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정말 멋지구려.”
“실제 황제 폐하께서 훤칠한 외모를 지녔다고 하십니다. 저건 동상에 불과하기에 그 모습의 재현이 10%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아버님께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황제 폐하를 직접 본 적이 있소?”
그 질문에 페르시우스는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아니 그대의 부친께서 그렇게도 자랑하시던 폐하인데 어찌 못 뵈었소?”
“폐하께서 아버님과의 인연을 끊었기 때문이죠.”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인연을 끊다니요? 왜 그러신 거요?”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날 이후로 아버님은 크나큰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으셨고요. 결국에는…….”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필시 무슨 사연이 있나 싶었고 나는 다시 물었다.
“혹시 전쟁에 휘말린 거요?”
“아닙니다. 폐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아버님을 당신의 저택에 연금시키셨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그래도 그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소. 게다가 폐하께서는 지금 엄연히 생존해 계시는데 그대가 황궁으로 찾아가 그 이유를 물어보면 안 되었소?”
그는 다시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만 말했다.
“아버님이 유언을 남기며 절대 그러지 말라 하셨습니다. 언젠가 폐하께서 찾아오시면 그 연유를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고.”
“…….”
그 말에 나는 말문을 잃었다.
언젠가 찾아오면 그 연유를 알게 된다니…….
그럼 지금 내가 이렇게 이곳을 오게 된 것이 혹시 우연이 아닌 필연이란 말인가.
다소 억지스러운 추측이지만 뭔가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어쨌든 과거의 황제와 저 청년의 부친 사이에 뭔가 사연이 있는 듯싶다.
나는 점점 이 청년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우리를 저택의 현관 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거실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저것들은?”
“군장들입니다.”
“군장들?”
그 넓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은 온통 군장들이었다. 마치 군장 수집광이 평생을 걸쳐 모은 것처럼 사방 벽과 기둥에 걸려 있었고 심지어 창가를 비롯해 이곳 현관까지……. 어림잡아 백 개는 넘을 듯 보였다.
“그대 부친께서 이토록 많은 군장을 모은 이유가 궁금하군요.”
그 말에 페르시우스는 잠시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만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언제가 폐하께서 이곳을 다시 찾아 주실 때 드릴 선물이라며 이렇게 수집하셨습니다.”
“폐하께서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역시 유독 장비들 중에 군장에 관심이 많으셨고 평생을 범상치 않은 군장을 찾아다니셨다고 합니다.”
이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황제가 아닌 현실에서의 내가 급히 찾는 것이 바로 군장이었다.
전설로 내려오는 영웅 클레이토스가 착용해서 신들을 물리쳤다는 그 군장 템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군장들을 대하니 묘했다.
하지만 포식의 권능이 잠잠하니 이들 중에는 레어템 이상의 가치 있는 것들은 없음이 분명했다.
페르시우스가 내준 차를 한잔 마시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도 내 눈에 가득 찬 저 군장에 대해서…….
“아버님은 확신하셨지요. 분명 폐하께서 원하시는 군장을 고르실 거라고.”
답답했다.
내가 그 황제인데 왜 눈에 띄는 것이 없단 말인가.
나는 그에게 군장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하고 일일이 살펴보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대부분 가죽이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고대 흉갑들. 하나같이 그 명칭이 그 아래 붙어 있었는데 센 제국에서 만들어진 것보다 다른 출처들이 많았으니 전리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내 지식으로 군장에 대해 알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더 해박한 말로 이것들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나마 레온이 나보다는 장비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에 대충 설명을 해 주는데 그거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숙부님. 이건 북방 이민족의 영웅 헥트시의 군장입니다. 그들은 순록의 가죽을 벗겨 여러 겹으로 정성 들여 그 형태를 제작했고 그 뿔을 갈아서 이렇듯 보호대로 장식을 했습니다.”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포식의 권능이 발동되지 않았기에.
미안한 얘기지만 쓸모 있는 것들이 눈에 띄지 않았으니 나는 슬슬 지루해지려 했다. 어차피 내가 황제의 신분을 밝힌들 기억이 없으니 페르시우스와 대화도 되지 않을 것이고…….
