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모두를 위한 결말 (2)
“괜찮으신 겁니까?”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시르케가 안위를 물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무리하긴 했지만, 확실히 처리했어. 과거의 나와는 다르니까.”
수어 번의 전생을 거듭한 끝에 카인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릴리스를 찾아내서 그녀의 음모를 막는 것뿐.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뒤편에서 채린이 손목을 붙잡았다.
“자, 잠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채린은 아까 마녀의 의지에 잠식당할 뻔한 것을 심각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일행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지 잠시 떨어져 있을 것을 요청했다.
“방해될지 모르니까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혼자서도 주위의 마물 정도는 충분히 해치울 수 있으니까.”
“괜찮겠어? 차라리 우리와 함께 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라.”
전요한은 채린을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동료는 어떤 순간에도 함께 해야 한다며 설득했지만 한사코 고개를 저어 보인다.
“마음만은 고맙게 받을게. 하지만 나도 이번만큼은 내 의지를 관철하고 싶어.”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마녀의 의지와 싸워 이기고 싶다.
그렇게 해내지 못한다면 자신은 언제까지고 동료의 도움만 받아야 하는 신세로 남을 것이다.
채린의 마음이 확고하자 시르케는 별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것이 당신의 각오라면 반드시 이겨 내십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법사로서 채린의 자질을 평소 높이 사던 시르케였다.
그녀가 살아남는다면 학원도시의 상아탑으로 함께 돌아가 비기를 전수할 생각이다.
“어서 가죠. 당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린은 잘 해낼 것입니다.”
시르케는 여전히 떨떠름해하는 전요한을 떠밀었다.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잿빛 숲을 헤치고 나아가자 한적한 공터에 핏빛으로 물든 제단이 보였다.
그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의식을 진행하는 은발의 여인.
그녀는 다름 아닌 릴리스였다.
“멈추세요, 릴리스. 당신이 하려는 짓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전요한은 녹티스를 뽑아 든 채 성큼 제단으로 다가갔다.
주위 공기가 반응할 정도로 노골적인 적의에 릴리스가 서서히 눈을 떴다.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여전히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어린애구나.”
기억을 잃었을 때와는 딴판인 모습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부터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과거의 그녀가 아니다.
“당신이 마신으로 강림시키려던 카인도 저에게 패배했습니다. 이만하면 본래의 계획에 상당한 차질이 생겼을 텐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네가 쓰러뜨린 건 과거의 카인일 뿐이란다. 진짜는 조만간 오래된 봉인에서 풀려나게 될 테지.”
한반도에 남아 있는 마지막 운석이 바로 잠들어 있는 카인을 깨우는 수단이었다.
다시 한번 마신으로 강림한 후에 그는 세계의 모든 존재를 무로 되돌릴 터.
진정한 혼돈의 권능 앞에 무엇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벌이고 있는 의식이 바로 카인을 현세로 소환하기 위한 것이란 말이죠?”
“그렇단다. 이 모든 건 예전부터 내가 교묘하게 안배해놓은 인과의 실타래. 뒤늦게 눈치챘다고 한들 바꿀 수 있는 건 없단다.”
릴리스는 이쯤에서 포기하고 함께 세상의 멸망을 지켜볼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시르케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듯 결사저항할 의사를 밝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뜻대로 되게 내버려 둘 순 없습니다. 반드시 모든 이들의 운명을 구해내겠어요!”
한껏 들어 올려진 지팡이에서 푸른 기운이 샘솟았다.
이윽고 주위를 휘감으며 영향력을 키워가는 영력을 보며 릴리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가 사용하는 마법은 전부 내가 금지된 지식에 손을 댄 결과물이란다. 다시 말해서, 너는 엄마의 물건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노는 작은 아이일 뿐이지.”
콰지지지직.
검은 공간에 균열이 일어나며 한 차례의 소동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잿빛 숲의 지형이 뒤틀리고 여기저기서 지면상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암석 파편이 튀어나오며 주위공간이 빠르게 역변했다.
초승달이 떠있던 밤하늘에선 나선형의 칠흑빛 차원문이 생성되어 있고, 그 주위로 강력한 자기장과 함께 마력 폭풍이 몰아치는 중이다.
모르긴 몰라도 무언가 커다란 재앙이 벌어질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릴리스를 막아야 합니다! 후위에서 지원할 테니 그녀에게 다가가세요!”
폭풍우에 나부끼는 머리칼을 부여잡으며 시르케가 전요한에게 외쳤다.
전요한은 표정을 굳힌 후 마력 폭풍의 중심부에 있는 릴리스에게로 향했다.
릴리스는 거대한 칠흑빛 날개가 등 뒤에 돋아나서 원죄의 마녀로 불릴 만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네가 시스티나의 가호를 받고 있어도 나와 정면대결을 하는 건 무리란다.”
릴리스가 적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위협해왔다.
그녀는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는지 손바닥에 극도로 응집된 흑점을 생성했다.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온 만큼 조그마한 변수도 가벼이 여기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무한한 전생을 이어가는 불사조라고 해도, 한번 생명의 불길이 사그라들면 잿더미인 상태로 휴식기를 지내야 하지.”
혼돈의 권능을 이용해 완전히 녹다운시키고 나면 저 애송이는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릴리스는 실력행사도 할 겸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기로 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
릴리스가 날개를 펼치자 천지가 검게 물들며 검은 소용돌이가 지상을 휩쓸었다.
