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원죄의 마녀 (5)
전요한 일행은 황량한 대지를 가로질러 여행했다.
고대 마물이 나타날 때마다 전력으로 싸워야 했고 모두가 점차 지쳐갔다.
은발의 마녀, 릴리스를 제외하고는.
“그럼 릴리스 님은 언제부터 기억을 잃으신 건가요?”
“처음부터요. 깨어났을 때 저는 이곳에서 쫓기는 신세였어요. 제 이름이 릴리스고 검은 숲에 가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앞서 걷던 릴리스가 채린의 질문에 답했다.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다니. 정말로 원죄의 마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검은 숲이라면 악마와 관련된 것 같긴 한데….”
“시르케, 너는 검은 숲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 없어?”
궁금증이 생긴 전요한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시르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낙원의 동쪽은 괴마들을 거느린 마왕의 영역이었단 기록이 있는데, 검은 숲에 대해선 언급되지 않았어요.”
시련의 내용은 여전히 구체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채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마, 마물!?”
“뭐야, 이번엔 비행형이잖아?”
전요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녹티스를 빼 들었다.
한편, 릴리스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는 듯 별 변화가 없다.
“린, 일단 물러서! 개체 수가 너무 많아!”
“응, 알았어! 후방에서 마법으로 지원할게!”
전요한의 지시에 따라 일행은 각자 포지션을 잡았다.
멀리서 날아들고 있는 흉측한 마물들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시르케가 수호 결계를 펼치자마자 놈들은 입에서 푸른 불길을 내뿜으며 달려든다.
콰과과광‒!
맹렬한 폭격이었지만 투명한 결계를 뚫지 못하고 외벽에서 맴돌기만 했다.
“유독 우리만 집중적으로 노리는 느낌인데?”
“지금은 릴리스와 동행하는 중이니까 감수해야 할 겁니다. 달리 방법도 없고요.”
전요한의 질문에 시르케가 답했다. 그녀는 비행형 마물들을 보며 눈을 흘겼다.
“누군가가 저들을 이쪽으로 보냈을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물의 행동 패턴이라 여기기엔 너무 조직적이에요.”
“마왕인가 하는 녀석의 소행이란 말이야?”
전방에서 맹위를 떨치던 전요한이 대꾸했다.
“자세한 건 검은 숲에 도착하면 알게 되겠죠. 그때를 대비하여 체력을 아껴두는 편이 좋을 겁니다.”
시르케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전투에 임할 것을 권고했다.
마물들은 계속해서 결계에 몸을 부딪히며 푸른 불꽃을 내뿜고 있었다.
거세지는 충격에 채린이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서둘러 대응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놈들의 본거지나 다름없어서 화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들에게 계속 둘러싸일 것이 뻔했다.
“이를 어쩌지….”
“뚫고 지나가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길로 우회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고민하는 일행을 향해 릴리스가 말했다.
하지만 속임수를 쓴다고 해서 추격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전요한이 다시금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비행형 마물들이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전요한이 의아해하며 앞을 쳐다보자 한 검사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파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그는 성년기를 막 지난 나이처럼 보였다.
사파이어같이 파란 눈동자가 릴리스를 향하고 있다.
“여기에서 뭘 하고 계신 건가요, 릴리스 님.”
“누구시죠? 절 아시나요?”
사내의 말에 릴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잠시 멍하니 릴리스를 쳐다봤다.
“설마 저를 잊은 것입니까? 이 풍마왕의 이름을요?”
“풍, 풍마왕!?”
전요한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사내는 그의 모습을 잠시 살피더니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건 시련의 마법검? 릴리스, 당신이 이들과 동행한 건 이자 때문이었나요? 하지만 당신이 개입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루이 일행을 한 명씩 주의 깊게 살폈다. 그녀의 시선이 시르케의 목걸이에 머물렀다.
“하프 엘프, 평범하지 않은 유물을 지니고 있군요. 릴리스, 당신은 이들과 함께 검은 숲으로 갈 생각인가요?”
“네. 그곳에 가면 뭔가 떠오를 것 같아서요.”
“음.”
릴리스의 대답에 사내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자들을 데리고 그곳까지 걸어가려면 분명 오래 걸릴 테니까요.”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하늘에 있는 비행형 마물들을 올려다봤다. 그들 중 하나가 사내의 옆에 내려와서 고개를 숙였다.
“이 가고일을 타고 가세요. 다른 녀석들도 호위로 붙여 드리겠습니다.”
사내의 말대로 하면 분명 빠르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블루 드래곤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나머지 일행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당신들의 여행이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요.”
사내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일행을 배웅했다.
거대 가고일이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떠올랐다. 일행은 그로부터 일어난 기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날개를 꽉 붙잡았다.
* * *
“와아! 엄청 빨라!”
“마물의 등에 타보는 건 처음이군!”
채린과 전요한이 흥분한 표정으로 외쳤다. 한편 릴리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만에 하나 추락한다 해도 주위에 있는 녀석들이 구해줄 테니까요.”
