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80화 (완결) (180/180)

제180화. 모두를 위한 결말 (3)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공간.

그리젤다는 혼자 주저앉은 채 자책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어.”

원죄의 마녀, 릴리스가 교묘하게 계획한 음모에 의해 그녀는 꼭두각시처럼 이용당했다.

우연히 구출된 것처럼 위장되었고 이후엔 함께 지내며 유대감을 쌓아나갔다.

운명적인 날에 용사의 파티를 운석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릴리스를 오랜 봉인에서 해방하여 세계를 멸절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릴리스야. 그녀의 순수한 정체성. 금지된 지식에 손대기 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남겨놓은 분신.”

비록 본체에 대한 주도권은 없지만, 빈틈이 생겼을 때 일시적으로 빼앗아올 수는 있다.

그리젤다는 그 찰나의 순간이 주어지기만을 바랐다.

“지키고 싶어. 나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줬던 사람들을.”

한여름 밤의 선잠처럼 달콤한 꿈이었어도 좋았다.

그것만이 마녀의 아이로 낙인찍혀 외톨이로 살아왔던 자신에게 유일한 구원이었으니까.

“지킬 수만 있다면,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아.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과 단절되어도 좋아.”

모두를 위한 결말은 없다.

하나의 이야기에 주인공이 여러 명인 동화책은 읽지 못했다.

누군가가 주목받으면 다른 이는 기회를 잃고 무대 뒤로 물러나야 한다.

하지만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애초에 이 세상엔 자신을 위한 무대 따윈 없었을 터였다.

다만 마지막 미련이 하나 있다면, 절망적인 현실에도 작은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평범한 소녀로 기억되는 것이다.

“나를 잊지 말아줘. 저주받은 마녀가 아니라, 어리숙했던 여자아이로 떠올려줘.”

지금까지의 소중한 추억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리지 않도록.

과거를 돌이켜보던 그리젤다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때였다.

화르르륵!

어디선가 익숙한 느낌의 불꽃이 피어올라 새하얀 공간을 와해하기 시작했다.

“이건?”

그리젤다는 눈물을 감추며 황급히 뒤돌아봤다.

흐릿해진 시야에 이를 악물며 분전하는 전요한의 모습이 들어온다.

양쪽 날개를 펼친 채 활활 타오르는 그는 마치 한 마리의 불사조와도 같았다.

“와줬구나. 바보같이.”

하지만 그 한결같음이 그리젤다는 무엇보다도 좋았다.

자신을 구원해주러 온 영웅은 어떤 현실에도 타협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옳다 여기는 신념만을 위해 나아간다.

“조금만 더 힘을 내줘. 내가 너를 지킬 수 있게.”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전요한을 향해 그리젤다는 작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이 닿기 전에 주위공간이 괴리되며 검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무슨 생각이니, 왜 그를 도와주려고 하는 거니.”

성숙한 은발 여인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자의식을 투영하는 허상이자 자신의 다른 정체성.

릴리스는 그리젤다가 하려는 일에 대해 경고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죽으면 너도 뒤따라서 소멸하게 된단다. 자신의 목숨보다 저들의 안위가 더 소중한 거니?”

양자택일의 상황이었다.

릴리스가 패배하면 그리젤다는 함께 사라지겠지만 전요한 일행은 살아남는다.

반면, 릴리스를 내버려 두면 전요한 일행은 이곳을 무덤으로 삼게 될 것이다.

“그런 것 따위, 벌써 결정해뒀어. 내게는 고민할 가치조차 없었으니까.”

자신은 여기에서 죽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리젤다가 마음을 바꾸지 않자 릴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감이구나. 너에게 이런 짓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심연에서 뻗어 나온 검은 촉수가 그리젤다를 일시에 휘감았다.

그리젤다는 몸을 비틀며 반항해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널 남겨놓은 진짜 이유는 금지된 마법의 궁극적인 형태를 완성하기 위함이란다. 이제 그 희생양이 되어주어야 할 것 같구나.”

본래의 계획은 봉인에서 깨어난 후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찾아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요한에게 압박당하고 있는 지금, 그런 선택지까지 고려할 여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나 더 불행해지려고 하는 거야? 이런다고 세상이 너를 바라봐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온몸을 구속당한 채, 그리젤다가 최후의 설득을 시도했다.

