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68화 (168/180)

제168화. 경합의 시련 (8)

강화파츠를 착용한 베네거의 모습은 흡사 의인화된 함선 같아서 제법 위압감이 있었다.

강화된 본체의 주포(主砲)는 파괴력도 괜찮으니 장거리 요격용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슬슬 옥새 수호의 역할을 다른 동료에게 넘겨야겠군.’

여태까진 전요한이 중앙부의 옥새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경합의 일등석도 차지해야 하고 당장 사로잡아야 할 인물도 있다.

“멜리사, 저 대신 유물들을 잘 부탁합니다.”

“네? 대체 뭘 하시려고요?”

“군세 동원은 두 군주에게 맡기고 우선 기선 제압부터 하려 합니다.”

현시점에서 전요한의 전투력은 결코 낮지 않았다.

동료들까지 데리고 있는데도 시대에 뒤떨어진 유목 민족의 군세에 기가 죽는다면 그건 단순히 자격 미달을 의미할 뿐.

중과부적이란 말은 이런 상황에선 적용되지 않는다.

“결국은 자네도 우리와 함께 최전선에 서는군.”

“긴박한 상황이니 뒤를 봐주진 않을 것이다. 알아서 살아남도록.”

홀연히 걸어오자 최영과 척준경이 전요한을 반겼다.

두 영웅도 현생자가 아니다 보니 이런저런 제약을 받고 있다.

무위를 떨치는 데 있어서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두 분과 나란히 전장에 서 보겠습니까?”

“입에 발린 말은 그만하고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세.”

“머릿속으로는 온갖 계획을 꾸미면서 겸손한 척하긴.”

최영과 척준경은 이런 상황에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만큼 둘의 기백은 대단했고 이에 감화받았는지 조금 뒤에 있던 견훤과 계백도 앞으로 나왔다.

“내게도 함께 나란히 싸울 명예를 주시게. 일찍이 협조한다고는 했으나 혹시나 해서 정황을 좀 더 지켜보고 있었네.”

“그대들의 기개가 이러한데 어찌 합심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 순간만큼은 나 계백도 출신과 국가를 잊고 오로지 외적을 향해서만 검을 휘두르겠소.”

민족의 자부심이 강한 누군가에겐 감명 깊을 수도 있는 장면이다.

좀 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신라의 무장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사실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민족적인 색채가 강할 뿐이지 이들의 행동은 숙연함 그 자체.

오랜 세월의 흐름으로 그 위명은 비록 빛이 바랬으나 그 마음만은 여전히 한결같았다.

「‘권력의 꽃, 기황후’가 졸장부들의 신파극에 코웃음을 칩니다.」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얼음장을 쏟아붓는 한 여인.

그녀가 존재감을 드러낸 건 무력 충돌이 임박했음을 의미했다.

* * *

달그락. 달그락.

말발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기마 부대의 찌를 듯한 기세가 온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운 감정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역동적인 전장의 현장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렸고 이에 반응하듯 녹티스가 검푸른 마기를 불태웠다.

콰아아앙!

허공에서 소환된 환영검이 전장의 한복판에 꽂히며 원형의 경계를 생성한다.

이에 놀란 원나라의 정예 기마병들이 돌격해오는 속도를 늦췄으나 그걸로는 만족하기 어려웠다.

살의를 품은 채 고개를 들자 무형의 기세가 발산되는 느낌과 함께 주위에 서슬 퍼런 위압감이 형성된다.

이로 인해 말들이 혼비백산하며 최전방에 있던 기마병들이 대거 낙마했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역전되었다.

「‘권력의 꽃, 기황후’가 뜻밖의 이변에 놀라서 입을 벌립니다.」

기선 제압을 확실히 하자 아연실색하는 기황후.

그녀는 궁중 암투엔 능할지 몰라도 군세를 부리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콰드드득!

지면에 녹티스를 내리꽂자 한기 어린 검기가 굽이치듯 여러 갈래로 나아간다.

만개하는 혹한.

얼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룬 마법을 응용하여 하나의 검술처럼 구현했다.

“으아아악!”

“모, 몸이!”

순식간에 신체가 얼어붙은 기마병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상당수는 비명도 질러보기 전에 군마와 함께 얼음 조각상이 되었고 말이다.

