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원죄의 마녀 (1)
“크헉!”
뜻밖의 부상을 입은 이의민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전요한은 절묘한 순간에 개입한 장본인을 쳐다봤다.
“…….”
이성계.
그는 신궁을 들어 올린 채 멀리 있는 이의민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크아아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충헌이 지면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장검을 들어 올렸다.
이후 이의민의 심장부가 보기 좋게 관통당했고 어둑한 색채의 혈액이 최충헌의 얼굴에 튀었다.
“최…충헌!”
하지만 혼자서 외롭게 떠날 이의민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다해 최충헌의 머리를 비틀었고 곧바로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
최충헌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무신정변 이후 맨손으로 고려 의종의 척추를 부러뜨린 괴력의 소유자.
눈앞의 적이 제압당한 이후에야 이의민은 비로소 눈을 감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정말 잘하셨습니다, 주군.”
뒤얽힌 채 바닥에 널브러진 이의민과 최충헌을 보며 정도전이 이성계를 칭찬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대꾸하지 않았고 대신 이쪽을 쳐다봤다.
“처음부터 둘이서 동귀어진하는 결말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가?”
갑자기 정곡을 찔리니 조금 뜨끔하긴 하다.
아무도 개입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든 후 이의민이 방심할 때를 노린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이었으니 굳이 부정하진 않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아니면 달리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자네는 정말 이 사람과 많이 닮았군. 같이 동업해도 되겠어.”
이성계는 손가락을 들어 옆에 있는 정도전을 가리켰다.
정도전은 혹여 자신이 심기를 건드렸나 눈치를 보다가, 들고 있던 사인참사검을 허리 뒤로 숨겼다.
“어쨌거나, 우리 모두의 진심을 알아볼 수 있어서 좋은 무대였네. 다들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보세.”
주위를 둘러본 최영이 먼저 훈훈한 분위기를 유도했다.
불협화음을 내던 무인 시대의 인물들이 막 사라진 터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한민족의 영웅들이 서로 덕담을 나누는 동안 전요한은 정도전에게 다가갔다.
“어르신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당장의 곤경은 면했지만 이대로 해산하는 건 성급한 판단 같군. 우선은 이야기를 더 해보세나.”
“아직 옥새의 주인이 가려지지 않았는데, 진전이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언제나 이렇듯 이해관계에 있어서 합치하는 건 아니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않나?”
예상대로 정도전은 현실적이면서도 진취적이었다.
그는 상성상 불리한 인물인 태종 이방원과 갈등을 빚는 중인 데다 당장 주군의 마음조차 돌리지 못하고 있다.
사정을 아는 전요한이었기에 은밀히 한 가지 제안을 해보았다.
“저와 좀 더 가까이 지내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옥새는 드릴 생각이 없지만 여러모로 편의를 봐드리죠.”
“어떤 편의를 말하는 겐가?”
“어르신께서 지금 가장 필요로 하시는 명분, 제가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현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는 건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반드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련해 준다면 그는 위기에 처한 후손들을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뜻밖의 제의를 건네자 정도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후 그는 속삭이듯 이후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러한 상황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 어떤 식으로?”
“아직 말씀은 못 드립니다만, 조만간 알게 될 것입니다.”
“…좋네. 가능한 선에서 협력을 하도록 하지.”
이로써 정도전은 전요한의 편이 되었다.
정몽주가 아닌, 그를 선택한 이유는 혁명가로서의 기질이 여러모로 도움이 되리라 판단한 까닭이다.
물론 결코 만만하게 볼 인물이 아니었기에 방심은 하지 않는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부디 사인참사검은 잘 간직하고 계시고요.”
타락한 영령을 상대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유물이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잃어서는 곤란하다.
말을 마친 전요한이 한민족의 영웅들을 불러모으려 할 때였다.
“이번에도 시련을 통과하셨군요. 쉽지 않았을 텐데, 그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허공에 검은 틈이 생겨나더니 은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훼방이라도 놓으려고 온 겁니까? 안타깝지만 운석의 시련은 이미 끝난 상태입니다.”
헛수작질 부리지 말라며 전요한은 손사래를 쳤다.
주위의 영웅들도 은발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웅성거리며 이를 간다.
“물론, 이번 침식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두 번이나 남아 있죠.”
은발 여인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말한 두 번의 기회란, 한반도에 있는 운석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쉴 틈을 주지 않겠단 겁니까? 정말이지 골치 아프군요.”
“중반부를 넘어선 만큼 난이도는 기대해도 좋습니다. 특별히 이들 중 한 명을 배후자로 선택할 기회를 드리지요.”
은발 여인은 몸을 돌린 후 어리둥절해하는 영웅들을 가리켰다.
멜리사도 이해가 잘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배후자라니, 다음 시련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단 건가요?”
맥락만 놓고 보면 그렇게 해석하는 편이 적절했다.
정답이었는지 은발 여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기왕이면 업을 지닌 존재와 함께 하는 편이 침식 속도를 진전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은발 여인이 호의를 베푸는 이유는 운석의 특성과 관련 있었다.
사멸한 신들의 원념은 특별한 자질을 지닌 대상에게 반응한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영웅이 가호를 내려준다면, 운석에 의한 재앙의 발생속도가 빨라지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재앙의 씨앗을 애초에 싹트지 못하게 하면 문제 될 것은 없겠지.’
