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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74화 (174/180)

제174화. 원죄의 마녀 (6)

“얼마나 더 뛰어야 가운데까지 도착하는 거지?”

“몰라! 아무튼 지금 멈추면 우린 죽어!”

전요한이 헥헥대며 묻자 채린이 그렇게 외쳤다.

한참을 더 달리고 나서야 일행은 장미 넝쿨로 둘러싸인 어떤 공간에 도착했다.

“이, 이곳은?”

“조금 수상한데요?”

채린의 의문 섞인 표정을 보며 시르케가 말했다.

뒤따라오던 이들도 그녀들과 같은 것을 보고 멈춰 섰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정원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숲속의 정원이라, 재미있네요.”

릴리스가 그렇게 말하며 정원에 피어 있는 백합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저곳에 배치된 형형색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

중앙부에는 의식을 진행하기 위한 작은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릴리스 님.”

분명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채린은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흰 머리를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길게 기른 한 여인이 공중에 떠 있었다. 흰 눈썹에 흰옷. 그녀는 앙상한 이미지 그 자체였다.

“당신은 누구죠?”

릴리스의 물음에 그녀는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앞으로 다가왔다.

“저는 세계의 멸망을 갈망하는 원념.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당신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여인은 릴리스가 봉인해둔 분신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릴리스는 혼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어요. 당신이라면 분명 그렇게 해주실 수 있겠죠?”

“물론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왜죠? 당신도 제가 못마땅한 건가요? 저주받은 힘을 지니고 있어서?”

릴리스가 화를 내자 여인은 그녀를 향해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없는 이유는, 그 기억을 지운 것은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에요.”

“그, 그런….”

“당신이 다시 현실을 마주하려 하지 않고 도망친다면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의미 없는 일이겠죠. 하지만 당신은 분명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거에요.”

릴리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전요한이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녀는 패닉 상태에 빠진 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막아야 하는 것 아니야? 이전의 기억을 되찾고 나면 릴리스는 곧바로 우리의 적이 될 텐데.”

불길한 느낌을 받은 채린이 만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전요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방관하는 입장을 취했다.

“어차피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릴리스는 본래의 기억을 되찾게 될 거야. 여기는 그녀의 과거를 기반으로 구축된 공간이니까.”

시련의 내용은 결국 릴리스를 쓰러뜨리는 것이 핵심일 터다.

“그녀가 다시 세상에 재림하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갈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막아내야만 해요.”

시르케가 결의를 다진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릴리스를 바라봤다.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백발의 여인과 융합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자, 잠깐!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건데!”

당황한 채린이 소리쳤다.

예상외의 사태였는지 전요한도 눈을 깜박였다.

“어디로 가버린 거지?”

“그리 멀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탐지 마법을 시전할 테니 뒤따라가죠.”

마력 나침반을 소환한 시르케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일행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릴리스가 잃어버렸던 기억은 분명 안 좋은 것들이겠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지고, 낙원에서 추방당했다고 했잖아.”

수색을 계속하던 채린이 문득 물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멸망시키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어.”

릴리스가 다시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일행이 다시금 걸음을 서두르려 하던 찰나였다.

“당신들이 대륙의 너머에서 왔다는 이방인입니까?”

어디선가 나타난 청발의 사내가 일행의 눈앞에 멈춰 섰다.

심상치 않은 존재란 걸 느낀 시르케는 곧바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번에 나타난 풍마왕이란 자와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아마도 다른 속성의 마인인 것 같군요.”

“그래? 그럼 되도록 피하는 게 좋겠네. 안 그래도 릴리스를 찾아야 해서 바쁘다고.”

채린이 속삭이며 불필요한 전투는 하지 말자고 말렸다.

“저희는 어쩌다가 이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딱히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건 아니니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전요한은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청발의 사내는 이해했단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렇군. 그쪽의 사정은 대충 알겠어.”

“그럼 저희는 이만.”

일행은 슬쩍 눈치를 본 후 옆을 지나가려 했다.

그러자 청발의 사내가 말없이 검을 꺼내 들었다.

“이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당신들도 알겠지만 여기는 릴리스 님의 성역. 당신들을 처리하라는 명을 받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진심을 다해 저, 수마왕을 상대해 주시길.”

처음부터 이렇게 되어버릴 일이었다.

전요한은 하는 수 없단 듯이 녹티스를 꺼내 들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우리 앞을 막아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 싸우자.”

두 사내는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일행은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짧은 기합과 함께 전요한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거지?’

순간 청발의 사내는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 그의 뒤쪽에서 전요한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고는 청발의 사내를 향해 녹티스를 휘둘렀다.

청발의 사내는 아직 발검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검격이 닿으려는 순간 청발의 사내는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챙!