동시에 사방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지표면.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기현상에 일행은 몸을 낮췄다.
‘곧 절대공간으로 주위를 장악하겠군.’
앞서 카인과 전투를 벌인 이력이 있었기에 대충은 릴리스의 패턴을 예측 가능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여긴 전요한은 불사조의 업화를 일으켰다.
휘아아아아아아아아!
영롱한 불길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양쪽의 날개 형상을 이루었다.
그 모습을 본 릴리스가 우습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작은 날갯짓만으로 심연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금지된 지식을 완전히 손에 넣은 나는 너 따위와 그릇부터가 다르단다. 네가 아무리 한계를 거듭하여 뛰어넘는다고 해도 도달 불가능한 지점이란 말이지.”
검게 물든 하늘에서 새하얀 불꽃이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이후 새하얀 불꽃은 대지를 절반가량 뒤덮었고….
사아아아아아아!
불사조의 업화와 대치하며 영역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크으윽!”
사방에서 전해져오는 압박감에 전요한은 이를 악물었다.
릴리스의 말대로 역량은 말할 것도 없고 기세에서부터 확연한 차이가 나는 상황이다.
‘더 무리를 해야 하나….’
카인과의 결투로 이미 한바탕 힘이 빠진 상태였다.
전요한은 지쳐가는 심신을 안정시키며 릴리스와 마주 봤다.
그녀는 현재 같잖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자신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끼며 사라지려무나. 곁에 있는 애인도 함께 저승길로 보내줄 터이니.”
가녀린 손바닥 위의 흑점이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전요한에게로 날아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막강한 폭발음과 함께 주위가 회색 먼지에 휩싸였다.
‘후우, 죽는 줄 알았네.’
눈을 질끈 감았던 전요한이 무사한 육체를 확인했다.
배후에 있는 시르케가 수호결계를 펼쳐서 겨우 그를 지켜낸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가로 시르케는 엄청난 반동을 감수해야만 했다.
“으윽!”
무리하게 버틴 시르케의 입가에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하프 엘프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마력의 영향으로 오장육부는 심각하게 파열된 상태다.
원죄의 마녀, 릴리스는 정말이지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강한 존재였다.
녀석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적대자들은 한심하게 짖어대는 하룻강아지 수준.
금지된 지식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는 말이 과연 허풍은 아니었다.
‘상황이 좋지 않네.’
전요한은 난감한 표정으로 시르케의 상태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된 모양이다.
녹티스를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전요한은 시르케에게 물었다.
“얼마나 더 마법을 시전할 수 있어? 생명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결계를 한 번 정도는 더 펼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번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정상이었던 상태로도 겨우 받아냈던 일격이었다.
빈사가 된 지금은 몇 초 만에 결계가 뚫릴 수도 있는 일이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전방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해야겠네. 어차피 장기전을 할 여유 따윈 없었지만 말이야.”
방법은 하나뿐이다.
다음 일격이 날아오기 전에 최대한 거리를 좁히는 것.
그리고 릴리스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혀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당장의 영역 싸움에서도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전요한은 기세를 굽히지 않았다.
다시금 버스트 모드로 돌입하여 어떻게든 새하얀 불꽃을 밀어내 보인다.
치지지지지지지지직!
격렬한 영역싸움으로 인해 사방에서 불안정한 전류가 튀었다.
이를 본 릴리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어지간히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야.”
가녀린 손바닥 위에 극도로 응집된 흑점이 생성되었다.
무심코 그것을 던지려던 릴리스는 기다란 눈썹을 치켜올렸다.
불사조의 업화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던 탓이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영롱한 불꽃은 그것에 휩싸이는 심연을 완전히 정화하고 있었다.
처음엔 조그마한 촛불이나 다름없었던 것이, 이제는 규모를 서서히 키워나가며 자신을 압박해온다.
‘한 방에 나자빠질 뻔했던 주제에 건방지게!’
눈썹을 미세하게 떨던 릴리스는 무자비하게 흑점을 집어 던졌다.
이후 다시 한번 막강한 폭발과 함께 주위가 회색 먼지에 뒤덮인다.
“아앗!”
필사적으로 결계를 유지하던 시르케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이와 동시에 균열을 일으키며 와장창 깨져가는 무형의 결계.
맹렬히 엄습해오는 흑점 폭발에 전요한은 이를 악물었다.
‘이겨내지 않으면 안 돼!’
문득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동료들이 생각났다.
그들을 다시 일상 속에서 만나고 싶다는 감정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되돌아갈 거야! 아직 끝맺지 못한 이야기를 함께 이어나가기 위해!’
그렇게 되기 위해선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혼돈의 권능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요한은 녹티스를 양손으로 쥔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일어난 한 차례의 충돌.
콰지지지지지직!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이 전요한을 엄습해왔다.
“쿨럭!”
검붉은 피가 입 안에서 쏟아졌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후폭풍이 신체 내부를 휩쓸었다.
오장육부가 파열되고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
전요한은 눈을 부릅뜨며 주위를 뒤덮어오는 새하얀 불꽃을 노려봤다.
원죄의 마녀가 표출하는 세상을 향한 증오와 분노.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새하얀 불꽃 속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그리젤다의 모습이었다.
그리젤다는 혼자서 웅크린 채,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 자신을 자책하고 있다.
“지금 당장 구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뒤돌아서 웅크린 그리젤다를 향해 전요한이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불사조의 업화가 놀랄 만한 기세로 새하얀 불꽃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