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원죄의 마녀 (8)
‘곤란하게 되었군요.’
채린이 언젠가 마녀의 의지에 잠식당하리란 건 알고 있었다.
나름의 대비를 해둔 상태.
그래도 타이밍이 영 좋지 않다.
‘일단은 급한 쪽을 먼저 신경써야겠습니다.’
채린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 시르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수인족 무리에게 집단린치 당하는 전요한을 향해 수호마법을 시전했다.
티잉! 하는 소리와 함께 수인족들이 튕겨나간다.
“뭐야, 방해하는 거냐?”
“하프엘프 년이 건방지게!”
수인족들은 화가 난 표정으로 시르케를 노려봤다.
자신을 향해 시선이 집중되자 시르케는 큰 소리로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어서 손을 쓰세요!”
채린을 구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찰나의 기회가 생긴 전요한은 녹티스를 빼어든 후 전력으로 돌진했다.
“크아아아!”
창백한 섬광과 함께 수인족들의 선혈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곧장 거리를 좁히며 달려오자 채린을 인질로 삼던 녀석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말을 듣지 않으면 이년을 죽여 버리겠어!”
손가락만 까딱하면 채린의 목을 간단히 그어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도중, 무언가 섬뜩한 살의가 수인족들을 쭈뼛하게 했다.
“전부 죽여버릴 거야….”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않던 채린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검은 가시들이 허공에서 나타나 주위의 수인족을 잔혹하게 도륙했다.
촤아아아악!
그녀의 마음 속에 잠들어 있던 어둠이 마침내 발현된 것이다.
불안과 자책 속에서 싹이 튼 마녀의 의지는 삽시간에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뭐, 뭐야! 이건 대체!”
표범 인간의 표정이 공포감으로 일그러졌다.
별 보잘것없는 녀석들이라 생각하고 기습한 건데, 그중에서도 가장 만만했던 여자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있다.
“마, 마녀였던 거냐! 그렇다면 네년도 저주받은 혈족의….”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표범 인간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허공을 찢으며 날아든 검은 가시가 무방비 상태의 복부를 가차 없이 꿰뚫은 탓이다.
“커헉!”
표범 인간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더니 그대로 나자빠졌다.
“린!”
전요한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그가 다가가려 하자 시르케는 앞을 막아서며 만류했다.
“그녀는 현재 인사불성인 상태입니다. 말을 건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마녀의 의지에 한번 잠식되고 나면 본래의 의식을 깨우기 어렵게 된다.
그렇기에 무작정 대화를 시도하다간 조금 전의 표범인간처럼 공격당할 것이 뻔했다.
“그거라면 방법이 있어.”
전요한은 좋은 생각이 있단 듯이 눈빛을 반짝였다.
“뭔가요? 그 방법이란 게.”
“저번 시련에서 얻은 특전이 하나 있거든.”
이리스에게서 한민족의 영웅 중 한 명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보상을 얻었다.
전요한이 선택한 영웅은 다름아닌, 정도전.
그를 선택한 이유는 타락한 영혼을 정화할 수 있는 성유물 때문이었다.
- 이제야 내 도움이 필요하게 된 것이냐? 옜다, 받아라.
정도전은 흔쾌히 사인참사검을 건네주었다.
비록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강직하고 의연한 기운이 배후에서 느껴진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전요한은 사인참사검을 받아 든 후 채린에게로 도약했다.
검은 가시들이 일제히 그의 허점을 노렸지만, 사인참사검의 위력 앞에 모조리 형체를 잃었다.
“나는, 지지 않을 거야!”
검은 기운에 휩싸인 채린이 표독스럽게 외쳤다.
이성을 잃은 그녀의 시야엔 이미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구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전요한이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가 거리를 좁혀서 사인참사검을 갖다대자, 채린의 의식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어?”
주위의 검은 기운이 걷혀나가며 몽롱한 정신을 일깨운다.
이윽고 눈앞의 전요한을 발견한 채린은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시, 싫어. 이런 건….”
그녀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비로소 마녀의 의지는 사그라들었다.
무리한 폭주화로 인해 일시적으로 팔다리에 힘이 빠져나간다.
“괜찮아? 몸은 어때?”
쓰러지려는 채린을 부축한 후 전요한이 물었다.
둘이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불청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물겨운 장면이군. 조금 더 기다려주고 싶은데 안타깝게 되었어.”
백발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 출신인지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다.
피부 색은 희고 눈동자는 붉다.
마치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되돌아온 느낌이다.
“당신은 누구죠?”
“신들의 저주를 받은 이단아. 멋대로 정해진 운명에 농락당하고 장난감처럼 버려진 자다.”
백발의 사내는 자신을 카인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바람은 신들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천마왕이군요. 버려진 대륙의 마인들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존재가 맞습니까?”
전생으로부터 전승받은 기억에 의하면, 이자가 금지된 힘을 손에 넣어 후일 강림하게 되는 마신이었다.
나머지 마왕은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거나, 도망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역시 넌 나를 잘 아는 듯하군. 하지만 뭐 상관없다. 어차피 여기에서 전부 죽게 될 테니.”
카인이 무구를 뽑아 들며 말했다. 그의 마검이 칠흑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전요한은 긴장한 표정으로 녹티스를 들어올렸다.
“미안하지만 당신에게 뭔가를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나름 사정이 있어서요.”
“그럼 빼앗을 뿐이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자신이 희생자였다고 해서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가?
