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다들 그게 뭔지 살펴보았다.
“고리 같은데.”
“조그만 게 문양도 새겨져 있고 꽤나 정교한데.”
“용도가 뭐지?”
“허리춤에 달린 검 고리 같은데.”
“검 고리?”
“우리들도 각자 차고 있잖아. 검을 고정시키기 위한 보조 장비.”
물론 검 고리는 내 허리춤에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여기 떨어져 있냐는 것이다.
“문양이 아니라 글씨 같은데.”
“글씨라고?”
“상형 문자 같기도 하고. 너무 깨알같이 작고 빼곡하게 쓰여 있어 잘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글씨체를 상징하는 것 같아.”
그때 나승구가 그걸 집어 들고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놈들의 것이 맞는 것 같군.”
“놈들이라니?”
“크리처들을 사냥한 놈들. 이걸 보니 확실히 헌터의 것은 아냐.”
“도대체 그게 누구이지.”
“검 고리를 봐서는 그들도 우리 같은 원시 무기를 사용하는 게 분명하고 크리처들이 찢겨 죽은 것이 기존의 검 개념이 아닌 그 어떤 거친 무기가 확실해.”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우리보다 상급 헌터들이 아닐까. 예를 들자면 D등급일 수도 있고.”
나승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냐. 그들도 우리와 같은 계통의 장비를 착용하고 거기에는 일련번호가 찍혀 있지. 하지만 이 검 고리는 그런 게 아니라고.”
“제길! 던전에 헌터들이 있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거지.”
대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만 말했다.
“자네들 지금까지 크리처들만 상대해 봤지 그들을 조종하는 외계 종족의 실체를 본 적이 있는가?”
“…….”
“…….”
이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크리처들의 학살 현장만 벌써 일곱 번이나 발견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는 상태. 우리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고 점차 두려움으로 인해 대원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개새끼야! 그건 내 거라고.”
식량이 거의 바닥을 쳤다. 식수 역시 이제는 거의 한 번 먹을 만큼의 양만 남아 있었고.
“목이 너무 말라.”
“그 전에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라고.”
“대체 이곳은 왜 강도 없고 열매도 없는 거야. 대장! 입 속에 처넣을 거조차 없는데 제발 어떻게 좀 해 봐.”
대원의 아우성에 나승구 역시 대책 없이 허공만 응시하며 답답한 한숨을 내쉴 뿐이다.
정말이지 다들 극한의 굶주린 상태였고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 결국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졌다.
시간은 더 흘러 이제 미동조차 하지 않는 대원들도 보였고 사경을 헤매며 헛소리를 하는 자도 있었다.
그렇게도 꿋꿋했던 대장 역시 나무 등 뒤에 기대어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느닷없이 목에 신선한 액체가 들어왔다. 나는 정신이 번쩍 났고 입 속으로 주어지는 그 물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정신없이 목을 축이던 그 순간,
“헉!”
내 목을 축여 주던 정체불명의 존재가 소대원이 아님을 알고 깜짝 놀랐다.
“누, 누구야!”
“더 들어요.”
“누구냐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살폈다.
흰 천으로 둘둘 감은 고대 그리스인을 보는 듯한 차림의 상대는 긴 금발의 여자였다.
그녀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해치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이번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대원들 역시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서서히 회복하고 있었다.
나는 놀란 마음에 극도의 경계를 나타냈고 검마저 뽑았다.
그때 들려오는 귀에 익은 음성.
“형도야. 검 도로 집어넣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장 나승구였다. 바로 옆자리에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 그는 아까 깨어난 듯싶었는데 나를 안심시키려고 손을 들어서 앉으라는 동작을 취했다.
“대장!”
“알아! 네놈이 놀란 거. 얘기해 줄 테니 일단 진정해라.”
나는 그제야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대장.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씁쓸하게 웃는 대장.
“어떻게 되긴 일단 살았지. 저들 덕분에.”
“저들은 누구지?”
“나도 아직은 몰라. 다만 우리에게 호의적이라는 말은 할 수 있겠군.”
“호의적……?”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들만 있는 게 아니더군.”
“그건 무슨 뜻이지?”
“다른 소대원들도 있거든.”
대장이 손으로 가리켰고 나는 그곳을 봤다. 그의 말대로 E등급 헌터들이 눈에 띄었고 그 숫자가 제법 많아 보였다. 처음 이 던전으로 투입되었을 때 그 대대 병력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그때 눈에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박성준.
내게 실험실 쥐라는 이상한 소리를 해댔던 바로 그 인물. 그는 저만치 바위 아래 그늘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나를 아는 척했다. 이리 오라는 손짓.
“후후. 여기서 또 만나게 되는군.”
지난번 그가 내뱉는 말이 헛소리라 여기고 다소 경계를 했지만 오늘은 물어볼 게 많았다. 그런데 그가 선수를 쳤다.
“궁금한 게 많겠지?”
“도대체 뭐지?”
“질문이 애매하군. 이곳에 대해서야 아니면 나에 대해서 물어보는 거야.”
“둘 다.”
성준은 일단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만 다시 피식거렸다.
“후후. 아직도 여기가 던전이라고 믿고 있냐?”
“…….”
내가 대답을 못 하자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하기야 뭐. 네가 뭘 알겠냐. 실험실 쥐들이 알아 봤자 어차피 그 목숨은 자기들 것이 아닌데. 진실을 말해 줘봤자 혼란만 더욱 가중시킬 뿐 내가 쓸데없이 정보를 유출하는 것도 상부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고.”
