들어 바로 앞 공터에 손가락을 퉁겼다.
탁!
파팟.
순간 뭔가가 형성되더니만 이내 큰 막사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나와 카루소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아늑했다. 간이 침대 두 개에 탁자 의자들, 그리고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인 것은 막사 벽면에 세워진 검이었다.
그때 카루소가 내게 다가오더니만 그걸 집어 들고 건넸다.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기 바라오.”
“호신용이라니요.”
“비록 이곳이 후방 지역이라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오.”
나는 검을 집어 들고 그것을 살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았다. 내가 현재 지닌 아스가의 검보다 가벼웠고, 그 문양은 더욱 화려했다.
물론 나는 이미 검을 차고 있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저는 제 검을 사용하면 되니 이것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카루소가 무슨 이유인지 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그런 인간계의 검은 여기서 쓸모없소. 하다못해 수풀 하나 베기도 어려울 것이오. 그러니 여기 신계의 에너지로 창조된 이 검을 대신 사용하도록 하시오.”
“…….”
신계의 에너지로 창조되었다니?
그제야 나는 이 검이 내가 처음 느꼈던 것과는 뭔가 다른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카루소의 말대로 그걸 집어 두어 번 휘둘러봤다.
톡! 톡! 톡! 톡!
신기하게도 검날 주변에 밝은 빛들이 형성되면서 작은 섬광들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가슴이 설렜다.
혹시…….
검강.
카루소가 내 표정을 살피며 다시 빙그레 웃었다.
“검강 맞소. 인간 세계에서는 오로지 극강의 고수만이 내뿜는다는 검강이 여기서는 그저 일반 병사들도 시전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한 것이오.”
한데 허기가 지지 않는다.
아쉽게도.
당장이라도 포식의 권능으로 먹고 싶은데.
그 날 저녁.
막사에 갇힌 채 좀처럼 바깥 구경을 할 기회가 없었다. 전군 비상 체제 돌입이라는 이유로 이곳 후방 지역조차 경계 태세에 돌입한 것이다.
카루소마저 이 자리에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그마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불안감에 휩싸여 막사 안을 왔다 갔다 하는데, 도저히 바깥이 궁금하여 참지 못하고 입구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살폈다.
“전군 무장!”
“각 대대 전사들, 최전방 방어 위치 포진!”
“자! 빨리빨리 움직여!”
분주하게 움직이는 전사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대체 카루소는 어딜 갔는지. 때마침 저 앞에서 헐레벌떡 그가 이쪽으로 뛰어왔다.
“황제! 큰일 났소.”
“큰일 나다니요?”
“아무래도 포위당한 것 같소.”
나는 심장이 덜컹했다.
“포위라니요. 여기 후방 지역 아닙니까?”
“이젠 아니오.”
“아니라니요!”
“적에게 허를 찔렸소. 놈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루트인 얀센 산맥을 넘어올 줄을 생각지도 못한 일이오.”
“그럼 어떡합니까?”
이에 카루소는 힘없이 말했다.
“미안하오. 이미 고립된 이상 그대와 나는 여기서 더 머물 수밖에 없소.”
“…….”
“이왕 이렇게 된 거, 사태의 추이를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합시다.”
그때였다.
쾅!
우르르.
우지직!
어디선가 들려오는 굉음 소리.
이어 전사들의 외침이 진영을 흔들었다.
“메가트 방어선에 놈들이 공격해 온다!”
“빌어먹을! 서쪽 바트란 방어선도 공격을 받고 있어!”
“후속 부대 제1 부대 출동!”
“제1 부대 가지고는 역부족이야. 한 명도 빠짐없이 전 병력이 지원해도 모자란다고!”
이어 이곳에 남아 있던 천공 전사들 모두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시 후.
…….
…….
잠잠했다.
아니, 고요하다고나 할까. 그 많던 막사들이 텅 빈 느낌, 애석한 일이지만 카루소와 나만이 이곳에 남겨진 느낌이었다.
카루소가 내게 말했다.
“아. 이걸 어쩌면 좋단 말이오.”