잠시 고뇌하던 전요한은 기회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선택을 하겠습니다.”
그가 배후자로 고른 한민족의 영웅은 다름 아닌 정도전이었다.
“아니, 왜 무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를….”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재미없게 되었군. 내가 제대로 활약해줄 수 있는데.”
선택받지 못한 영웅들은 한결같이 아쉬운 표정이었다.
정도전도 놀란 듯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자네, 진심인가? 다른 자의 조력을 받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네.”
“아니요, 어르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음 무대는 한반도가 될 테니까요.”
전요한은 자신감 있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은발 여인을 향해 선전포고하듯 검지를 내밀었다.
“당신이야말로 각오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이 세계를 멸망시키겠단 그 의지, 확실하게 꺾어줄 테니까요.”
* * *
“으음…”
은근한 뒤척임과 함께 시르케는 잠에서 깨어났다.
밤새 연구에 골몰한 나머지 책상에 엎드린 채였다.
“무언가 꿈을 꾼 거 같은데.”
아득할 정도로 오래된 추억의 단편이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내용.
관자놀이를 검지로 짚으며 시르케는 천장을 바라봤다.
“전생의 과거라도 본 건지.”
예로부터 윤회를 반복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확신하고 있다.
전요한을 보더라도 「업의 전승」이란 가호를 받아서 불사조의 화신이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자신 또한 그런 식의 반복되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어? 그건 네 자신이 남겨놓은 기록이야.”
돌연 뒤쪽으로부터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시르케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젤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전생의 이야기를 언급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비밀리에 연구해온 것들을 어떻게 그녀가 알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탓이었다.
“나는 알 수 있어. 왜냐하면, 그건 나의 본체와 관련된 이야기니까.”
그리젤다는 왠지 모르게 슬픈 모습이었다.
위험하다며 전요한에 의해 남겨진 그녀는 얼마 전부터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본체라니? 그럼 지금 당신이 릴리스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시르케는 적잖이 당황했다.
원죄의 마녀.
금지된 지식에 손을 댄 결과 신들의 저주를 받고 낙원에서 추방당한 악녀였다.
이후엔 신들의 세계를 멸하고 새로운 창세기의 주인공이 되고자 죄악의 세력을 키워나갔었지.
그런 존재가 눈앞의 작은 아이와 의식을 공유한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세 번째 시련까지 열리고 나면 내 본체도 오랜 구속으로부터 해방될 거야.”
그리젤다는 최종적인 배후자인 릴리스의 재림을 예고했다.
그리고는 시르케가 펼쳐놓은 고문서들의 주요 대목을 천천히 해독해주기 시작했다.
“전생의 네가 이걸 남긴 이유는 릴리스가 강림했을 때의 대책이 한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야.”
원죄의 마녀는 혼자서도 지구를 가볍게 날려버릴 만한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지구뿐만 아니라, 어떤 이세계의 행성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파괴행위를 피하진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시르케는 윤회를 거듭해오면서 구체적인 대책을 기록으로 남겨온 것이다.
비록 그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고문서들의 존재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니, 충격적이군요.”
“지금의 너라면 해낼 수 있어. 전요한이 최후의 승부를 내기 위해 필요한 마법진을 완성하는 거야.”
현세에 강림한 릴리스를 일시적으로 속박하고, 전요한에게 모든 걸 몰아줄 수 있는 비책이었다.
그리젤다가 차분하게 설명하자 시르케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왜 본체인 릴리스를 소멸시키려고 하는 겁니까? 만약 계획이 성공하면 당신도….”
“얼마 전에 깨달았어. 죽음이야말로 내게 허락된 유일한 구원이라는 것을.”
그리젤다는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역할을 말했다.
릴리스의 순수한 인격으로 남겨진, 어린 악마종.
그녀가 세상에 안배된 이유는 본체가 강림했을 때, 불사조의 화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함이었다.
오직 불사조의 화신만이 원죄의 죄악을 정화하여 소멸시킬 수 있었으므로.
태초의 신족인 시스티나가 그에게 만악을 멸할 유일한 수단을 부여했으므로.
하지만 그리젤다는 릴리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행동할 것이었다.
“전요한은 모든 걸 포기했던 내게 구원의 손을 뻗어줬어. 그 덕분에 다시 한번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고, 작은 꿈을 꿀 수 있었어.”
그것은 한 여름밤의 선잠처럼 달콤하고 짧았다.
천계에 봉인되어 있던 본체의 의식이 반쯤 깨어나자, 공유되는 기억에 의해 모든 진실을 깨닫고 말았다.
“후우, 정말이지 골치 아픈 이야기를 들어버렸군요.”
스스로를 희생하려는 그리젤다를 향해 시르케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일어선 다음 그녀의 앞에 양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분명, 원죄의 마녀를 쓰러뜨리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당신이 반드시 불행해져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잘못된 건 본체인 릴리스일 뿐, 그리젤다에겐 아무런 죄가 없다.
만약 그녀가 희생된다면 전요한도 결코 그 사실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시르케는 어떻게든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해왔던 미래니까 말이다.
“나를 위해 신경 써주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해줘.”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그리젤다가 약지를 내밀었다.
그녀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치기 위해 시르케와 눈을 마주 봤다.
“만약 모든 계획이 실패하고 예정된 대로 양자택일의 순간이 온다면, 주저하지 말고 나를 죽여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