“적군의 기세가 확실히 꺾였군. 지금 진격하면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네!”

승리를 확신한 최영이 가장 먼저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최전선의 다른 영웅들도 가세했고 배후에선 새로운 군세가 일어나고 있었다.

“너희들의 가주로서 명하니, 외적을 한 놈도 남김없이 처단하라.”

이성계가 전어도를 들어 올리자 차원문이 생겨나며 무장한 기병들이 튀어나왔다.

가별초(家別抄).

조선 전기까지 이성계 가문의 사병 집단이었던 이들은 수많은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친 정예였다.

“나, 고려의 31대 군주는 여전히 서북녘 국경 너머에 있는 선조들의 평원을 염원하노라.”

공민왕이 애절하게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자 이번엔 고려의 깃발을 든 병사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요동 정벌군.

공민왕의 개혁 정책 중 가장 극적이었던 사건이 바로 이들에 의한 요동성 탈환이다.

비록 끝내 지키지 못하고 물러나긴 했으나 당시의 요동 정벌군은 공민왕의 군세로서 그 격이 충분했다.

“…….”

공민왕의 요동 정벌군을 보자 옛 기억이 떠오르는지 이성계가 눈빛을 가라앉혔다.

생전에 저들과 함께 무공을 세웠던 그였고 그땐 왕위 찬탈과 국정 운영에 대한 번민은 없었을 것이다.

“주군, 소신이 그토록 고대하던 요동 정벌군이옵니다. 고려의 군사이긴 하나 이때가 아니면 언제 쾌거를 이루겠습니까.”

감격한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출격을 촉구했다.

이성계는 그런 정도전을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자신의 군마 위에 올라탔다.

“삼봉은 여기에서 그대의 군주가 무장으로 활약하는 걸 지켜보라.”

왕자의 난으로 세자와 함께 허망하게 보내버린 최측근 신하였다.

자신 또한 명나라 황제에게 여러 차례 굴욕을 당하면서 마음속으로 벼르고 있던 영토였다.

조선의 창업 군주가 되고 나서도 공민왕을 이따금 그리워했던 그였다.

이리하여 두 군세가 아무런 위화감 없이 뒤섞이자 전요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아무리 눈앞에 외적이 있다고 해도 정적끼리 한마음이 되어 싸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내심 조마조마했는데 정몽주와 정도전이 중간 다리 역할을 잘 해주었다.

「‘행영대원수, 윤관’이 요동 정벌군의 활약을 흡족하게 바라봅니다.」

「‘감문위상장군, 김윤후’가 외적과 맞서 싸우는 군사들을 독려합니다.」

민족적인 색채가 강한 무대이다 보니 고려의 무장들이 여럿 참관을 하고 있다.

한껏 쇄신된 분위기로 한민족의 군세가 원나라의 기마 부대를 휩쓰는 것을 보며 전요한은 흡족하게 웃었다.

「‘권력의 꽃, 기황후’가 이를 갈며 철군을 명령합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진 것을 직감한 기황후는 후일을 도모하려 했다.

하지만 퇴로는 없다.

일찍이 원나라의 기마 부대는 밀려오던 죄악의 군세를 상대했었고, 이를 정리하지 않은 채 이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던 탓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저들은 어느 쪽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사이에 낀 격이 되었다.

“번거롭게 생포할 필요 없다! 전부 쓸어버려라!”

“전력으로 분골쇄신해서 모두가 역사의 한을 씻자!”

최전선을 끝까지 지키는 최영과 견훤이 군사들의 사기를 하늘 높이 끌어올렸다.

나머지 영웅들 또한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대의를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저들끼리 지리멸렬하게 만들 수도 있겠군요. 그 편이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베네거가 흑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전요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탐욕을 부리다가 신망을 잃을 수 있습니다. 딱히 옥새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지금은 한민족의 영웅들이 필요할 때였다.

흑화했던 홍륜이나 비담 같은 자들이라면 모를까, 저들은 구심점만 잘 유지되면 결코 신념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노국 대장 공주, 왕가진’이 말없이 무대를 지켜봅니다.」

전장이 서서히 정리되어 갈 무렵, 한 영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가진(王佳珍).

공민왕이 손수 지어준 노국 대장 공주의 고려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공민왕의 아름다운 보배였던 그녀는 사후 본의 아니게 고려의 명운이 다하는 계기가 된다.