“초대해 줘서 고맙소. 황제 폐하에 대한 일화들은 여기 양피지에 꼼꼼히 적었고 아주 충분한 자료가 되고도 남았소.”
그 역시 내가 저택을 떠나려는 것을 알고 섭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더 머물다 가셔도 좋습니다.”
“아니오, 이미 신세를 많이 졌소이다.”
나는 현관문에서 배웅을 받고 정원으로 나섰다.
잠시 후 눈앞에 드러나는 동상의 위엄.
이시스프 2세.
내 젊었을 때 모습.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려 하는데 그때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젠장. 떠나려 하는데 때도 잘 맞추었군.”
마침 동상 바로 아래 피를 피할 수 있는 난간이 있어 나와 세바스, 그리고 레온은 그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폭우는 좀처럼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빗줄기가 더욱 강하게 몰아쳤으니.
우르릉 쾅!
하늘은 요란했고 빛이 번쩍번쩍했다.
그 순간.
번개 한 줄기가 동상의 위에 투구 쪽으로 내려치는 것이 아닌가.
번쩍.
쾅!
순간 아찔했다.
만일 동상이 없었다면 우린 번개 구이가 되어 위험할 뻔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나를 구한 것인가.
나는 잠시 난간 밖으로 나가 동상을 다시 살폈다. 그런데 방금 전 벼락을 맞아 동상의 상체 부분이 조금 훼손된 것 같았다.
“흠…….”
나는 마치 내가 번개에 맞은 것처럼 무척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세바스가 말했다.
“비가 서서히 그치는 것 같은데.”
레온 역시 손을 밖으로 내밀어 비 상태를 확인했다.
“숙부님. 이제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지. 그나저나 어딜 가나?”
“일단 또 폭우가 쏟아질지 모르니 여관으로 가시죠.”
“이왕이면 넓은 곳으로 가자꾸나. 지난번 거긴 다소 비좁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여전히 내겐 황제에 대한 그 정체성이 의문으로 남았다. 페르시우스로부터 들은 젊은 시절의 영웅담.
과거의 매우 호전적이고 전투 시마다 부하들을 아끼며 군주로서 의리와 책임을 다했다. 비록 매정하고 냉혹한 성격 때문에 오해를 받았다고 하지만 후세에 이르러 그의 일화는 대체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왜 이리 찜찜한 생각이 드는가. 그의 불행한 과거사를 들춰 보자면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지만 그걸 정당화시키기에는 무리수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 그는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다. 비록 상대가 적군이라지만 정말이지 피도 눈물도 없었다. 과연 그래야만 했을까.
분명 내가 모르는 또 다른 과거사가 존재하리라는 것을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해 알아 갈수록 나는 점점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고 현재의 황제라는 위치에서 내가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황제이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고스란히 지닌 껍데기 황제. 이제 와서 뭔가 밝히려 했지만 더 이상은 이 짓거리도 못하겠다. 알면 알수록 그 어떤 두려움이 나를 엄습해 오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저 황제의 위치를 이용해 그저 템이나 찾아다니며 포식의 권능으로 그것들을 취하면 그만이다.
더 이상 복잡하게 문제를 만들어 봤자 소용없는 일.
어차피 그가 폭군이든 아니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잖은가.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의 몸을 빌린 제삼자, 현실의 이형도인 것이다.
이곳 여관의 옥상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전경은 그야말로 웅장했다. 워낙 고지대에다 여관 자체가 7층 높이 건물이니 마치 남산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듯 그 모든 것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로마 시대의 신전 약식을 보는 듯, 아스카 도시의 대부분은 눈부신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어 신들의 영역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도시를 가진 제국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새삼 자부심이 느껴진다.
잠시 후 사방을 둘러보다 이상한 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화려한 건물들과는 달리 칙칙한 색의 목조 건물, 그것은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다른 주변 환경과 전혀 이질적으로 보였다.
나는 궁금하여 세바스에게 물었다.
