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모두를 위한 결말 (1)
관리국 최하부의 통제구역.
유명학은 상황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숨기고 계신 겁니까, 국장님.”
함께 있던 멜리사가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전요한 일행이 운석에 접촉한 지도 한나절은 지난 시점이라 그녀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다.
“걱정되는가? 그들이 실패했을 경우에 발생할 일들이 말이네.”
“물론입니다. 전요한이라면 분명 최선을 다할 거라 믿지만, 이건 전인류의 존망이 달린 사건 아닙니까?”
그런 임무에 참가하지 못한 멜리사는 불만이 많았다.
나름 월드 클래스의 이능력자인데,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현실이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나로서도 그가 예언 상의 구원자이기를 바란다네. 작전 실패로 인해 운석의 재해가 싹튼다면 성소를 잃게 될 테니 말일세.”
“성소라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아까 보지 않았는가? 운석이 안치되어 있었던 공간이 바로 여신의 권능을 구현한 태초의 요람이라네.”
유명학은 모니터 저편으로 보이는 녹지공간의 거목을 가리켰다.
그 밑단엔 푸른 빛을 발하는 열쇠가 박혀 있었다.
“저 열쇠는 최상급의 성유물이라도 되는 겁니까?”
“어떻게 보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네. 자격 있는 자가 사용하면 낙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으니까.”
다만, 그 시기는 예언상으로 기록된 절묘한 순간만 허락되었다.
유명학이 오랫동안 요람의 문지기였음을 밝히자, 멜리사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혼자서만 알고 계셨던 거죠?”
“진정한 용사가 아니면 낙원으로 향하는 문은 열리지 않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니 비밀을 지킬 수밖에 없었지.”
유명학은 사명을 다했단 듯이 말하더니 예언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품에 안고서 회상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금이라면 이야기해줄 수 있네. 혹시 궁금한 것이 있거든 질문하게나.”
“…여신의 존재가 운석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는 대재앙의 위기를 방관하고만 있죠?”
멜리사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이었다.
어째서 신은 인간을 시련에 들게 내버려 두는가.
죄악이 무고한 이를 농락하고 짓밟아도 심판하지 않는가.
그것이 무책임한 방임인지, 아니면 무능에 가까운 입장인지 알고 싶었다.
“여신께서는 미래를 우리에게 맡긴 것이라네. 따라서 우리는 그 신뢰에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지.”
“설령 모두가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있더라도요?”
“우리가 변화의 흐름 속에서 길을 잃거나 좌절할 때마다 여신께서는 구원자를 내려주셨네. 몇 번이고 환생하여 혼돈과 맞서 싸우는, 그분만의 영웅을 말일세.”
수어 번의 전생을 거치며 영웅은 진정한 구원자로 거듭난다.
모두의 희망과 숙원을 짊어진 채, 고독한 길을 걸어온 그는 여러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여신의 은총을 받아온 불사의 영웅을 이렇게 부른다네. 자신의 불씨로 어두워진 세상을 정화하는 신수, 「피닉스」라고.”
과연 전요한은 예언서상의 진정한 용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모니터 속에서 서서히 균열이 발생하는 운석을 보며 유명학은 눈을 가늘게 떴다.
* * *
‘아무래도 최후의 결단을 내린 모양이군.’
전요한은 숨을 헐떡이며 카인이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치열한 격전이 오간 후에야 녀석은 자신의 진정한 전력을 드러내고 있다.
“이 정도로 힘들게 누군가와 맞붙어본 건 오랜만이군. 아니, 너같은 숙적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무리를 하는 일도 없었을 거야.”
카인이 재미있단 표정으로 전요한을 응시했다.
여신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라 그런지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그에게 있다.
“저는 그저 남들보다 좀 힘들게 살아온 인간일 뿐입니다. 이 당시에 미쳐 날뛰었던 신화적 존재들에 비하면 매우 약한 편이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넌 뭔가 달라. 말로 표현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마인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비정형적인 특질이 전요한의 강함을 뒷받침하고 있다.
카인은 그것의 정체를 제대로 파헤쳐야겠다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슬슬 승부를 내야 할 것 같군. 이렇게 계속 시간만 끄는 건 별로 원하지 않으니까.”
장기전을 벌이면 더 유리하긴 하나 아무래도 여신의 가호가 신경 쓰였다.
그녀는 배후에서 지켜보기만 하며 개입하지 않지만, 전요한이 새로운 잠재력에 눈을 뜨거나 하면 곤란해진다.
카인이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자 주위의 기류가 다시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올 것이 왔군.’
전요한은 자신에게 불리한 타이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전히 마인화한 카인의 전력은 신수들도 소멸시킬 정도로 강력하다.
타악!
흑익을 펼친 카인이 먼저 도약하여 전요한에게 달려들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매우 정교하고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카인은 전요한과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전력 일부를 숨겨왔고 이번에 그것을 히든카드로 사용할 셈이었다.
‘…빠르다.’
감각을 곤두세운 상태에서도 좇기 어려울 정도의 민첩함이었다.
게다가 마검의 권능을 이용하여 변칙적인 연속공격까지 할 수 있음을 고려하면 매우 아찔한 상황이었다.
본능적으로 전해져오는 위기감에 전요한은 그동안 자제해왔던 각성모드로 돌입했다.
사사사사사사삭.
전요한의 분신이 사방에 펼쳐지며 거리를 좁혀오던 카인을 혼란시켰다.
하지만 카인은 일절 동요하는 기색 없이 그중 하나를 향해 무자비한 검격을 날렸다.
휘아아아아아아!
검극이 그리는 곡선을 따라 검푸른 불꽃이 요동치며 전요한을 휘감았다.
