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 *
휘잉~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 시원함은커녕 추워서 옷깃을 추켜세우느라 바빴다.
“계절은 여름인데 이곳 산 정상은 영하 날씨군.”
하얀 눈밭, 그저 TV로만 보던 여행 프로그램에 나오는 만년설이 이런 게 아닌가 싶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가 맞는지 주변을 살폈다.
지면 한곳으로부터 사방으로 여러 갈래로 갈라진 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냥 한눈에 봐도 지진에 의해서 자연적인 갈라진 게 아니라 어느 일정 지점에 뭔가 꽂혔을 때 그 주변으로 일정하게 틈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였다.
“맞는 것 같군.”
자 그렇다면 누가 이런 어마어마한 짓을 했는지 그를 찾아볼 필요가 있었다.
바로 내게 서신을 쓴 자.
이름도 모른다. 성도 모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저 미지의 인물. 그나저나 나카스니아 대륙이라니.
학자들의 말을 들어 보니 그곳에 대한 내용이 문헌 곳곳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아주 적은 암시들, 짧은 소개로 지극히 일부분만 전해져 오는 신비의 대륙이랄까.
나카스니아 대륙에 관한 내용을 대충 요약해 보자면 이랬다.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곳.’
‘허상이지만 허상이 아닌 곳.’
실재한다는 것이지 허상이라는 것인지 모르는 미스터리의 영역, 하지만 분명 그곳에 대한 여러 일화들은 존재했다.
문헌들을 종합해 보자면 인간 위주가 아닌 주로 영물 위주의 세계. 드래곤이나 요정, 정령, 괴물 등등이 그에 속한다.
물론 그곳에 가 본 적이 있는 인간들의 경험과 목격담을 듣고 기록한 글들이지만 그 내용이 일치하고 공통점이 있기에 실재할 것이라 믿지만 그렇다고 그 대륙의 실체가 완연하게 드러나지 않은 이상 그저 상상의 세상이라 여기는 것이 이곳의 현실적인 관점이다.
어쨌든 나로서는 그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곳에 홀로 온 이유는 서신의 주인공이 범상치 않은 존재임에 뭔가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템이다.
그가 지닌 병기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대지에 금을 가게 만들었나 싶은. 혹시라도 내가 먹을 수 있는 템이 아닌지에 대한…….
그러나 허기가 지지 않은 것으로 봐서 아직은 뭐라 속단하기에 이르렀던가. 생각해 보니 포식의 권능이 발화한다 해서 세상 그 모든 것들을 먹을 수 있다면 그게 더 사기가 아닌가.
다시 말해서 마구잡이로 무식하게 배를 채운 뒤, 단번에 극강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은 나로서도 별로 원치 않는 일이다.
세상 이치라는 것에는 순서가 있는 법. 그 기연이 내게로 다가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다 아니면 말고 뭐 얻을 수 있다면 좋은 것이다. 세상만사 한 번에 너무 욕심내지 말라는 우리의 어머니 말씀이 기억이 나는 순간.
“그대가 황제요?”
누군가의 굵직한 음성.
주변을 둘러보니 한 사내가 어느새 내 뒤에 와서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인기척도 없이 온 그 존재에 대해 깜짝 놀랐지만 이내 저 사람이 서신의 주인공이 아닌가 하며 애써 침착했다.
“그렇소. 내가 황제요.”
그러자 사내는 갑자기 자기가 들고 있던 검을 지면에 꽂더니만 말했다.
“이걸 주겠소.”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고 그를 바라보았다.
“주겠다니?”
“내 고민을 들어주면 말이오.”
“고민?”
“그렇다. 그대는 인간들을 다스리는 왕이니 사리분별을 잘할 것 같아서 내 기꺼이 이 대지의 검을 주겠다는 것이다.”
순간 내 귀가 쫑긋했다.
대지의 검이라고…….
바로 그때였다.
파팟.
바로 앞 허공에서 누군가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보아하니 여인 같았다. 그녀는 내게 다가오더니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 위에 놓인 금속 날개 모형.
