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원죄의 마녀 (3)
유명학이 원하는 건 용사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었다.
어떠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구원하겠다는 의지.
그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이 발생하는 건 스스로가 납득해야 하는 일이다.
“어째서 대답이 없나? 지금쯤이라면 충분히 각오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유명학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전요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만일 그가 확고한 신념을 내비치지 않는다면, 운석의 위치에 대해 말해주지 않겠단 눈치다.
“솔직히 답변드리겠습니다. 저는 소중한 이들을 잃으면서까지 미지의 적과 맞서고 싶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전요한은 결국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했다.
거짓으로 답변한다고 한들,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유명학을 속이긴 어려울 터.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성과를 열거하며 충분한 자신감을 증명해내는 수밖엔 없었다.
“예상대로군. 역시 자네라면 어려움에 처한 동료들을 모른 척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네.”
양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유명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 후 다시 눈을 뜬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석이 안치된 장소를 안내해주겠네. 따라오게.”
조금 전까지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전요한은 의아해하며 유명학의 뒤를 따라나섰다.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나?’
불길하게 느껴지는 미래시는 아직 감지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예감이 드는 것도 아니다.
유명학은 무색무취의 인물.
철저히 중립을 지켜왔던 탓인지 그에게선 어떤 징조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네. 유일하게 여신의 선택을 받은, 진정한 구원자를 말이네.”
기다란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 유명학이 말했다.
그는 과거를 회고하며 자신이 준비해 왔던 일들을 하나씩 들려주었다.
“어쩌다 예언서를 우연히 얻게 되었을 때부터였지. 이 세상엔 주신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있고, 언제나 상위 차원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네. 그분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자질 있는 이능력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했지.”
하지만 최종적인 시련에 대비하기 위한 기준점을 충족하는 이는 없었다.
4성급의 여전사였던 멜리사도, 인류 최초로 5성급에 도달했던 카이젤도 언젠가 강림할 절대악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현재 그 기준점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전요한뿐.
그렇기에 무언가를 잃은 분노나 절망 따위로 타락하지 않는 무결점이길 바랐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어떠한 선택을 내리더라도 미련은 남을 테죠.”
전요한은 그것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소망임을 밝혔다.
경합의 시련에서 함께 했던 영웅들도 저마다의 고뇌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한 탓이다.
“그럴 테지. 과연 자네는 끝없는 절망 속에서 어떤 선택지를 고를지 궁금하군.”
가볍게 대꾸하던 유명학의 발걸음이 돌연 멈췄다.
푸른 마법석으로 이루어진 장벽이 눈앞에 있었다.
“이건?”
“재앙의 근원지를 원천 봉쇄하기 위한 수단이네. 자네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지.”
관리국 내부에서는 최상 등급의 보안이 요구되는 구역이었다.
이렇게까지 철저한 대비를 했다는 건, 다음 시련은 정말로 만만치 않다는 의미다.
“예언서에 이번 재앙의 내용도 기록되어 있었던 겁니까?”
“그렇다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없네.”
어쩌면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지구에 지옥도가 펼쳐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유명학은 최대한 성공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다.
“저기에 안치된 운석은 조금 곤란한 특성을 지니고 있네. 그래서 다른 요원들은 투입시킬 수 없는 대신 자네의 동료들을 불렀네.”
반대편의 통로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전요한은 익숙한 모습에 반색했다.
“다들 도와주러 온 거야?”
지금까지 함께 해왔던 이들이 전부 모인 건 아니었다.
채린, 시르케, 멜리사, 그리젤다.
네 명만이 유명학의 제안을 받고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
“상당히 곤란한 시련을 받았다고 하던데, 무사해서 다행이군요.”
대표자 격인 시르케가 앞으로 나와서 인사를 건넸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른 동료들의 모습을 차례로 훑었다.
“여긴 위험한데 따라와도 괜찮겠어, 그리젤다?”
“나도 가야만 해. 그러니까 말리지 말아줘.”
그리젤다는 평소와 답지 않게 매우 단호한 태도였다.
채린도, 멜리사도 이런 일엔 빠질 수 없단 듯이 확고한 의지를 내비친다.
“저번에 신세 진 은혜를 갚고 싶어. 더는 짐 덩어리가 되기 싫기도 하고.”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는 대재앙이라는데 제가 빠지면 서운하죠.”
그렇게 해서 새로운 공략조가 확정되었다.
유명학은 희미하게 웃은 후 이들을 내부로 들여보냈다.
“자네들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겠네. 부디 여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일행은 고개를 돌려 내부의 전경을 살펴봤다.
자연적인 정취가 느껴지는 숲.
관리국의 내부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여신의 권능이 느껴져.’
전요한은 어렵지 않게 이곳의 존재 이유를 간파할 수 있었다.
지구의 여신, 시스티나와 관련된 유물로 인해 내부 공간은 성역화된 상태다.
“아무래도 운석의 영향 때문은 아닌 것 같네요. 좀 더 살펴보도록 하죠.”
주위를 둘러보던 시르케가 발걸음을 부추겼다.
조그마한 오솔길을 따라가자, 이질적인 공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은폐 마법이군요. 본모습이 어떤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지팡이를 내리꽂은 시르케가 마법 영창을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암벽으로 둘러싸인 곳이 투명하게 걷히더니 장엄한 거목이 나타났다.
“나무?”