릴리스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음 지었다.

“나를 위한 세계가 아니라면 무로 되돌리면 된단다. 그 후엔 창세기의 여주인공으로서 새로운 인류의 어머니가 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니?”

릴리스는 장차 마신으로 강림하게 될 카인을 자신의 반쪽으로 삼을 셈이었다.

그와 함께 세상을 지배하고 모두의 숭배를 받는 여신이 되겠다는 야망이 붉은 눈에서 불타오른다.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의 이 세계가 좋으니까!”

“참으로 말을 안 듣는 아이구나. 그 나불대는 입을 좀 닥치지 못하겠니?”

검은 촉수로부터 잿빛 섬광의 전류가 발산되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치사량이고도 남았을 데미지에 그리젤다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의식이 점차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리젤다의 눈이 감겨가자 릴리스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착해 빠져서 세상에 이용당하기만 하는 거란다. 안심하렴. 이제 더는 고통받지 않고 편히 쉬게 해줄게.”

그것은 과거의 자신을 향한 독백이었다.

모든 것에 배신당하고 홀로 남겨졌던 그녀는 철저히 악녀로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인류에 자유를 가져다주기 위해 손댔던 금지된 지식은 어느덧 세상을 파멸시킬 수단으로 전락해 있다.

“그럼 어디 결판을 내볼까? 아직도 용을 쓰고 있는 모양이네.”

고개를 돌린 릴리스의 시선이 전요한에게로 향했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이쪽까지 날아오는 중이었다.

* * *

“젠장, 어디로 갔지?”

갑자기 그리젤다의 모습이 사라지자 전요한은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재회의 순간, 그녀는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졌고 릴리스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좌절감을 느끼고 있을 때, 어디선가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아직도 그 아이를 찾고 있는 거니?”

성숙한 은발의 여인이 나체인 상태로 심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릴리스.

그녀의 손아귀엔 그리젤다가 평소 지니고 다니던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그리젤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걸 알아서 무엇 하려고 그러니? 어차피 네 녀석은 이곳에서 죽게 될 운명인데.”

수많은 촉수들이 사방에서 전요한의 허점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녹티스를 휘둘러 한 차례 제압한 후, 전요한은 잠시 뒤로 물러났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전보다도 더 강해진 느낌이다!’

아마도 그리젤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내가 너를 운석으로 불러들인 이유를 알고 있니? 그건 바로 불사조의 심장이 마지막 의식에 반드시 필요한 제물이기 때문이란다.”

우세를 점한 릴리스가 자신의 본 목적에 대해 떠들어댔다.

금지된 지식의 최종적인 완성 형태는 혼돈의 권능과 소생의 권능을 모두 필요로 한다.

이 중에서 소생의 권능은 전요한에게 있는 상황.

여신 시스티나에게서 부여받은 그 가호를 잠시 빌릴 수만 있다면, 릴리스의 오래된 숙원은 마침내 완성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운석을 지구에 떨어뜨린 겁니까?”

“물론이란다. 아니면, 내가 최하위 차원에서 살아가는 한심한 인간들에게 관심이라도 있을 줄 알았니?”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할 것은 바로 나태함 속에서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지구의 인류였다.

릴리스가 지구는 인류에게 사치스러운 행성이라고 말하자, 전요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죠. 당신이 우리를 그렇게 평가할 자격 따윈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와 관점에서 가치 있는 존재다.

그것을 증명해내기 위해 다시 녹티스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 잊지 마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귓속에 속삭이는 듯한 시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부터인지 그녀는 배후에 환영처럼 나타나 전요한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 지금까지의 기억에 몸을 내맡기세요. 당신이 헤쳐 온 길이 마지막 순간, 가장 위력 있는 무기가 되어줄 거랍니다.

시스티나는 언제나 전요한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며 전요한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전생으로부터 전승받은 승부의 순간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그래, 상황은 각기 달랐지만 전부 다 같은 느낌이었어.’

그것은 심상으로 떠올랐던 불사조와 혼연일체가 된 경지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는 잊어버린 채 오로지 저 너머의 드높은 이상만을 향해 날갯짓하는 신수.

