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원죄의 마녀 (2)
번잡한 도심지의 한복판.
모두가 바쁘게 보도블록을 건너고, 사방에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아무런 위협 요소도 없어서 평화로운 세계.
하지만 은발 여인의 눈엔 그 모든 광경이 슬프게 느껴졌다.
“거짓된 세상, 거짓된 결말.”
최후의 전투에서 패배한 마신은 환영의 세계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나긴 유배의 시간을 보내오면서 그의 정체성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분에겐 알 권리가 있어.”
최초의 신족이 이런 곳에 마신을 가둬둔 이유는 그의 힘이 두려워서였다.
원죄의 마녀, 릴리스가 혼돈의 권능으로 일깨워낸 진정한 변혁자.
오직 그만이 무료한 세계에 종말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비록 이곳에서의 사소한 행복은 깨지고 말겠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알려야 했다.
여기를 발견하기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당장 마신을 깨어나게 하진 못하겠지만 분명 영향은 줄 것이다.
그녀는 이 기회를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분은 어디에….”
횡단보도에 멈춰 선 은발 여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심안으로 살핀 결과, 유난히 높은 고층 빌딩이 눈에 띄었다.
세계적인 기업의 본사.
만약 마신이 꿈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회장의 자리 정도는 되어야 격이 맞을 것 같았다.
타다다닥.
행인들의 이목도 신경 쓰지 않으며 은발 여인은 걸음을 재촉했다.
순식간에 고층 빌딩의 출입문까지 도달했고, 한 사내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어이, 멈춰! 여긴….”
설명을 하려던 사내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손짓 한 번에 두 동강 나버린 그를 뒤로한 채, 은발 여인이 맨손으로 출입문을 부쉈다.
차르르르!
두께가 상당하던 유리문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을 어지럽힌다.
이어서 경보음이 울렸으나 은발 여인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어서 찾아야 해.”
여긴 자신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었다.
마신의 의식에 의해 구현된 것인 만큼, 실제처럼 정교하고 스케일 또한 방대하다.
자칫하면 마신의 권속에 의해 발이 묶일지도 모른다.
“예상되는 위치는 가장 꼭대기 층.”
이것은 자신에게 시련을 내리기 위한 마탑과도 같다.
사명감을 느끼며 은발 여인은 덤벼드는 이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촤아아아악!
몇 차례의 피보라가 일었고 층계는 점차 높아져갔다.
중간 즈음에 이르렀을 무렵,
“대체 무슨 짓인가요? 당신은 이곳으로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백금발의 여기사가 일단의 무리와 함께 나타났다.
그녀를 본 은발 여인은 순간 질투심이 마음을 잠식하는 걸 느꼈다.
“…….”
이건 연인을 빼앗긴 악녀의 감정.
하지만 참고 견뎌냈다.
자신은 마신에게 선택받은 존재가 아니었기에.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무슨 볼일로 찾아온 건가요?”
백금발의 여기사는 선공을 해오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이, 화가 단단히 나 있다.
“회장님을 만나야 해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든요.”
결국, 은발 여인은 공격 의사를 철회한 후 접견을 요청했다.
그러자 백금발의 여기사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회장님은 지금 집필에 몰두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다음에 찾아오세요.”
집필이라니.
거짓된 세계에서 소설이라도 쓰고 있다는 건가.
잠시 말문이 막힌 은발 여인은 눈앞의 기사들을 천천히 관찰했다.
일대일로는 그나마 할 만한데, 이들 모두와 전면전을 펼쳤을 경우엔 승산을 가늠하기 어렵다.
“부탁이에요. 비록 꿈속이라지만 당신들과 싸우고 싶지 않아요.”
“꿈속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하는 말이 진지하게 들리지 않나 보죠?”
백금발의 여기사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을 본 은발 여인이 타이르는 어조로 다시 이야기를 계속한다.
“당신 또한 허상의 존재일 뿐이에요. 제 말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좋을 거예요.”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죠? 침입자 주제에 잘도 저를 기만하려 드는군요.”
“만약 제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어떻게 할 거죠? 당신들은 그저 그분을 가둬두기 위한 세계의 부속품일 뿐이라면요? 무엇보다 이런 시대에 무구를 갖춘 기사단이 존재한다는 게 이상하지는 않으신지요?”
이리스는 눈앞의 인물들을 향해 진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한자리에 있던 모두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허상에 불과하다고?!”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가짜에 불과하다니.”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저들로서는 지극히 신뢰도가 떨어지는 주장이었다.
증명할 방법 또한 조금 까다로웠기에 은발 여인은 곤란함을 느꼈다.
“딱 한 번.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분과의 접견뿐이에요. 부디 허락해 주시길….”
최후의 방법으로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여태까지처럼 무력행사를 했다가는 꼭대기 층에 닿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긴 탓이었다.
어비스의 관리자도 마신의 심상 세계에서는 그저 하나의 인형.
은발 여인이 애원하자 백금발의 여기사도 고민에 빠졌다.
“워, 원칙적으로는 안 되는데… 정 그렇다면 저와 동행하는 조건으로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단, 여기까지 오면서 벌인 일이 있으니 그냥은 돌려보내지 않을 겁니다.”
여전히 백금발의 여기사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은발 여인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요, 어차피 저는 도구일 뿐이니….”
문득 기묘하게 드는 자각이었다.
자신은 종말의 의지를 대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그렇기에 그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서는 존재의의를 찾을 수 없었다.
“엘레베이터를 이용하죠. 현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야 하니까요.”