그간의 공방전으로 인해 이젠 분신술로 카인의 눈을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전요한은 이를 악물며 멀리 떨어져 있는 분신 쪽으로 본체를 이동시켰다.
‘이제 그걸 시도할 때인가.’
자신에게도 아직 남겨놓은 히든카드는 있었다.
생명력을 급속도로 소진하는 대신 모든 능력치와 스킬의 위력이 대폭 증가하는 버스트 모드.
패널티가 엄청난 대신 사기적이라면 말도 안 되게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이번 공방에서 확실한 승패가 결정된다.’
상대의 히든카드가 먼저 드러난 이 순간이야말로 승부수를 던질 절호의 기회였다.
불사조의 업화를 전신에 휘감은 채 전요한은 투지를 불태웠다.
화르르르르르!
단지 그것만으로도 주위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거리를 좁혀왔다.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죽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물러나는 건 패배를 의미하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돌격해오는 건 아니었다.
얼마나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시기적절하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 난다.
휘이이이이익!
카인이 마검을 크게 휘두르며 다시 공격을 감행해왔다.
그 움직임을 따라 피어오르는 검푸른 불꽃.
흡사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창극에서 포악한 늑대머리 형상이 나타났다.
펜리르.
신마전쟁 당시 거대뱀 요르문간드와 함께 신족을 위협했던 신화상의 괴수였다.
‘역시 저 불꽃의 정체는 펜리르였나.’
불사조의 업화와 마주하고도 꽤나 버티는 것이 심상치 않았었다.
허나 녀석도 모든 걸 불사지르는 전요한을 상대론 역부족이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
녹티스가 서슬퍼런 마력을 방출하며 주위공간을 휘감았다.
그 기세가 불사조의 날개처럼 형상화하자 펜리르도 이를 완전히 드러냈다.
“크르르르르르르르!”
펜리르가 먼저 달려들며 불사조의 날개를 물어뜯었다.
하지만 불사조는 두렵지 않은지 업화의 파도를 일으키며 펜리르에게 적지 않은 부상을 입혔다.
두 형세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전요한과 카인은 회심의 일격을 주고받았다.
카랑!
두 신기가 맞부딪치며 주위공간을 일그러뜨렸다.
그 여파에 의해 소용돌이가 옆으로 휘어질 정도였다.
당연히 엄청난 반동이 서로의 육체를 엄습해왔다.
“크윽…!”
전요한이 이를 악물며 카인과 힘겨루기를 했다.
무리해서 버스트 모드에 돌입하자 인간의 육체를 지닌 탓인지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다.
피가 역류하고 뼈가 사그라드는 듯한 통증이 전신을 지배했으나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그것은 곧 패배,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두 사내가 무기를 맞댄 채 정신력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펜리르가 예리한 발톱으로 불사조를 두 동강 내버렸다.
촤아아아아아아악!
업화가 흩뿌려지며 불사조가 형체를 잃었다.
이후 곧바로 몸을 웅크리며 재차 공격을 준비하는 펜리르.
녀석이 다시금 이를 드러내자 힘의 균형은 조금씩 깨지는 것처럼 보였다.
화르르르르르!
검푸른 불꽃이 위협적인 기세를 자랑하며 점점 다가왔다.
전요한은 덤덤한 표정으로 불굴의 투지를 내비쳤다.
버스트 모드에 돌입한 대략 10분간 불사의 상태가 되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
지금이라면 영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모아서 최후의 일격을 시도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콰드드드드드득!
마검이 버텨내지 못하고 검극으로부터 균열을 일으켰다.
제아무리 펜리르를 각인해놓은 신기라고 해도 전요한에게는 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허나 카인 역시 최정상급의 마인이었기에 그리 호락호락 당해주지 않았다.
번쩍!
검푸른 섬광과 함께 일시에 카인의 모습이 자취를 감췄다.
그 찰나의 순간.
전요한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며 역수로 쥔 녹티스를 자신의 배후로 찔러넣었다.
푸욱!
스걱!
서로 다른 종류의 둔탁한 소리가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균열을 일으킨 마검은 전요한의 왼쪽 팔을 잘라냈고 녹티스는 정확히 카인의 심장을 관통했다.
결국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로 승부가 결정 났다.
왈칵!
카인이 입에서 붉은 피를 내뿜으며 자신에게 꽂힌 녹티스를 내려다봤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아쉽군.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도 나름 이런 식의 결투에 익숙해서 말이죠.”
“그래도 분하진 않다. 릴리스가 대신 나의 숙원을 이뤄줄 거라 생각하니까.”
부조리한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대재앙의 시작이었다.
그것을 위한 제단의 희생양이라면 여태껏 버틴 의미가 없진 않았다.
사르르르르르.
카인이 평온히 눈을 감자 그의 육체가 검푸른 빛으로 화해 허공에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끝이 났나.’
반나절 가량을 서로 치고받은 것 같았다.
과거에 최후의 결전을 벌였을 때에 비하면 절반밖에 안 되는 시간이지만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은 그보다 배로 컸다.
“…크윽.”
카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전요한은은 깔끔하게 절단된 채 나뒹구는 자신의 왼팔을 응시했다.
긴장감이 풀리면서 더욱 강렬해지는 통증.
치열한 일대일 결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육참골단의 전략을 사용한 결과였다.
‘하지만 내겐 불사조의 권능이 있지.’
단 한번이라는 제한조건이 존재하지만 그 능력은 가히 사기적이었다.
\전요한은 불사조의 업화를 다시 일으켜 자신의 왼팔을 원상복구했다.
그리고는 대지에 내리꽂은 녹티스를 무덤덤한 얼굴로 다시 집어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