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원죄의 마녀 (9)
“당장의 위기는 모면했군요. 하지만 이 상태로는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주위에서 뒤엉켜 싸우는 전사들을 보며 시르케가 말했다.
한쪽 편에서는 마인과 마물이 합세하여 맹공을 펼치는 중이고 반대편에서는 다양한 종족들이 연대 전선을 형성해 있다.
“그러고 보니, 이거 어디선가 본 장면 같은데.”
전황을 살피던 전요한은 문득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전생으로부터 계승받은 기억의 일부가 차츰 뇌리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신화시대에 종지부를 찍게 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던 서막.
당시의 그도 여기에서 혼돈의 진영과 맞서 싸웠었다.
“좋은 타개책이라도 떠오른 겁니까? 시간이 없으니 어서 서두르십시오.”
“알았어. 일단 나를 따라와.”
어수선한 전장을 가로지르며 전요한은 기억을 더듬었다.
찾아야 할 대상은 얼마 전까지 자신과 대치하고 있었던 카인.
녀석은 분명 선봉에 서서 혼돈의 진영을 진두지휘했다.
“아마도 이 근처에 있을 거야. 당시에 서로 마주쳤던 적이 있으니까.”
우연치고는 상당히 잘 짜여진 각본처럼 보였다.
이번 시련의 내용은 아마도 지난 결투의 무대를 재현하는 것 같다.
“마신을 상대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아직 완전히 강림한 상태는 아니지만, 지금도 승산을 어림잡기 어려울 정도로 강적일 것입니다.”
시르케는 평소답지 않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만류하고 싶을 만큼 곤란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전요한은 망설이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때도 완전히 패배한 건 아니었어. 최소한 비겼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겠지.”
마인으로서 궁극의 경지에 달한 카인은 어떤 종족의 대전사도 감당하지 못했었다.
유일하게 혼돈의 힘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던 자신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수어 번의 전생을 통해 쌓은 업이 전승된 지금이라면 충분히 상대해볼 만할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따르겠습니다. 저에게 선택을 강요할 권한은 없으니까요.”
시르케는 고개를 끄덕인 후 전요한을 뒤따랐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마력 역장을 펼치자 주위의 전사들이 강풍에 휩쓸리듯 밀려나간다.
“뭐, 뭐야? 저 마법사는?”
“최소한 SSS 등급의 마력 보유자인 것 같아. 괜히 건드리지 말자.”
발끈하던 마인들이 뒤늦게 눈치 보며 자리를 피했다.
전장에서는 자신의 수준보다 높은 상대를 고르지 않는 것이 현명한 생존법인 탓이다.
“저 녀석들 덕분에 카인을 찾기가 한결 쉬워지겠네.”
전요한은 마침 잘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는 마인들로 인해 시야가 트이고 있었다.
“하지만 단점도 있군요. 모두의 관심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시르케는 마냥 좋아할 상황이 아니라며 경각심을 주었다.
전장 한복판에서 난리를 피운 탓에 이목이 집중되었고, 여차하면 집중견제를 당할 판이다.
“녀석들은 적당히 맡아줘. 나는 한 놈에게만 집중할 테니까.”
말을 마친 전요한은 예리한 눈빛으로 녹티스를 들어 올렸다.
마침내 찾아냈다.
신들의 변덕스러운 장난으로 모든 걸 잃고, 세상에 모든 증오를 향하게 된 사내가.
“이렇게 다시 만나서 기쁘군.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
묵묵히 제자리에 서 있던 카인이 먼저 말을 건네왔다.
그는 마치 전요한이 찾아올 걸 알고 있었단 듯이 침착한 표정이었다.
“신화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세계의 멸망을 꿈꾸는 거죠?”
전요한은 따지듯이 물었다.
최후에 남겨진 여신, 시스티나의 의지로 신화적 존재들이 군림하던 시기는 종결되었다.
이후엔 각 종족들의 의지로 미래가 개척되어 왔고, 상위 존재인 권능자는 그저 차원의 유지와 유희적인 경쟁에만 골몰해왔을 뿐이다.
카인이 바라던 이상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대체 무엇이 그의 증오심을 계속 일깨우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아직도 최초의 신족이 한 명 살아 있는데 이대로 납득하라고? 여전히 세계는 신의 농락질에 뒤흔들리는 놀이판이나 다름없다.”
카인은 노골적으로 시스티나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사실상의 최고신인 그녀가 완전히 파멸할 때까지 그는 몇 번이고 부활하여 모든 것에 다시 도전해올 것이다.
“홀로 남겨져야 했던 여신에겐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위해 싸울 겁니다.”
팽팽한 신념의 충돌 앞에서 전요한도 물러서지 않았다.
카인은 그의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렇기에 오직 너만이 기나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나의 숙적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여신의 선택을 받아 세상을 지키려는 자여,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무위의 우열을 가려보자.”
두 사내가 서있는 지면을 중심으로 거센 폭풍이 일었다.
버티지 못하고 밀려난 시르케는 실눈을 뜨며 마음속으로 동료의 안위를 빌었다.
‘당신은 반드시 살아서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평화와 공존의 세계를 유지하는 건 그만이 해낼 수 있는 과업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오랜 동료이자 친구가 허무하게 죽지 않기를 바랐다.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제가 다할 수 있는 최선을 통해서.’
주위에 몰려 있는 마인들을 향해 시르케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이윽고, 번뜩이는 뇌전과 함께 인근 일대가 소란에 휩싸였다.