“으음….”

노국 대장 공주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녀라는 존재가 한창 대의에 불타오르는 공민왕의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노국 대장 공주는 조용히 지켜만 볼 뿐, 생전의 연인인 공민왕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후 공민왕이 폐인이 되어 국정을 소홀히 하고 민심과 멀어진 끝에 시해되었음을 염두에 두는 모양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인연이로다. 어찌 저렇게 멀리서 바라만 본단 말인가.”

널브러진 주검으로부터 장검을 빼내던 견훤이 끝내 탄식했다.

한편, 옆에서 검신의 혈흔을 털어내는 계백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언젠가는 서로 만나게 될 것이오. 다만,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이 크겠지.”

마치 공민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

계백이 애석해진 견훤은 위로하려다가 결국 손을 거뒀다.

“우리 모두가 지금은 사사로운 인연에 집착해선 안 될 것이네. 이제 그만 다시 싸우세.”

그렇게 해서 영웅들의 유대감은 한층 깊어졌다.

저편에서는 이성계가 고려의 요동 정벌군과 함께 말을 달렸고 최영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의민과 최충헌이 다투고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볼만한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모두의 동태를 살핀 전요한은 아까 붙잡은 인물을 무릎 꿇렸다.

“사, 살려주시오. 제발….”

기철.

한민족의 영웅들을 위한 무대에서 혼란을 일으킨 죄인이 그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 * *

기철을 숙청하고 전장을 완전히 정리한 후였다.

일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곧 소란이 일었다.

이의민과 최충헌.

명이 끈질긴 두 인물은 다시 투덕거리더니 어느덧 승패의 기로에 서 있었다.

“헉헉… 세상에 이런 악연이 따로 없구나, 이놈…”

“슬슬 결판을 내자, 이 빌어먹을 금강야차야.”

최충헌은 흑화한 이의민의 기세에 눌려 줄곧 도망만 쳤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독기를 품고 맞서 싸웠다.

“저들은 어떻게 할 셈인가? 무대 진행도 사실상 끝났으니 수습을 해야 하지 않겠나.”

보기에 썩 좋지 않았는지 정몽주가 중재를 요청해왔다.

전요한은 고개를 저어 보인 후 이유를 설명했다.

“이대로 무대를 마치면 흑화한 이의민은 다시 문젯거리가 됩니다. 그러니 저 둘이서 해결하도록 놔둬야 합니다.”

최충헌의 편을 들어준다거나 해서 이의민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는 건 절대 금물이다.

아직 최후의 보복 수단인 업화의 겁박이 남아 있는 탓이다.

“확실히 이의민은 일전의 홍륜이나 비담과는 달리 흑화의 진전 속도가 빠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일을 벌일 수 있어.”

정도전도 같은 생각임을 밝히며 방관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자 다른 영웅들 역시 나서지 않고 잠자코 결과를 지켜봤다.

푸욱!

서로 악담을 퍼붓다가 다시 여러 차례의 합을 겨루던 도중, 최충헌이 틈을 보인 탓에 어깨를 찔렸다.

이에 이의민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검신을 더 깊게 박아 넣으며 입을 열었다.

“생전의 업을 포기한 내게는 아무리 용을 써도 맞서기 어려운 모양이지? 하긴, 고작 매 한 마리 빼앗겼다고 칼부림을 해댄 졸장부가 어련하시겠어?”

최충헌이 듣기에는 분기가 치밀 만한 조롱이다.

예상대로 최충헌은 얼굴이 붉어지며 이의민의 얼굴에 침을 퉤 하고 내뱉었다.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이긴 것이 그렇게 기분 좋더냐. 그래, 한번 죽여 보거라. 그리고 영원히 업화의 불길에 휩싸여 고통받아라.”

이 또한 자신이 받은 조롱에 결코 뒤지지 않는 저주다.

순간 이의민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으나 이내 다시금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당장 너를 베는 것으로 족하다. 그다음은 나중에 생각해봐도 안 늦을 테고… 아무튼 단단히 각오하거라.”

생전에 굴욕을 당한 이의민이니 최충헌을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괴물 같은 완력으로 최충헌의 골격을 망가뜨리려 할 때였다.

푸욱!

돌연 누군가가 개입해서 이의민의 배후를 급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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