“…이곳도 포위된 겁니까?”
“그런 것 같소. 그러니 우리도 살길을 찾아 어디로든 가야 하오.”
눈앞이 캄캄했다.
꿈속은 늘 안전할 줄 알았는데. 그저 황제의 자격으로 편안하게 놀고먹다 여기서 생을 마감하려 했거늘.
그때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
만약에…….
여기서도 죽는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게 궁금했다.
왠지 꿈속에 갇혀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소멸될 것 같은 기분.
젠장!
그때 카루소가 외쳤다.
“당장 갑시다!”
“어디로요!”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적어도 이곳은 곧 적들이 들이닥칠 것이오. 그러니 갑시다.”
그가 향한 곳은 해가 든 반대 방향, 서쪽이었다.
“자, 서두르시오!”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이미 저 상공 위에 한 점이 된 카루소를 따라서.
그도 급하긴 급했나 보다. 내가 잘 따라오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것을 보니.
한데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순간 카루소는 구름을 속으로 들어가는데.
“자! 빨리 따라오시오!”
그래 놓고 사라졌다. 나 역시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구름 속으로 들어갔는데, 순간 시야가 안 보였다.
그래도 급한 김에 무조건 앞쪽으로 비행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카루소! 어디 있습니까! 카루소!”
대답이 없었다. 설마 그를 놓친 것일까.
“카루소! 대답 좀 해 보세요!”
하지만 아직 구름 속이었다. 캄캄한 밤을 비행하는 마냥 먹구름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빌어먹을. 어디 있습니까!”
…….
…….
그렇게 한참을 더 헤맸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를 찾지 못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미아가 된 것 같았다. 이 광활한 나카스니아 대륙의 어느 상공에서 말이다. 그것도 적들이 쫙 깔려 있을 법한 위험 지역에.
어쨌든 일단은 당장 숨을 곳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대로 하강을 했다. 잠시 후 숲이 보였다. 날갯짓도 오래 하다 보니 너무도 피곤했다. 결국 밀림 한가운데로 안착했다.
왜……?
내게는 왜 이런 삶이 주어졌을까.
이제는 어느 것이 현실이고, 꿈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다만 그때마다 안주하고 싶은데 양쪽 세계 다 그럴 틈을 전혀 주지 않았다.
그나마 현실에서는 꿈을 꾸며 말 그대로 꿈 같은 경험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꿈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소멸이라는 것.
그런 생각이 왜 자꾸만 드는 건지. 내가 처한 지금의 환경, 신들의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나는 너무도 나약하고 초라한 내 모습에 점점 자신감이 떨어지고, 그저 좌절과 절망만이 느껴진다.
이대로…….
그때였다.
부스럭.
인기척 소리에 나는 급하게 나무 뒤로 숨었다.
두 명의 사내가 보였다. 한데 그 생김새가 인간형의 군장인 걸로 봐서 아군인 천공 전사 같았다.
그 둘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몹시 힘든 기색이었는데.
“컥! 컥!”
“이번에도 완전 당했어!”
서로를 부축하며 이쪽 공터로 걸어오며 몹시 흥분한 상태에서 말을 주고받았다.
“절대 그럴 수 없네! 그건 태초의 천체 질서를 무너트리는 사건이란 말일세. 겨우 이따위 전쟁에서 권능이 권능을 잡아먹는 이단 형태의 검이 출현하다니! 빌어먹을!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 우리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니! 그 마왕의 졸개인 파탄이 케논 검의 권능을 사용한다고 우리 천공 전사들이 몰살당한다는 게 말이 되나.”
한 사내의 말에 다른 사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생각이 다르네. 파탄이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차피 우리 천계가 빌미를 제공한 일, 이제 와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지.”
“자네는 누구 편인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적은 마계라고! 그 결과가 이렇게 된 것은 그놈들의 야욕이 먼저가 아닌가!”