전요한은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곧장 달려들자 카인은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군.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장검이 맞부딪치자 공명음이 울려퍼졌다. 튀는 불꽃에 카인의 눈이 더욱 붉어 보였다.
“그 검, 역시 평범하지 않구나. 내가 갖겠다.”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해보시죠!”
두 사내는 그렇게 몇 합을 주고받았다.
쉽게 승부가 나지 않자 카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에게 은총을 준 신이 누구지? 이 정도로 강한 걸 보면 보통의 위계는 아닌 것 같은데.”
“순순히 말해줄 것 같습니까? 뭔가를 알아내고 싶다면 먼저 릴리스에 대해 말해 보시죠!”
“과연, 내 짐작이 맞았나 보군. 지금부터는 나름 진지하게 상대해주지.”
카인은 전요한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인간은 죽을 운명. 더 시간 끌지 말고 승부를 내자.”
카인의 마검이 섬뜩한 칠흑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일행은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까지의 검기와는 분명 위력이 남다르다.
“내게는 심연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자질이 있지. 그것을 이용하면 이 마검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다.”
마검은 이제 모든 걸 파멸시키는 최종병기가 되어 있었다.
전요한도 정신을 고도로 집중해서 녹티스에 의식을 일치시켰다.
그러자 영롱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녹티스의 검신을 뒤덮었다.
“어설픈 이상을 좇는 자여, 끝없는 절망을 맛보아라.”
모든 준비를 마친 카인이 전요한을 향해 마검을 휘둘렀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칠흑빛 불꽃이 머리 위로 날아든다.
전요한은 전력을 다해 녹티스로 그에게 맞섰다.
푸른 소용돌이가 심연의 불꽃과 충돌하자 거친 풍파가 생겨났다.
“위험해! 자리를 피해야겠어!”
“과연 영웅들의 결투군요! 엄청납니다!”
전투를 지켜보던 채린과 시르케는 배후로 피신했다.
한편, 검을 맞부딪힌 채 두 사내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상대의 기세가 전혀 밀리지 않자 카인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너 정도의 영웅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몰라. 신들을 전부 멸망시킬 수 있는 방법 말이야.”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통제 불가능한 혼돈이 세상을 집어삼킬 뿐이죠.”
“무슨 소리. 신들은 지금까지 인간을 장난감으로 부려왔다. 제멋대로인 성향과 변덕으로 희생된 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나?”
카인의 검기가 더욱 증폭되어 칠흑빛의 폭풍이 일어났다.
전요한은 지지 않기 위해 녹티스에 최대한의 영력을 불어넣었다.
황금빛과 칠흑빛이 뒤엉키며 거대한 바람을 일으킨다. 수풀이 세차게 흔들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신의 은총을 받은 자여, 어디 한번 수천 년에 걸친 원한을 감당해봐라!”
눈을 번뜩인 카인이 필살의 공격을 퍼부었다.
“크윽!”
전요한은 안간힘을 다해 막아내려 했다.
그런데 기류에 휘말릴수록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한 공격이 아니야.’
현실과는 괴리된 시공간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주위풍경이 일변하며 무대화했다.
숲속에서 우우 하는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보름달이 조금씩 가장자리에서부터 조금씩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주위가 어두워진 가운데, 지휘관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최전방에서 손을 들어올렸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오늘 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것이다! 성역은 우리의 화살로 불타오를 것이고 신들은 혼돈의 권능에 무력하게 쓰러질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해방이 눈앞이다!”
병사들이 입을 모아 자유를 외쳐댔다.
지휘관이 손을 들어올리자 후방에 있던 궁병들이 일제히 불화살을 쏘아올렸다.
미리 설치해둔 장작 더미들에 불이 붙으며 어둠을 몰아냈다.
‘카인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적대자가 사라진 터라 전요한은 일단 상황을 주시하기로 했다.
잠시 후 거대한 형상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그중 가장 용맹해 보이는 자가 창을 전방으로 던졌다.
그것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양쪽의 군세가 뒤얽히며 싸우기 시작하자 전요한은 일행을 찾았다.
“채린! 시르케!”
하지만 그녀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목청 높여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도중, 세 마리의 마물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들은 여성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두 눈은 붉게 빛났고 머리카락은 뱀처럼 꿈틀거렸으며 등에 날개가 달려있었다.
‘어디선가 본 마물인데.’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보니 메두사형의 반인반수였다.
눈을 마주치면 돌로 변하니 고개를 숙이고 싸워야 한다.
“이런, 세 자매가 붙어 다니는군요. 한 번에 제압하는 수밖에 없겠어요.”어디선가 시르케가 나타나서 전투법을 알려줬다.
그녀는 청동방패에 비치는 그녀들의 형상을 보고 있었다.
“채린은 어디에 있어?”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전장의 한복판이었거든요.”
“아무튼, 조심해. 저것들은 드래곤의 비늘처럼 단단한 피부를 지니고 있어서 쉽게 죽지 않아.”
하지만 녹티스는 드래곤의 비늘도 가를 수 있었다.
“저들의 시선을 끌어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알겠습니다.”
전요한은 시르케에게서 은신 마법을 부여받았다.
수준이 높은 마법이라 메두사들은 가까이 다가가기 전엔 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일격에 목을 날려야 해.’
차분하게 숨을 고른 후 메두사들의 뒤로 이동했다.
시르케가 마법을 영창하며 그녀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적당히 타이밍을 보아 녹티스를 휘두르자 메두사들의 목이 일거에 날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