“신수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의 위용이군요.”
꼭대기를 올려다본 채린과 멜리사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한편, 그리젤다는 거목의 뒤편에 안치된 운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
운석은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전과 다르게 미묘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다.
즉, 시련에 먼저 도전하지 않아도 그것은 조만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섣불리 다가가지 마. 내가 직접 확인해볼게.”
모두가 지켜보게 한 후, 전요한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조심스럽게 운석에 손을 대자, 주위에 짙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저 너머에서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이자, 일행은 긴장한다.
“대체 누구일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조심하는 편이 좋겠어요.”
기분 나쁜 마기가 느껴지는 걸 보면 상위 악마종일 가능성이 큰 것 같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수많은 촉수들이 사방에서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멜리사!”
“알았어요!”
대검을 들어 올린 멜리사가 일거에 촉수들을 소멸시켰다.
불꽃이 사그라들자 안개 너머에 있는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재미있게도 악마종을 데리고 다니는군요. 그녀가 당신을 진심으로 따른다고 생각하십니까?”
뻔한 이간질이었다.
그런데 그리젤다는 그 말이 거슬렸는지 화가 나서 반박했다.
“아니야! 난 여기가 좋아!”
“지난날에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보세요, 그리젤다. 당신은 외톨이로 남겨졌기 때문에 살아남았던 거예요.”
녀석은 그리젤다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성공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다.
“외톨이는 싫어! 그때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콰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녀석도 미쳐 날뛰기 좋아진다.
본래 악마종은 심연에서 비롯한 존재라 무질서와 혼란을 잘 이용하는 탓이다.
“잘하고 있어요, 그리젤다. 어서 그자를 죽여 버리세요.”
“웃기지 마!”
그리젤다는 조금씩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로 바뀌어 갔다.
옆에서 달래봤지만 오래된 트라우마 탓인지 타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윽고 여기저기에 균열이 생겨나며 촉수와 사념체가 그로부터 튀어나왔다.
“죽어버려!”
사내의 실루엣을 향해 맹공을 퍼붓는 그리젤다.
그러나 저 너머에선 비웃음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고작 6등급 재앙이면서 뭘 할 수 있다는 건가요?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겨우 저와 대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젤다를 만만하게 여기다니.
확실히 쉽게 보지 못할 녀석인 것 같았다.
혹시 칠죄종인지 의구심이 들었으나 이 정도 거리에선 확인할 방법이 없다.
“넌 대체… 뭐야?”
왜곡된 공간을 통해 본능적으로 상대를 느꼈는지 그리젤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더는 좌시하기 어려웠기에 전요한은 일행과 함께 녀석을 향해 돌격했다.
“비범한 활약을 계속한다고 명망이 높더군요. 하지만 이번 시련은 이겨내지 못할 겁니다. 제가 개입하고 있는 한 말이죠.”
갑자기 나타나서 모두를 상대하는 걸 보면 정말 강적이다.
전력으로 맞붙어도 정체마저 파악하지 못해 혀를 내두르던 중, 후위에 있던 그리젤다가 비명을 질렀다.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시르케와 함께 기괴한 악마종들의 협공을 받는 상황.
왜곡된 공간 때문에 공격 패턴을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상황이 어수선해진 점을 이용하여 정체불명의 사내는 타이밍 좋게 인질을 잡았다.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 아이가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악마종들을 총동원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인 그리젤다를 사로잡은 것이다.
이대로라면 그 옆에 있는 시르케까지 위험해질 판이었기에 전요한은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것은…?”
유려한 움직임과 함께 녹티스가 쇄도하자 정체불명의 사내는 일순간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저번에 마왕으로 강림했던 카이젤을 쓰러뜨렸던 결전 스킬.
결전 스킬인 만큼 사내 또한 전력으로 상대해야 할 터였다.
“크윽…!”
암흑 결계를 펼쳐 최대한 버티려 했던 사내가 무쌍에 가까운 검격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녀석은 상처투성이가 된 채 한차례 높이 띄워진 후 바닥에 널브러졌다.
“나름 전략을 잘 세웠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군요. 그분이 좀 더 일찍 강림하셨더라면….”
녀석의 시선이 시르케의 보호를 받는 중인 그리젤다에게로 향했다.
뭔가 수작을 더 부릴 것 같아 다가가 숨통을 끊으려 할 때 현기증과 함께 정신이 아찔했다.
“으윽!”
아무래도 이 검술은 단기간에 자주 사용하면 심신상의 부담이 상당한 모양이다.
“오빠…!”
이상 증상을 파악한 그리젤다가 눈물을 아른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채린과 멜리사도 놀라서 접근해왔지만, 부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안심했다.
“그래도 별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군요.”
“네, 하지만 정말 위험했어요. 일어설 수 있겠어요?”
“아직 휴식이 더 필요한 것 같아. 정말 완전히 지쳐버려서.”
“뭐, 상관없겠죠. 당장의 위협 요소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짙은 안개는 여전히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전요한은 옆에 기대어 있는 그리젤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뭔가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기댄 채 내 옷자락만 잡고 있다.
“그리젤다.”
“으, 응?”
“이제 이야기해 주지 않을래?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그리젤다에게서 불길한 미래시가 비춰지고 있었다.
섬뜩한 붉은빛에 휩싸인 그녀를 보며 전요한은 표정을 굳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