“황제여. 내 고민을 들어준다면 나는 이것을 주겠소.”
“…….”
나는 이 상황이 뭔가 싶어 잠시 멍했는데 여인이 말했다.
“대지의 검보다는 이 천공 날개가 훨씬 값어치가 나가지. 그러니 너는 내 고민을 들어줘야 마땅할 것이다. 아니 내 편이 되어 나를 두둔하면 더욱 좋지.”
순간 사내가 화를 냈다.
“웃기는 소리! 그까짓 천공 날개보다 대지의 검이 훨씬 낫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여인도 성질이 만만치 않은 것 같았으니.
“지금 나한테 소리 질렀어요?”
“그래 질렀다!”
“천성은 속이지 못한다더니! 대지의 땅거지가 가질 수 있는 건 오로지 그것밖에 없겠지.”
사내는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땅거지라고! 지금 네가 천공 전사라고 나를 무시하는 거냐.”
여인의 독설은 더 심해졌다.
“당연하지. 오로지 흙바닥 위에서나 뭐 대지의 힘을 빌린다고 끙끙거리는 거 보면 나처럼 저 하늘을 마구 날아다니며 활약하는 위대한 천공 전사의 눈으로 볼 때 그토록 하찮게 보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여보. 후후.”
“여보? 빌어먹을 놈의 여편네가 미쳤나. 지금 날 아주 병신으로 만드네.”
“원래 그런 족속 아니었나요?”
이제 보니 저들은 부부가 아니던가. 지금 내 눈앞에서 부부싸움 하는 거 같고. 그런데 내 앞에서 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건지.
“이보시오. 두 분.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내 말에 그제야 그들은 나를 의식했고 다소 겸연쩍어진 듯 그 기세를 다소 낮추었다. 사내가 말했다.
“미안하오. 그대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기 싫었는데 저 여편네가 덤비는 바람에.”
이번엔 여자도 내게 사과하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그대와 앞에서 이런 꼴을 보여, 하지만 남편이란 작자가 하는 짓이 꼴 같지 않아서요!”
남편이 소리쳤다.
“꼴 같지 않다니! 말 다했어? 이 우라질 여편네야.”
여자는 다시 표독해졌다.
“여편네라고! 당신이 그러니 그렇게 사는 거야. 맨날 땅바닥에서 질질! 좀 사람이 마음을 넓게 가지고 나처럼 천공 쪽으로 눈을 돌리면 안 되나!”
“빌어먹을. 또 은근히 천공 전사라고 자랑질이냐!”
“자랑질이 아니라. 현실이 그런데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죠!”
나는 더 이상 듣다못해 그들에게 소리쳤다.
“도대체 지금 뭐 하자는 거요! 두 분 다 내게 고민이 있다고 찾아와서 싸움질만 하니 이거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겠소. 다시 묻겠소! 두 분 다 고민 있으면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라져 주시오.”
그러자 사내가 대답했다.
“바로 이게 고민거리요. 제 아내 말이오.”
그러자 여자도 지지 않고 말했다.
“저도 이게 고민거리죠. 바로 남편에 대해서.”
순간 기분이 묘했다.
부부 상담소라도 찾아온 사람들인 것처럼 말이다.
그 전에 나는 아직도 저들의 정체를 모르는 입장.
다짜고짜 뭐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던가. 사내가 내게 말했다.
“그저 판단만 해 주오.”
“판단이라니요?”
“내가 옳은지 제 아내가 옳은지 말이오.”
여자도 말했다.
“저는 제 편이 되어 주시면 이 천공 날개를 줄 것이니 잘 판단해 주세요.”
남편도 말했다.
“그것에 현혹되지 마시오. 나를 도와주면 나는 이 대지의 힘을 끌어모을 수 있는 이 강력한 검을 줄 테니 생각 잘하오.”
“…….”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 상황을 다시 재정리해 보기로 했다.
둘은 부부 사이.
그런데 갑자기 범상치 않은 아이템을 가져와서 서로 주겠다면서 자기편을 들어 달랜다.