“상부에서 지켜보다니?”
내가 의아해하자 그가 오히려 나를 한심하다는 눈길로 바라봤다.
“아직도 몰랐어?”
“뭘?”
“네 그 슈트, 가슴에 몰래카메라가 부착된 거.”
그제야 나는 손으로 가슴을 더듬었고 그의 말대로 아주 작은 초소형의 렌즈 비슷한 것이 있음을 발견했다.
“상부에서 하는 짓거리가 늘 그렇듯 아주 비열하고 인정사정없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들은 생생한 중계로 지구 전역에 방송을 하는 중이겠고. 아마도 우리 대화도 그대로 전파를 탈걸.”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실제로 렌즈가 달려 있는 것을 봐서는 그냥 헛소리로 치부하기에는 좀 그랬다.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해 주면 안 되겠니?”
그가 나를 보더니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참 느리네. 이제야 궁금증이 생기다니. 애초 우리가 발을 디딘 이곳은 기존에 생각하던 던전의 개념이 아니지.”
“던전의 개념이 아니라면 뭐지?”
“초공간(超空間).”
“초공간?”
“물론 이름만 들어서는 알 수 없겠지. 알기 쉽게 말해 주자면 이곳은 우주의 수많은 차원이 열린 그 공동의 영역이지. 그 의미는 우리가 모르는 저 미지의 차원 종족들이 얼마든지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랄까. 그게 바로 초공간이야.”
“…….”
여전히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성준은 답답한 듯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지구 정부는 새롭게 열린 이곳 미지의 개척지를 탐험할 헌터들을 보내기로 했지. 물론 정상대로라면 그들은 우리 같은 하급 계열의 E등급 헌터 대신에 상급 헌터들을 보내야 마땅하지. 그런데 왜 우릴 보냈냐고? 그건 바로 우리가 각성자들로서 한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지.”
공통점이라. 맞다. 지난번에도 성준은 바로 그 공통점을 얘기하려다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게 뭐지?”
“이곳에 투입되어 카메라를 달고 상황을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알리는 임무를 띤 우리 각성자들의 원천이 바로 ‘홀론’이기 때문이지.”
“홀론이라니?”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용어였다.
“홀론이 바로 공통점이야. 각성이란 각자 우주 어느 차원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능력을 물려받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만 홀론은 지구인이 아닌 그곳의 전사가 직접 지구로 환생의 루트를 통해 태어나 그 능력을 선천적으로 지닌다는 개념이거든. 그러니 너나 나나 원래 지구인이 아닌 다른 영역으로부터 환생한 별개의 종족이라는 말씀. 후후.”
“…….”
그 말에 나는 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충격적이지 않던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내가 꿈속에서 황제로 행세하며 템을 먹고 강해지는 것 자체가 그저 꿈이 아닌 내 환생 이전의… 아니 전생의 삶이란 말이던가.
너무 비약하지 않았나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이론이 가장 맞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정부는 홀론의 각성자들을 처음부터 작정하고 끌어모은 것이었지. 그리고 여기로 파견했고. 좋은 의미에서 우리들의 잠재력을 믿은 것이고 나쁜 얘기로는 우리가 어떻게 되든지 그 이용 가치만 따 먹고 버리는 카드로 쓰는 것일 수도 있어.”
그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죽을 목숨, 이제 와서 그 진실을 알아 봤자 마음만 더 아프겠지.”
그는 이내 체념 어린 낯빛으로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그들의 침공이 언제 시작될지 모른다. 나는 아직도 그들을 단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그들이 남겨 놓은 끔찍한 살육의 현장들만이 뇌리에 박혔다.
과연 어떤 존재들인가. 성준의 말대로 악마와도 같이 뿔이 달린 흉측한 모습일까.
우리들을 먹여 주고 치료해 준 이곳 베른 종족 주민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그들은 매우 화려한 군장을 착용하고 무기를 지녔다고 한다. 보통의 인간들처럼…….
그들의 주목적은 사냥이라 했다. 상당히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종족, 악마라 불리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잔학하기에 이를 데 없기 때문이라 한다.
마을은 온통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내 가슴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지구촌 곳곳에서 긴장감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우린 홀론의 각성자들로 이곳에 왔고 각자 알아서 잠재력을 깨워야 한다는 말.
나는 최근 며칠 동안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조금 더 강력한 템을 먹고 강해지길 바랐는데.
어쨌든 결전이 임박해 올수록 내 신경은 오로지 요새 바깥쪽으로 쏠려 있었다.
내 옆에 있는 대장 나승구와 2소대 대원들 역시, 그리고 발목이 절단된 박병수 아저씨는 표창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아르겐트 전사들이 나타난 것 같은데!”
대원들은 일제히 그쪽을 쳐다보았다.
백마에 타고 있는 한 존재, 은빛 투구의 녹색 깃털이 휘날렸다. 두툼한 군장에 새겨진 멋진 문양, 손에는 검 비슷한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톱날처럼 울퉁불퉁했다.
나는 저들이 변종 크리처를 찢어 죽인 그 장본임을 직감했다.
언뜻 보기에 화려한 장비와 각종 보호대들, 게다가 격식을 갖춘 듯 투구의 모양새까지 마치 어느 판타지 소설에 나올법한 기사단을 연상케 했다.
그 뒤로 기병대로 보이는 전사들이 등장했다.
그들 역시 녹색 깃털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었다.
선두에 있는 자가 무기를 들어 공격 명령을 하려는 것 같았다.
곧이어 뿔 고동 소리가 들렸다.
부웅~
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