“저기는 어디요?”
“빈민가로 보이는군요.”
“빈민가?”
하기야 그 어느 곳이든 빈부의 격차가 존재하는 법. 이런 도시에 그런 곳이 없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하지만 그 빈민가 주변에 방벽이 쳐져 있는 것이 의아했다.
“왜 벽이 설치됐소?”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설치해 놓은 것입니다.”
“나오지 못하도록?”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저건 빈민촌이 아니라 일종의 거대한 감옥과도 같은 곳이 아닌가.
“저곳으로 가 봅시다.”
그날 오후.
외부인조차 안으로 들어가는 통제가 심했지만 세바스가 만든 귀족 신분증 덕분에 그곳 안을 살펴볼 수 있었다.
세상에! 어찌 이리도 참혹할 수 있단 말인지.
이곳은 사람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지옥과도 같았다.
나는 충격이 너무 심해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비틀거렸다.
“말도 안 돼.”
그저 빈민가로만 알았는데, 발을 들이자마자 가축 사육장이 연상되는 처참한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주민들 대부분은 누더기 옷을 걸쳤고 피골이 상접해 목욕도 제대로 하지 못한 거지들 같았다. 가옥은 움막집처럼 대나무를 엮어서 겨우 이어 놓은 듯 보였고 곳곳에 흐르는 시냇가 물들은 구정물이었다.
역한 냄새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지 나는 경악스러웠다.
아낙네들이 많이 보였다.
중년의 사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으며 젊은 청년과 여자 그리고 아이들만이 벽 그늘에 앉아 힘없는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다.
그리고 보이는 도시 외부와 철저히 차단하는 듯한 높은 벽들, 그 성루에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결론지은 것은 여기는 분명 감옥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한데 이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감옥 아닌 감옥에서 생고생을 하며 살아가는가.
그거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결국 그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촌장을 찾아갔다.
촌장은 얼굴에 주름 골이 깊게 팬 대략 80대의 노인이었고 우리를 맞아 처음에는 경계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가 외국인이라 소개를 하자 금방 경계를 풀고 반갑게 맞이했다.
“이 도시에는 갈 곳도 많은 데 왜 하필 여기를 방문했소.”
촌장의 질문에 나는 말했다.
“나는 대륙을 여행하는 위인전기 작가입니다.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꼭 좋은 곳만 둘러본다는 것은 내 철학에 맞지 않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의 생활상을 엿보는 것이고 그 대상들은 반드시 귀족이거나 상인에 국한되지 않소이다. 그래서 일부러 이곳 빈민가를 찾아온 것이고.”
그 말에 노인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빈민가라면 잘못 찾아왔소.”
“잘못 찾아오다니요?”
“여기는 빈민가가 아닌 반역의 무리들을 가두는 일종의 감옥이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반역의 무리라니요?”
“우리는 씻지 못할 죄를 짓고 그 대가로 여기서 대대손손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씻지 못할 죄라니 그게 무엇이오.”
“알 것 없소. 그냥 돌아가시오. 당신이 아무리 외국인이라지만 그 이유를 말했다가는 우린 황제 폐하께 끔찍하게 살해당할 것이오.”
촌장은 거의 문전 박대하다시피 우리를 쫓아냈다.
결국 발길을 돌리고 마는데 외부로 나가는 문에 작은 소동이 일어난 것 같았다.
다리 한쪽이 없는 사내가 병사들에게 마구 달려들며 뭐라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나가게 해 줘!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거야 빌어먹을 놈들아! 제발 나가게 해 달라고!”
그러자 병사들이 그에게 발길질하며 욕지거리를 했다.
“이 미친 새끼가!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했네.”
그러자 그 사내는 더욱 길길이 날뛰며 달려들었다.
“차라리 죽여! 이게 사람 사는 곳이야? 그러니 죽이라고.”
마치 정말 죽자고 달려드는 기세였고 결국 병사 한 명의 검을 뽑아 그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때 나는 그쪽으로 달려가 그 병사를 말렸다.
“멈추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