* * *
‘예전엔 이 녀석의 능력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었지.’
숨 막힐듯한 대치상태에서 전요한은 과거를 회상했다.
카인은 신기하게도 모든 형태의 불리한 간섭을 거울처럼 반사시키는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일종의 무효화 능력인 자신의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분명한 이점이다.
‘동시에 여럿의 적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짓도 일삼았어.’
일명 바인드라고 불리는 희귀 스킬이었다.
무형의 구속력을 발휘하여 동일한 피해를 함께 붙잡힌 이들에게 모두 적용시키는 내용이다.
그 탓에 단순히 인해전술로 몰아붙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허나 녀석 또한 절대면역이란 특성을 지닌 자신에겐 어떤 피해도 줄 수 없다.
이러한 무상성 관계로 인해 저번에는 승부를 내지 못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언제까지 빈틈이 생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지? 그런 요령만으로는 내게서 승리를 쟁취해갈 수 없을 것이다!”
말을 마친 카인이 먼저 흉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전요한은 그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핀 후 녹티스를 휘둘러 담대하게 반격했다.
카랑!
망혼검 이스카리오와 전사자들의 검 녹티스가 맞부딪치며 날카로운 공명음을 냈다.
양쪽의 기세는 거의 비등한 수준.
전의가 불타올라서인지 전요한은 카인에게 조금도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놀랍군. 솔직히 별 차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잘도 이만한 성장을 거듭했을 줄이야.”
“그동안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거든요. 아무런 자각도 없이 피해망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당신과는 다릅니다.”
전요한은 일침을 준 후 강인한 기합을 내질렀다.
그러고는 얼마 전에 깨달았던 극의의 검술을 펼치며 거세게 카인을 몰아붙였다.
채채챙!
채챙! 챙! 챙!
무위만 놓고 보면 이제 그가 한 수 위인 것처럼 보였다.
여유만만해하던 케인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 어째서….’
아무리 여신의 가호를 받고 있어도 상성상 전요한이 우세를 점할 요소는 없을 터였다.
이윽고 치열한 격전 끝에 문제의 원인을 깨달은 케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불태우고 있었나.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의 위세를.’
전요한에게서 일어나는 불길은 단순한 영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장작더미로 내던지면서까지 발화시키는 생명력 그 자체다.
불사조의 화신으로 잠식되어 가는 자가 꽃피우는 열망적인 의지.
처음부터 모든 것을 걸었던 전요한에게 밀려난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허나 이를 순순히 인정할 카인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더는 여유 부리지 않겠다.’
적어도 지금까지 자신이 진심으로 상대해온 인간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최대한 빈틈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카인은 침착하게 전요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확실히 위협적이긴 하지만 미묘하게 패턴화되어 있는 공격.
전요한은 강공과 속공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가며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현재 페이스가 계속 유지된다면….’
모든 움직임에 일일이 대응하지는 못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허를 찌르는 일격은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잠시 후 기회를 노리던 카인의 시야에 예상범위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카인은 속으로 검은 미소를 띠며 자신의 고유특성을 발동시켰다.
위협적인 간섭 효과를 모조리 반사시키는 스킬, 카운터 어택.
이대로 승리일 거라 생각했으나 그건 오산이었다.
휘이익!
그의 카운터 어택은 허망하게도 전요한의 잔상만을 갈라놓는 데 그쳤다.
그제야 케인은 자신이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녕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나!’
만약 그렇다면 완전히 허를 찔리고 만 셈이었다.
역으로 빈틈을 내어준 꼴이었으니 치명상을 입는 건 당연했다.
푸욱!
서늘한 감각과 함께 등허리에 예리한 검끝이 파고들었다.
케인은 뒤늦게 피했지만 상흔으로 인한 출혈은 어쩔 수 없었다.
“크윽.”
부상을 움켜잡으며 흐릿해지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불사조의 겁화는 마인이 지닌 생체회복력으로 버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타들어가는 고통이 세포 하나하나를 괴사시키며 영혼에 원죄의 심판을 각인하고 있다.
“역시 이런 식의 공격은 무방비 상태로 당하는 모양이군요.”
신음하는 카인을 보며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카운터 어택이 있지만, 불사조의 겁화만큼은 감당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불사조의 겁화는 다름아닌, 신들마저도 그 오묘한 섭리에 경탄했던 정화의 불씨가 본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성배라고 구전되어 내려오는 최상급의 성유물이 바로 이것이고 전요한은 그 권능을 온전히 이끌어내는 중이었다.
“설마 여신이 그걸 너에게 맡기고 있었을 줄은 몰랐군. 만약 나 같은 인물에게 빼앗기기라도 하면 곤란할 텐데 말이야.”
“그녀는 피조물들의 머리 위에 군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구원할 선택지도 미련 없이 내어준 것이죠.”
시스티나는 이 세계를 관장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였다.
피조물을 놀잇감으로 여기고 아무렇게나 가지고 놀다 버렸던 신들에 비하면, 한없이 자비롭고 평화주의적이다.
그렇기에 전요한은 끝까지 그녀의 전사가 되어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울 생각이었다.
비록 선과 악의 기준이 다소 모호한 측면이 있고, 인간은 계속하여 모순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고 해도 말이다.
“모든 것에 무료함을 느끼는 나태함일 뿐이다. 신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은 언제든 다시 그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할 수 있어.”
고통에 신음하던 카인은 다시 몸을 온전히 일으켰다.
그러고는 마기를 한계치까지 끌어올려서 궁극의 형체로 진화하려고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