백금발의 여기사가 뽐내듯이 버튼을 눌렀다.
본래 그녀는 이세계의 인물이었지만 과학 문명에 대한 이해도는 매우 높고, 위화감도 없는 상태였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채, 디지털 시계를 바라보던 은발 여인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여긴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군요.”
얼마 전에 있었던 지구와 비교하면 대략 10배 정도가 느렸다.
그 말은, 여기에 존재하는 모두의 관점에서 생각보다 세월이 흐르지 않았으리란 의미다.
중요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백금발의 여기사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정말이지, 외국으로 추방되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요. 릴리스?”
여비서와의 대화는 여러 면에서 소모적이었다.
은발 여인이 입을 닫고 있는 동안, 그녀들은 마지막 층계를 향해 점차 가까워져 갔다.
티잉.
곧이어 열리는 출입문.
눈앞에 펼쳐진 공간을 본 은발 여인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마신님께서 왜 이런 곳에….”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이 업무를 본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정적인 장소다.
“요새 좋은 영감이 떠오른다고, 제게 자주 업무를 맡기십니다.”
잔뜩 삐친 표정의 여기사는 일러바치는 어투였다.
그녀의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은발 여인은, 무언가를 빼곡이 적어나가고 있는 백발의 사내를 발견했다.
“…….”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
하지만 이렇게라도 직접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은발 여인이 한참이나 백발의 사내를 쳐다보고 있자,
“흠흠, 회장님.”
백금발의 여기사가 헛기침을 하며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공손한 방식이었는데,
“이쪽을 좀 보세요, 제발!”
꿈적도 안 하고 집필에만 열중하자 말투가 점차 거칠어진다.
“으음…?”
마침내,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소설을 써 내려가는 중엔 누군가가 불러도 잘 대답하지 못한다고 한다.
“후우, 정말이지….”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한숨을 내쉬는 여기사.
그녀가 열을 낼 동안 은발 여인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무슨 일이지?”
곧이어 들려오는 근엄한 목소리.
상체를 일으킨 백발 사내가 은발 여인을 빤하니 쳐다봤다.
“너는….”
뭔가 표정이 그의 불완전한 기억을 암시해준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어요, 주인님. 그리고 죄송해요. 다시 무거운 짐을 다시 짊어지게 해드려서….”
은발 여인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윽고 그녀가 다가오자, 백발 사내는 완전히 펜을 멈췄다.
“말투가 왜 그렇지? 너는 처음부터 나를 애인처럼 부르지 않았나?”
한동안 은발 여인을 향해 머물러 있던 시선이 이내 창밖으로 향한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세계.
그런 곳에서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신족은 모두 자멸했고, 이후에 펼쳐진 인간의 세계는 어떤 혼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저는 당신의 의지를 잇기 위해 창조된 인형, 이리스입니다.”
“이리스? 릴리스와 느낌이 비슷하긴 해도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저는 릴리스를 복제하여 그녀와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으시다면, 이것을 봐주세요.”
백발 사내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자, 이리스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이후 조금씩 풀려나가는 그녀의 검은 안대.
완전히 베일을 벗은 얼굴은 릴리스 그 자체였다.
“…흥미롭군.”
이로써 백발 사내는 자신의 기억이 실제와 맞지 않음을 확인했다.
만약 기억상의 오류가 없다면 릴리스는 오로지 하나여야만 했으니까.
원죄의 마녀를 위화감 없이 복제해 낸다는 건 지고한 권능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렌시아, 릴리스는 국외로 추방된 후 되돌아오지 않은 게 확실하나?”
“네. 그녀가 세계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기사들을 은밀히 붙여두었습니다.”
만약 릴리스가 귀환했다면 그들로부터 어떤 통보가 왔을 터다.
확인해본 결과, 실제로 그녀는 어떤 섬에 들어간 후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원죄의 마녀를 배척하는 건가요? 그녀는 당신의 오래된 꿈을 이루어주려 했습니다.”
“그건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신족들은 전부 멸망했으니까, 더는 세계가 혼란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지.”
그런데 실은 모든 게 거짓된 결말에 불과하였다.
최초의 신족 중에 가장 어렸던 여자아이가 살아남았고, 그녀는 자신을 봉인하여 오랜 잠에 가둬두었다.
백발 사내가 이를 갈자 이리스는 공손한 자세로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이제부터는 달라질 것입니다. 모든 게 환영에 불과함을 깨달으셨으니 이곳을 탈출하는 것도 시간문제고요.”
악몽에서 깨어나 세계에 진정한 종말을 가져다줄 차례였다.
백발 사내는 자신이 써내려 왔던 소설을 찢어버렸고, 이리스는 만족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동안 저희를 기만해왔던 최초의 신족에게 벌을 내리시지요, 카인 님.”
* * *
“갑자기 면담을 요청하다니. 의외로군, 요한 군.”
관리국 국장, 유명학은 마주앉아 있는 흑발 청년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예전에 비해 확실히 성장한 부분이 돋보이고, 배후의 알 수 없는 휘광도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제가 찾아온 이유를 알 텐데요, 국장님? 첫 번째 운석은 어디에 있습니까?”
잡담할 시간조차 아까운지 전요한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관측된 이세계의 잔해물.
불시착한 순서대로 활성화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분명 그것이 문제를 일으킬 차례였다.
“궁금한가? 여차하면 알려줄 수도 있네만, 그전에 한 가지 답변을 해주었으면 하네.”
대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임에도, 유명학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그의 입이 다시금 천천히 움직였다.
“자네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