검이 부딪히면서 맑은 소리가 울려 펴졌다.

두 사내는 검을 마주한 채로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타악!

전요한은 청발의 사내에게서 떨어져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전사자들의 검, 녹티스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며 그의 몸을 감쌌다.

다시 한번 도약하며 여러 방향에서 상대에게 연격을 날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움직임에는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청발의 사내는 묵묵히 그 공격을 받아내며 전요한을 지켜보았다.

순간 시야에서 전요한의 모습이 사라졌다.

얼마 전에 자신을 의아하게 한 기술이었다.

위를 쳐다보자 전요한이 높은 허공에서 검기를 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청발의 사내는 전요한이 있는 곳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 일격을 아론다이트로 막아냈다.

“크윽?”

전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서 여러 번 참격을 더 날렸다.

청발의 사내가 다시 한번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쳐다본 전요한은 그가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챙!

전요한은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냈지만 어마어마한 힘의 격차로 인해 그대로 허공을 날아 대지에 처박혔다.

청발의 사내는 조심스럽게 착지하면서 먼지가 일어나는 곳을 응시했다.

“전요한!”

채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시르케는 이를 악물고 청발의 사내를 쳐다봤다.

전요한을 저렇게 몰아세울 정도의 실력자라니.

힘은 물론 스피드에 있어서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회심의 공격 역시 쉽게 간파당했고 말이다.

전요한이 흙먼지를 털어내며 일어서자 청발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마인도 아니면서 그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대체 무슨 꼼수를 부린 건지. 아무튼 승부는 내야겠지요.”

“당신은 확실히 강합니다, 수마왕.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말에 따를 수는 없습니다. 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까요.”

“아직도 자신의 입장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군요. 진정한 힘의 격차를..”

말을 멈춘 청발의 사내가 잔상과 함께 사라졌다.

전요한은 녹티스를 든 채 그의 모습을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청발의 사내가 유령처럼 뒤에서 나타나며 검을 휘둘렀다.

전요한은 곧바로 피했지만 검격에서 완전히 빗나가진 못했다.

상흔에서 피가 솟구치자 그것을 본 채린이 비명을 질렀다.

“크윽!”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전요한은 잠시 몸을 휘청였다.

채린이 곧바로 달려가려 했지만 시르케는 그녀를 손으로 제지했다.

그러고는 안 된다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지금 개입해봤자 방해만 될 뿐, 도움이 되는 건 없다.

그리고 아직 전요한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이 결투에 끼어들 수는 없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청발의 사내가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이루려는 일이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는 지켜야 합니다. 제 자신과 동료들의 꿈을. 그래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당신은 곧 다가올 파멸로부터 그 누구도 지킬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소중하게 생각하는 주위의 사람들이 먼저 희생되겠죠.”

청발의 사내는 전요한이 자신보다 전력 면에서 뒤처진단 점을 지적했다.

전요한은 침묵하다가 피투성이가 된 채 일어섰다.

청발의 사내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돌아서서 그를 쳐다봤다.

“몇 번을 반복해도 같을 겁니다. 당신의 움직임 정도는 전부 읽고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아론다이트를 들었다.

초록빛 검기가 검신을 휘감으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청발의 사내는 마지막 일격을 날리기 위해 다가갔다.

전요한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채린이 마법 시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전요한의 배후로부터 휘광이 번쩍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청발의 사내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순간이었지만 그는 전요한에게서 날개를 펼치는 불사조의 모습을 보았다.

‘주, 주눅들어서는 안돼.’

청발의 사내는 전요한이 선택받은 자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릴리스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다시 아론다이트를 들어 올렸다.

‘어서 승부를 내야만 한다.’

전요한이 입었던 상처는 신기하게도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분명, 지금의 저 녀석은 뭔가 다르다.

조금만 시간이 지체되어도 돌이킬 수 없게 될 거란 불안감이 그를 몰아세웠다.

이윽고 청발의 사내가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것을 본 전요한이 허공을 향해 녹티스를 휘둘렀다.

금속성 물질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청발의 사내가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강하다!’

새로운 접점에서 다리엔은 그 사실을 직감했다.

녹티스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며 다리엔을 덮치려 했다.

청발의 사내는 전요한에게서 떨어지며 여러 개의 수속성 검격을 동시에 날렸다.

하지만 그의 검격은 전요한을 둘러싼 푸른 기운에 힘없이 소멸했다. 그것을 본 청발 사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청발 사내 쪽이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초록빛 검기가 물결치듯 전요한을 덮쳤다.

이번에도 전요한은 그 공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양쪽의 검기가 허공에서 맞부딪히면서 크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 강한 바람이 일면서 불꽃이 튀었다.

채린과 시르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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