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원죄의 마녀 (7)
청발 사내가 전요한에게서 떨어지며 입을 열었다.
“기대 이상으로 강하군요. 늦었지만 자기소개를 하죠. 제 이름은 다리엔, 버려진 대륙의 지배자 중 한 명인 수마왕입니다.”
“그래서 릴리스는 어디에 있죠? 당신에게는 관심 없으니 그녀의 위치나 알려주시죠.”
“그분은 현재 의식을 치르고 계십니다. 방해할 생각이라면 저를 먼저 쓰러뜨리고 가야 할 겁니다.”
“의식이라고? 대체 무슨 짓을….”
“쓸데없이 시간을 끌었군요. 그럼 다음 일격으로 승부를 가르도록 하죠.”
다리엔은 검을 고쳐 잡았다. 자신을 이 정도로 밀어붙인 것은 전요한이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일격필살의 비기에 모든 것을 건다.
그렇게 다짐하며 다리엔은 아론다이트의 검기를 증폭시켰다.
신체의 기운을 검기와 동화시켜 움직임만으로 상대를 벤다.
여러 번의 참격과 동시에 상대에게 쇄도하는 연속기.
잠시 후 다리엔이 기합을 내지르며 전요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요한은 그의 공격들을 받아내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이후 두 사내의 모습이 사라지고 색채가 다른 검기만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충돌을 반복했다.
‘지금이다!’
빈틈을 찾았다고 생각한 다리엔이 아홉 번의 참격과 함께 오의를 사용했다.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다고 생각한 순간 다리엔은 전요한의 모습이 잔상을 남기며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봤다.
다리엔은 그가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멈춰 섰다.
“정말이지 대단하군요. 분명 전력으로 맞섰는데.”
다리엔의 입가에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간신히 전요한의 일격을 막았지만 검기에 베이고 말았던 것이다.
다리엔은 전요한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릴리스와의 결전을 위해 체력을 아껴두고 있었던 것이다.
“릴리스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세요. 안 그러면 끝장을 내겠습니다.”
“그건 무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도록 하죠.”
다리엔은 웃으며 아론다이트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는 조금 뒤로 물러서더니 푸른 물결이 되어 사라졌다.
“어, 어떻게 사라진 거야?”
“수속성의 마왕이라더니, 전혀 별 볼 일 없진 않았나 보군요.”
배후에서 지켜보던 채린과 시르케가 눈을 깜박였다.
전요한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은 후 허공을 올려다봤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찾는 수밖에 없겠어. 더 늦기 전에 서두르자고.”
시련과 함께 사라진 그리젤다의 안위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일행은 검은 숲의 최심부를 향해 걸음을 내달렸다.
* * *
“여기로 가는 게 맞는 거야?”
채린은 과연 자신이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는 건지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전부터 계속하여 같은 자리를 맴도는 기분이었다.
“방향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마녀의 환각 마법이 감각을 현혹시키고 있을 뿐이죠.”
나침반을 주시하던 시르케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채린은 여전히 불안한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전요한에게 찰싹 달라붙어 그를 계속 관찰하던 그녀는 주변의 기분 나쁜 마력을 느꼈다.
이것은 틀림없는 마족의 기운. 게다가 제법 숫자도 되어 보였다.
“이 근처에 마족들이 있는 것 같아. 게다가 점차 가까워지는 중이야.”
“아무래도 릴리스의 지시를 받은 모양이네.”
전요한이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언덕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존재들이 재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일행을 포위해버렸다. 검은 마물들이 그들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봤다.
언덕에서 회색 머리칼의 여성이 나오며 큰 소리로 웃어댔다.
“호호, 그것은 내가 할 소리야. 너희들은 누구지?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데 잘됐어.”
“우리에게 화풀이를 할 셈입니까? 과연 마족답군요.”
검은 날개가 달려 있고 머리에 작은 뿔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마족이 확실했다.
전요한은 왜 마족들까지 끼어들어서 자신들을 방해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끄러워. 너희들, 게다가 어린것들이네? 천천히, 잔인하게 죽여줄게. 살갗을 조금씩 벗겨내면서 말이야!”
여자 마족이 손을 들자 마물들이 일시에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요한은 짧은 기합과 함께 녹티스를 크게 두 번 휘둘러 반달 모양의 검격들을 날렸다.
서늘한 검기가 전방향의 마물들을 깔끔하게 절단해 버렸다. 마족 여성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인간 주제에 제법 강하네. 하지만 너무 안심하지 마. 이게 전부가 아니니까.”
그녀의 뒤에 있던 마물들이 언덕을 내려와 전요한을 향해 돌격했다.
녹티스의 검신에서 응집된 검기가 솟아오르면서 바람을 일으켰다.
전요한은 흑발을 휘날리며 마물들을 향해 녹티스를 휘둘렀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회오리가 마물들을 휩쓸며 언덕까지 날아갔다.
마족 여성은 손을 뻗어 그 일격을 막아냈다.
“서포트해줄 수 있겠어? 저 여자하고 승부를 낼게.”
“우리가 마물들을 상대할 테니 저 마족을 때려잡으세요.”
시르케는 이런 잡종들은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채린도 그녀의 곁에서 마물들을 처리하는 편이 낫다.
“그럼 부탁할게. 늦지 않도록 제시간에 끝내고 오겠어.”
그렇게 말하며 전요한이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마물들이 그를 덮치려 할 때 전요한의 모습이 잔상과 함께 사라졌다.
마물들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시르케를 향해 도약했다.
화르륵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마물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이후 시르케와 채린은 여유를 부리며 마법의 축제를 벌이기 시작했다.