진정한 초월은 그러한 지고의 순간에만 가능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전요한은 날개를 움츠린 채 다시 한번 비상할 준비를 했다.

이윽고 그가 도약하자 마치 환영처럼 불사조의 겁화가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니?”

갑작스러운 전세 역전에 릴리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검은 촉수들을 불러들여서 총공세를 감행했지만, 아무런 타격조차 주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검은 촉수는 불사조의 겁화에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만다.

“말도 안 돼. 혼돈의 권능으로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영문을 몰라 하던 릴리스는 뒤늦게 깨달았다.

전요한이 실체화한 건 다름 아닌, 인과의 굴레마저도 뛰어넘는 작염이었음을.

수많은 전생을 거듭하며 시련과 싸워온 끝에 그는 불사조의 진정한 형체를 완성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때마침 완성된 시르케의 영력 마법에 의해 릴리스는 중요한 순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아쉽게 되었구나. 조금만 더 있었으면 내 계획이 완성되었을 텐데.”

자신을 휩싸는 불사조의 업화를 보며 릴리스는 씁쓸해했다.

이윽고 그녀가 연소되어 소멸하자 심연의 공간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해서 전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재앙의 징조는 모두 사라졌다.

여전히 각지에서 게이트가 생성되고, 헌터들이 몬스터를 토벌해야 했지만 말이다.

“자네의 공로에 깊이 감사를 표하네. 관리국의 총책임자로서 갚기 힘든 빚을 지었군.”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유명학이 경의를 표했다.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눈 후, 전요한은 관리국에 찾아온 목적을 댔다.

“그 아이의 상태는 어떤가요? 이전보다 많이 호전되었다고 들었는데요.”

“다행히 그렇다네. 아직 시험관 밖으로 나올 만한 수준까진 못 되지만,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 생각하네.”

전요한이 관심을 보이는 상대는 그리젤다였다.

그녀는 본래 릴리스와 함께 사라질 운명이었으나, 심연의 차원을 필사적으로 뒤진 끝에 현실로 다시 데려올 수 있었다.

다만, 상당한 정신적 데미지를 입은 탓에 관리국의 첨단 의료시설로 보내진 상태다.

“다행이군요. 그리젤다를 잃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종말의 위기는 넘겼지만, 여전히 세상은 혼란하네. 자네가 힘을 보태준다면 평화를 유지하는 데 상당한 기여가 될 거라 생각하네만?”

유명학은 앞으로 관리국의 일원이 되어줄 것을 제안했다.

전요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르케, 너는 뭘 하고 싶어?”

“당분간은 복잡한 일에 얽히지 않고 이쪽 세계를 여행할 생각입니다. 물론, 아카데미부터 졸업하고 말이죠.”

최근에 벌어졌던 사건들 때문에 아카데미는 한동안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시르케가 한탄을 늘어놓자, 전요한은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들으셨죠, 국장님? 저희는 일단 졸업부터 할 겁니다.”

“흥미롭군. 모든 걸 다 가졌어도 학창시절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건가?”

“그야, 소중한 추억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함께 해왔던 이들과.”

지구에서의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손을 흔들며 국장실을 나서자, 생도복을 입은 이들이 일제히 전요한을 쳐다봤다.

“협상은 끝났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네.”

“뭐, 이변이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채린, 정하은, 송주한 레이나, 박수호, 서창민.

익숙한 얼굴들을 다시 만나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들과 함께 꾸려나갈 미래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럼 가자, 모두들.”

전요한은 책가방을 어깨에 올린 채 먼저 앞장섰다.

옆에 있던 시르케가 곧바로 뒤따랐고, 일행은 왁자지껄 잡담하며 행렬을 이뤘다.

“좋을 때네요.”

한쪽 구석에서 생도들을 바라보던 정서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가 들고 있는 서류 더미 위에 이수연은 파일철 하나를 더 얹었다.

“또 아카데미에 가서 먹방할 생각 말고 업무나 계속해.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으니까.”

“힝, 나 밥만 축내고 온 거 아닌데에에.”

억울하다는 듯 정서희는 눈물이 핑 돌았다.

두 요원이 걸어가는 복도의 창밖엔 평온한 일상처럼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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