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72화 (172/180)

제172화. 원죄의 마녀 (4)

“…….”

그리젤다는 말없이 전요한을 바라봤다.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가득 쌓여 있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그녀에겐 나름의 사정이 있습니다. 너무 몰아세우지 말아 주세요.”

자세한 내막을 아는 시르케가 그리젤다의 앞으로 나섰다.

채린도 이제 어느 정도는 눈치챘는지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저 아이에게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마녀의 기운이 느껴져.’

한때 공포의 대상이었던 질투의 죄악 따윈 하찮게 여겨질 정도로 근원적인 존재감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죄의식이 생겨나고 마음의 어둠이 커져만 간다.

‘분명 일곱 죄악은 본래 하나의 뿌리로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했었어.’

자신을 세뇌하려 했던 메데이아로부터 얻은 정보였다.

저주받은 계보.

죄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 여인에게 도달한다.

원죄의 마녀, 릴리스.

그녀는 금지된 지식에 손을 댄 대가로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었고 언젠가 세상을 멸망시키리라 예언되었다.

만약 그리젤다가 릴리스와 관련 있다면 현 상황은 매우 위태롭다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여기에 모인 것은 릴리스의 계획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리젤다? 너의 생각을 듣고 싶어.”

전요한은 침착하게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섬뜩한 붉은빛에 휩싸여 있었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시련을 개방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그러니까 준비됐으면 시작할게.”

말을 마친 그리젤다가 다짜고짜 운석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붉은 섬광이 번뜩이며 주위를 일시에 집어삼켰다.

* *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시르케가 빛마법을 시전했다.

동굴 안이 환해지면서 일행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졌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지? 그리고 그리젤다는 어디로 가버린 거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채린이 의문을 표했다.

“그녀는 아마도 안전할 테니 시련의 정체부터 알아내는 편이 좋을 겁니다.”

시르케가 경계 어린 눈빛으로 동굴의 내부를 들여다봤다.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자 일행은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어둠 속에서 빛을 말하는 마물들의 눈을 보았다.

“개체 수가 많아! 신중하게 대응해야 할 것 같아!”

채린은 그렇게 외치며 마물들을 향해 빙결 마법을 시전했다.

마물들은 어둠 속에서 더 민첩해진 탓에 그 움직임을 제약할 수단이 필요했다.

“키오오오!”

달려들던 마물 중 일부가 공격을 피하고 채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윽!”

“너무 나서지마! 전위는 내가 지킬 테니까!”

전요한이 앞으로 나섰다.

녹티스가 푸른 빛을 발하며 마물들을 일도양단했다.

그러나 여전히 상당한 수의 마물들이 남아 있었다.

시르케가 화염 마법으로 후방원조를 시작했다.

콰아아앙!

진동음과 함께 동굴 내부가 여러 차례 크게 흔들린다.

"광역 마법은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자칫하면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어요."

시르케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악물었다. 그녀의 장기인 광역 마법 시전이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녀는 담청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마물들을 향해 화염 덩어리를 날렸다.

하지만 마물들은 그 수를 앞세워 계속해서 동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별수 없이 빛의 결계를 치자 밖에 있던 마물들은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것을 본 전요한이 검으로 마물들을 도륙하며 치고 나갔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마물들이 몰려오는 거지? 심부에 악마의 둥지라도 있나?”

“놈들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분명 뭔가 노리는 게 있을 거 같네요.”

시르케가 채린의 질문에 답하며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무작정 상대하는 것보다는 타개책을 마련하는 편이 생존률을 올릴 수 있었다.

“우선 이 동굴을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아. 입구 쪽이 더 가까운 모양이니까."

전요한이 푸른 검기를 날리며 말했다.

동굴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광역 마법을 시전해서 마물들을 한번에 해치울 수 있다.

시르케와 채린의 후방지원을 받으며 전요한은 힘겹게 길을 열기 시작했다.

“이런, 대체 얼마나 많이 몰려드는 거야!”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두 마리씩 처리하다간 날이 새겠군요.”

한동안을 고군분투한 끝에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오긴 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동굴 앞을 포위한 마물들이 앞에서 우글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광역스킬을 사용해서 입구 주위의 마물들을 한번에 소멸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동굴 안에서 그런 스킬을 쓰는 건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전요한은 어떻게든 입구 바로 직전까지 길을 개척해야했다.

“이런 일은 내게 맡겨줘!”

푸른 검기가 높이 들어 올려진 검끝의 가장자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전요한은 입구를 향해 녹티스를 내리꽂으며 외쳤다.

“비켜! 전부 다!”

푸른 검기가 지그재그로 바닥을 가르며 날아갔다.

바리게이트까지 뚫어버린 그 공격은 멈추지 않고 밖에 있던 마물 무리까지 덮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어서 밖으로 나가자!”

전요한이 다급하게 말하며 주변에 남은 마물들을 베어 넘겼다.

그 공격을 맞은 마물들이 불타 사라지면서 일시적으로 반원형의 공간이 생겼다.

“이제 제가 본격적으로 활약할 때로군요.”

시르케가 뒷걸음질 치는 마족들을 향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곧, 하늘에서 수많은 불덩어리들이 떨어져 지상을 덮쳤다.