“그 전에 천계 수장들의 탐욕이 먼저일세. 우리 같은 천공 전사, 아니 졸개들이야 그저 상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지만 이건 너무도 억울한 일일세. 봉인된 케논 검을 세상에 내놓지만 않았어도 마계에서 탐을 낼 리가 없었고, 전쟁은 더더욱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 케논 검을 마왕의 48사제 중 하나인 파탄이 차지했다는 것. 그 때문에 이곳 방어선 일곱 군데가 속수무책 뚫리고 아군의 수많은 희생자가 생긴 것이 아닌가.”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울분을 토하는 자의 말 내용보다 그에게 훈계하듯 하는 자의 말 내용에.
케논 검……?
템을 먹다 보니 자연스레 직감이라는 게 생겼고, 방금 전 저들이 말한 그 검이 내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조금 더 주의 깊게 들어 보기로 했다.
“천공의 기운을 차단시킨다는 것이 애초에 사기가 아닌가. 우리 천공 날개의 마비와 검강 차단 같은 순수 본연의 권능을 잃게 하고 오히려 그 힘을 흡수하여 역으로 엄청난 파괴력을 발산하는 케논 검을 파탄이 지닐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일세.”
“그래도 파탄은 마왕의 직속 수하에 해당하지. 그러니 그것을 지닐 수 있을 만큼 강하다네.”
“하, 그렇다면 더욱 큰 문제가 아닌가. 파탄보다 강대한 놈들이 위에 존재하고, 마왕의 힘은 얼마나 세다는 것인지. 빌어먹을, 이 전쟁은 애초부터 우리가 지게 되어 있는 수순이군.”
“아직은 속단하기 이르다네. 우리 천계에서조차 그보다 강력한 병기들과 장비들이 존재하니 말일세.”
“그럼 또 봉인을 풀어야겠군. 그러다 그것들을 마계가 다 차지한다면 어쩌려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걸세. 이번 케논 검은 실수로 파탄에게 넘어간 것이고, 그는 그 이상의 병기를 얻지 못할 게 확실하지.”
바로 그때 들려오는 음성.
“후후, 나 파탄이 그걸 얻지 못한다는 법이 어디 있지?”
순간 두 천공 전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어느 사이에 와 있었는지 한 붉은 피부의 흑색 법복을 착용한 자가 이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옆에는 노인이 부복을 하고 있었다.
“주군, 저들이 마지막 패잔병들 같습니다.”
이에 파탄은 인상을 구겼다.
“서열 얘기만 하지 않았어도.”
이어 검을 뽑아 하늘로 치켜세웠다.
“이제 이 케논 검을 지녔으니 내가 마왕을 능가할지도!”
순간.
파팟.
케논 검으로부터 기류가 발산하며 두 명의 천공 전사를 감싼다.
“아악!”
그들은 오그라들며 순식간에 해골로 변해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잠시 후 노인이 파탄에게 다가가 말했다.
“근처에 한 놈이 더 있습니다.”
“한 놈이 더 말인가?”
“그 기류가 천공 전사는 아닌 듯싶은데, 일단 직접 살펴보시죠.”
노인이 손을 내밀자 나무 뒤에서 숨어 있던 내 몸이 절로 허공에 떴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이대로 끌려가서 죽는가 싶었고, 체념의 표정을 지었다.
‘아.’
그때였다.
“어?”
허기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혹시!
포식의 권능이…….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만약 저 템을 먹을 수만 있다면 난 꿈에서 깨어날 테고, 그 후 다시 꿈속에 들어가도 강자가 되어 저들에게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인간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라니?”
파탄은 케논 검을 꺼내지도 않고 그저 눈빛만으로 나를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오게 만들었다.
“뭐야, 네놈은.”
그 와중에도 내 눈길은 오로지 그가 등에 차고 있는 케논 검에만 집중이 되었다.
역시나 배가 무척 고팠다. 템이 내게 제발 자기를 먹어 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마냥 햇빛에 눈부시게 빛이 났다.
‘아, 살았다.’
내심 쾌재를 불렀다.
자! 포식의 권능이여, 발화되어라. 어서!
마음속으로 빌고 빌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허기만 질 뿐 당당 내가 원하는 그 순간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제길.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 왔다.
왜?
왜? 발동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