그리고 일단 그들의 템을 살폈다.
그런데 허기가 지지 않았다.
포식의 권능도 발휘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일단 거기에서 실망스러웠고…….
그러나 쓸모없는 템은 뭐 그렇다 치고 점점 저들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고민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그리고 나는 분명 서신을 받았다. 그것도 협박에 가까운.
만일 황제인 내가 이곳에 올라와서 고민을 들어주지 않으면 아크랄 산맥을 무너트려 도시 전체를 매몰시킬 것이라고.
그전에 물어볼 게 있었다.
“그대들이 가져온 검과 날개 말이오. 내가 보기에는 별로인 것 같은데. 마력도 느껴지지 않고. 그냥 시시하게. 그거 가짜들 아니오?”
그러자 사내가 말했다.
“물론 지금은 일단 그 권능을 빼 버렸으니 보통의 물건이나 다름없소. 하지만 내 고민이 풀리는 순간 대지의 검은 그 위력을 도로 갖출 것이요. 그때 그대에게 드릴 것이고.”
이번엔 여인에게 물었다.
“그 천공 날개라는 금속 장식품은 정말이지 쓸모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이걸 지니면 저절로 천공 날개가 등에 생겨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답니다. 물론 제 고민을 풀어 드리면 이 날개를 드리죠.”
“…….”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실망감.
‘흠. 어차피 하나밖에 얻지 못하는 건가?’
템 두 개가 다 마음에 들었건만.
어쨌든 나는 일단 저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하고 판단은 신중하게 하기로 했다.
“누가 먼저 고민을 털어놓겠소?”
사내가 손을 들었다.
“내가 먼저 하지요.”
“좋소.”
사내는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저 여자에게 속아서 마지못해 결혼을 했고 억울한 일들을 매일 당하고 있소.”
“억울한 일이요?”
“그렇소. 세상에서 제일 지혜롭다며 소문이 난 여신이라서 그거 믿고 결혼했더니만 이제 보니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바보에 지나지 않은 것 있잖소.”
“어떤 점에서 아내를 보는 관점이 그렇게 달라졌나요?”
“한마디로 독선적이죠.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그 똑똑함은 인정하는데 그걸 언제나 진리인 양 내게 말하고 강요하는 그 자체의 독선. 나는 대지의 신으로서 내 평생 흙을 가지고 놀며 성장했소. 그런데 어느 날 아내는 눈을 조금만 위로 쳐다보면 더 넓은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며 강요를 하기 시작했죠.”
그의 말을 들으면서 일단 그가 대지의 신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신이라고……?
그러고 보니 남편은 아까 아내를 일컬어 여신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진짜 신적인 존재들이란 말인가.
“이보시오. 황제.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요 딴청을 피우고 있는 거요.”
“아 미안합니다. 계속해 보세요.”
“물론 아내 말대로 눈을 들어 보면 저 광활하고 드넓은 우주에 넋을 잃고 경이로움에 취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오. 하지만 내게 직접 날개를 주어 날아 보려고 할 때에는 영 내키지 않았소. 그건 내가 대지의 신으로서 지켜야 할 근본적인 의무를 저버리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거절했소. 그랬더니 그 후부터 나를 설득하다 못해 비난하며 못살게 굴더라고요. 이게 바로 내 고민거리입니다.”
나는 그의 입장을 전해 듣고 이번엔 여인에게 물었다.
“그대의 고민은 무엇인가요?”
“제 고민은 남편이 너무 좁은 시야로 세상을 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천직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지의 신이라고 해서 언제까지 대지를 떠나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남편은 그걸 자신의 의무라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무는 스스로가 정해 놓은 일종의 결계와도 같은 감옥이랄까요. 즉 남편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비좁은 감옥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곳에 영원히 안주하려는 거. 바로 그것이 제 고민입니다.”
“…….”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저들의 고민거리라는 것이 새로운 세상을 거부하는 남편과 그것을 탈피하라는 아내.
음.
그래서 어쩌라고…….
“황제여. 답을 내려 주시오. 누가 옳은지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