동굴 앞을 가득 메운 마물들의 몸에 불이 옮겨 붙으면서 화염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놈들이 물러나고 있어! 우리가 전력으로 상대해서 겁먹은 걸까?”

도망치는 마물들을 바라보며 채린이 반색했다.

하지만 전요한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물러나는 게 아냐. 재정비하고 다시 덤비려는 거지.”

“재정비를 한다고?”

채린이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다.

그러자 시르케가 말없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건….”

그곳엔 여태까지 못 보던 형태의 마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눈을 빛내며 괴이한 울음소리를 냈다.

“고대 마물이야.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상처조차 입히기 어렵지.”

전생의 기억을 지닌 전요한은 그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저 녀석들이 활개 치는 중이란 건 여기가 신화시대의 무대란 의미와도 같다.

“그럼 어떻게 상대해야 해? 빙결 마법으로 발이라도 묶어두고 도망칠까?”

“도망치더라도 금방 따라잡힐 거야. 마물들은 밤에 더 재빠르니까.”

전요한은 채린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들의 후방 지원이 위력을 반감하면 혼자서 짊어져야 할 몫이 커진다.

자신의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이런 물량 공세에 계속 발목을 붙잡혀 있는 건 좋지 않았다.

수세에 몰려 있던 일행은 어두운 하늘 저편에서 한 줄기의 빛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은 지상에 닿자 주변의 모든 것을 뒤덮으며 계속해서 팽창해 나가기 시작했다.

전요한 일행도 그 섬광에 휩쓸려 웅크린 채 눈을 가렸다.

“뭐, 뭐야 이건!?”

“이렇게 광범위한 마법이라니, 심상치 않군요!”

채린과 시르케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섬광이 사라지자 일행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들의 앞에 있던 마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 엄청나다.”

“도대체 누가 이런 마법을.”

두 여인이 감탄하는 동안 전요한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곧 한 존재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누, 누구야! 정체를 밝혀!”

채린이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 질렀지만 그 존재는 말없이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자 시르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은발의 마녀!’

자신이 연구해온 고문서에 줄곧 기록되어 있던 존재였다.

직접 언급하는 걸 꺼릴 정도로 불길하게 여겨졌던 그녀는 본래 원죄의 마녀, 릴리스라고 불린다.

릴리스는 걸음을 멈춘 채 황금빛 눈으로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길게 기른 은발이 달빛에 은은하게 빛났다.

“저를 아시나요?”

“당신이 이곳엔 왜 나타난 겁니까? 시련을 내린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도와준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군요.”

시르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릴리스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외면하란 건가요? 그것도 저 때문에 휘말리게 된 건데요.”

“당신 때문에 휘말렸다고요?”

채린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단 반응을 보였다.

그녀를 위해 전요한은 상황을 간단히 정리했다.

“그럼 마물들이 노리던 건 바로 너였단 말이야?”

“네, 끈질기게 추격해 오더군요. 몇 번이나 해치웠는데도 포기할 줄을 몰라요.”

혼자서 얼마나 많은 고대 마물을 없애버렸다는 거지.

채린은 식은땀을 흘리며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웃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릴리스에게서 아무런 적의도 느껴지지 않자 전요한은 혼란을 느꼈다.

분명, 그녀는 이번 시련의 핵심적인 존재일 터.

본체가 아니라 환영에 불과할지라도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혹시 그녀는 아직 타락하지 않은 상태인 걸까?’

혼자서 황량한 대지를 떠돌아다니는 걸 보면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직후로 보인다.

자세한 건 그녀와 동행하면서 천천히 알아가기로 했다.

“그럼 당신은 혼자서 여행을 하고 있었던 건가요?”

"네, 아시다시피 저는 쫓기는 몸이니까요. 그리고 개인적인 일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순 없어요."

전요한의 질문에 릴리스가 답하며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아까부터 조용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르케가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일이란 게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잃어버린 제 기억을 찾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 마물들이 지키는 성유물을 하나 수소문하는 중이에요.”

릴리스는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기억을 소실한 상태였다.

그녀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진 모르겠지만, 지금 협공한다고 쉽게 당해줄 상대는 아니다.

“저희도 사정이 있어서 그런데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그쪽의 요구는 최대한 들어주겠습니다.”

“좋아요. 당신들이 저를 노리는 자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뭐, 어차피 혼자 다 해치울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걱정 없죠.”

전요한의 말에 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린은 눈을 깜박이며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젤다에게서 느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해.’

그녀의 힘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해 있었다.

게다가 원죄의 마녀와 이름이 똑같아서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다.

‘지금은 괜찮지만, 기억이 돌아오고 난 후엔 어떻게 변해버릴지 몰라.’

불안감을 키워가는 채린의 시선이 전요한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릴리스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해서 릴리스와의 불편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따금씩 출몰하는 마물들을 간단히 해치우며 이곳에 관해 이야기해줬다.

“여기는 신들에 의해 버림받은 대륙입니다.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인간이 저주받은 계보의 후예로 살아가는 곳이죠.”

사방이 유해한 유황과 잿더미로 가득했다.

도저히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 전요한은 혀를 내둘렀다.

“마물까지 들썩이는데 생존이 가능하긴 한 겁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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