한편, 전요한은 마족 여성의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싸늘한 검기를 머금은 녹티스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마족 여성은 한 손에 어둠의 창을 소환해서 그 공격을 받아냈다.
“설마 했는데, 너 무언가의 화신이야?”
“글쎼요, 대답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방심했네, 그렇다면 더 이상 봐주지 않겠어.”
그녀의 말과 함께 전요한을 향해 사방에서 어둠의 창들이 날아왔다.
전요한의 모습이 잔영을 남기며 사라지자 그 창들은 대지에 내리꽂혔다.
마족 여성은 그 순간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전요한이 지나치면서 그녀를 녹티스의 검기로 베어버린 것이다.
마족 여성의 입가에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더는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서둘러 죽어주세요.”
전요한의 말과 함께 마족 여성의 흉부에서 검은 피가 솟구쳤다.
무릎을 꿇으며 그녀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검기에 베인 것만으로도 오한이 서려왔다.
재생능력도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화의 불씨에 당한 상처는 상위 마족의 권능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성질의 타격이다.
“전요한, 그녀를 아직 죽이지 말아보세요.”
어느새 다가온 시르케가 말했다. 그녀는 마족 여성을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왜 릴리스를 돕는 거죠? 이곳의 마인들을 꼬드겨서 낙원에 쳐들어가기라도 할 생각인가요?”
“호오, 마치 내 계획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눈빛이로군. 뭐, 너희들은 모두 죽게 될 테니 눈치채봤자 상관없겠지. 진정한 마신이 강림하기 전에 실컷 눈요기나 해두라고, 호호호호!!”
이곳에서 마신이 강림한다고?
전요한은 순간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걸 느꼈다.
그가 뭔가를 물으려 할 때, 마족 여성의 몸이 화염에 휩싸였다.
“아아아아아악!!”
“계획을 외부에 발설하면 릴리스 님께서 고통스럽게 죽이겠다고 말씀하셨죠. 평소 무시하던 마인의 손에 불타는 기분은 어떠신가요?”
어둠 속으로부터 적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족 여성은 일어서서 손을 휘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다 털썩 쓰러졌다.
적발 여인은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건방진 마족 같으니. 릴리스 님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진작에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텐데.”
그녀는 아직도 속이 시원하지가 않았다. 잠시 후 전요한이 입을 열었다.
“너는 적마왕이라도 되는 거야? 화염 마법을 쓰는 걸 보니 대충 그런 눈치인데.”
“내 호칭을 함부로 부르다니, 정말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적발 여인은 수치라도 당한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화속성이라 그런지 성격 면에서도 불같은 면이 있다.
“저 여자까지 상대하는 건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되도록 피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위에 몰려드는 마물들을 확인한 시르케가 조언을 해왔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우회로를 향해 내달렸다.
일행이 작은 협곡을 지나려 할 때 귀찮은 무리들이 찾아왔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표범 얼굴을 한 수인족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러자 뒤에 숨어 있던 동족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음흉하게 웃었다.
‘죄를 지어서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추방자들이로군.’
전요한은 한숨을 쉬었다.
수인 용병단은 어디에서나 악랄하기로 유명한 단체였다.
그들은 돈이 된다면 절도, 약탈, 방화, 청부살인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짓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아무래도 객지에서 여행하는 모험가들의 귀중품과 장비를 팔아먹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 같다.
“길을 비켜달라고 하면 무시하겠지?”
“가진 것을 다 내놓으면 고려해보지. 아 그리고 거기 있는 아름다운 처자들도 함께 말이야. 너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매우 굶주려 있는 상태거든.”
표범 인간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수인 족들이 거칠게 웃으며 침을 흘렸다.
시르케는 자신을 향하는 수컷들의 눈빛이 기분 나빴지만 상황상 조금 참기로 했다.
묘족 여자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전요한은 그녀를 단칼에 베었다. 꼬리를 내리며 묘족 여자가 무릎을 꿇었다.
“단번에 승부를 보려면 저들의 두목을 해치워야해. 다들 조금만 버텨줘.”
“어서 다녀오세요. 잡배들은 저희가 상대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시르케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고개를 끄덕인 전요한은 표범 인간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채린은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걱정에 휩싸였다.
‘여기에서 너무 오래 발목을 잡혀 있으면 안 되는데.’
검은 숲에 들어온 이후로 몸이 점차 이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영혼에 새겨진 마녀의 표식 때문인지, 주위의 마기가 의식을 잠식해 들어간다.
‘뭐지? 갑자기 현기증이 나.’
서둘러 마법을 시전하려던 채린은 순간 몸을 비틀거렸다.
이로 인해 달라붙는 수인 족 몇 마리를 제거하다가 역으로 그들에게 붙잡혔다.
채린이 비명을 지르자 전요한이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수인족들이 채린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어쩔 셈이지? 아름다운 계집의 목이 달아나길 원하나?”
표범 인간이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요한과 시르케는 이를 악문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표범 인간이 손으로 두 사람의 무기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천천히 그것들을 땅에 내려놔. 그리고 옆으로 떨어져.”
전요한은 말없이 그의 말에 따랐다.
그러자 표범 인간이 전요한에게 달려들어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전요한이 쓰러지자 다른 수인족들이 그에게 발길질을 시작했다.
집단린치가 자행되는 모습을 보며 시르케는 곤란함을 느꼈다.
전요한의 안위보다도, 이렇게 되면 채린의 의식침전이 가속화되게 된다.
“아아, 안 돼. 나 때문에….”
고개를 돌려보니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혼란해하고 있는 채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점차 흉흉한 마기에 잠식당하자 시르케는 조심스럽게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