일행이 타고 있는 거대 가고일 주위로 일족들이 대형을 갖춘 채 비행하고 있었다.
놈들은 영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들의 주인이 내린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요한은 하늘 아래로 펼쳐진 고원지대를 내려다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저곳을 걸어서 지나왔으면 아마 시간이 한참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릴리스, 풍마왕이 있다면 수마왕이나 화마왕도 존재하는 거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릴리스는 이곳이 오래전부터 세력전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상의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경계선 너머에 어두침침한 숲이 펼쳐져 있다.
“저곳입니다! 틀림없이!”
시르케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황량한 영역이 끝나는 곳에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절벽이 있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사방으로부터 고립된 대지가 보였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고지의 평원지대는 검은 숲이 우거져 있었다.
“검은 숲이라는 이름답게 악마의 소굴 같네!”
“일반적인 의미의 숲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채린과 시르케는 나름의 상상력을 펼쳤다.
가고일들이 저공비행을 하며 속력을 늦추기 시작했다. 놈들이 선회하며 정원의 가장자리에 착륙하자 일행은 어둑한 대지 위로 발을 디뎠다.
“가고일들아 고마워! 풍마왕한테 다음에 또 도와달다고 말해줘!”
전요한이 가고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놈들은 그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날갯짓해서 날아가 버렸다.
“붙임성 없는 녀석들이군요.”
시르케가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가고일들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전요한은 숲속으로 들어가며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어서 내부로 들어가자! 다른 추격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저 너머에 더 위험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마족들이라든가.”
채린이 검은 숲의 심부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까지의 영역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양쪽의 절벽 사이가 너무 길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인간들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없었다.
절벽 아래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뭐, 어쩔 수 없지. 어떻게든 여기를 전부 뒤져야 할 것 같으니까.”
전요한은 릴리스와 함께 숲에 발을 들였다. 아직까진 딱히 경계해오는 세력이 없어 보였다.
“릴리스가 찾으려는 기억이 대체 뭘까?”
“글쎄. 잘은 몰라도 그녀를 돕는 편이 나을 거야.”
채린의 질문에 전요한은 어두운 숲속을 가리켰다. 그가 시르케를 뒤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뭔가 느껴지는 거 없어?”
“네, 이상한 숲이긴 하지만 달리 소득이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시르케는 그렇게 말하며 나무들을 올려다봤다.
확실히 검은 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두운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아니, 분명 뭔가 있을 겁니다.”
“응? 확실해?”
“이 나무들은 인지를 방해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 말은 외부로부터 숨기고자 하는 게 있었단 말이죠.”
시르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일행이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땅을 울리는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고개를 돌려 소음의 발원지를 응시했다. 그곳엔 인간의 형상을 한 거대한 돌덩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골렘이잖아!?”
“엄청나게 크네!”
전요한과 채린이 깜짝 놀라서 뒷걸음쳤다.
시르케가 골렘을 향해 마법 화살들을 날렸지만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요한이 날린 참격도 골렘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마력으로 형성된 존재라서 마법이 통하질 않는 것 같아요.”
“그럼 직접 베어넘길 수밖에!”
시르케의 말에 전요한이 녹티스를 뽑아 들며 골렘을 향해 달려갔다.
그것을 본 릴리스도 그 뒤를 따랐다. 골렘이 전요한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돌덩어리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전요한은 그 공격을 점프로 피한 후 주먹 위에 올라타서 골렘의 팔을 따라 달렸다.
“지나갈 테니까 방해하지 마!”
눈 깜짝할 사이에 녹티스로 골렘의 머리를 베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돌 덩어리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골렘은 멈추지 않고 양 주먹으로 전요한을 가격하려 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릴리스가 마법을 시전하여 골렘의 한쪽 팔을 잘라냈다.
“고마워!”
“별말씀을.”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며 전요한은 골렘의 나머지 한쪽 팔도 절단했다. 양쪽 팔을 잃었음에도 골렘은 멈추지 않고 걸어왔다.
“젠장 어떻게 되어먹은 녀석이야?”
“골렘의 핵을 파괴해야 해요! 보통은 흉부 쪽에 있을 거에요!”
전요한이 질린 표정을 짓자 시르케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전요한은 다시 한번 점프해서 골렘의 흉부를 향해 검을 연속으로 휘둘렀다.
골렘의 몸통은 여러 조각의 돌 덩어리로 쪼개져서 땅에 떨어졌다.
“해냈다!”
전요한이 모두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릴리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기운을 감지하던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이 녀석들은 한두 마리가 아니에요. 엄청나게 많아요.”
“뭐!?”
“도망치자!”
전요한이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자 채린은 그의 팔목을 붙잡고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방에서 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르케도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요. 위험합니다!”
“릴리스, 전부 처리해버릴 수는 없는 거야?”
“마력을 아껴두는 편이 좋아요. 이제 초입에 불과하니까요.”
릴리스는 정면돌파에 부정적인 의견이었다.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어두운 숲 속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돌아보자 황색 먼지로부터 수많은 골렘의 그림자들이 줄을 이루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