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경합의 시련 (7)
몰려온 죄악의 군세로 인해 주위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영웅들은 제자리를 지키며 제법 선전했고 피해도 크지 않았다.
“크허헉!”
이따금씩 쓰러져 죽는 자들은 역사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 조금씩 떠올릴 법한 간신배, 혹은 반역자.
따라서 전요한은 그들에겐 별로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난이도가 좀 높은 것 아니에요? 이러다 우리도 조만간 사상자가 발생하겠어요!”
끝이 보이질 않는 전투에 멜리사가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전요한도 시련에 도전할 수만 있을 뿐, 난이도가 높다고 왈가왈부하긴 어렵다.
“조금 더 분전하세요. 이런 형세가 언제까지고 유지되진 않을 겁니다.”
이야기의 격이 높아질수록 영웅들의 활약상도 빛을 발할 터다.
그러다 보면 돌파구도 생겨나겠지.
“과연 단기간에 고속 성장을 하신 이유가 있군요. 매번 이런 식이면 정말 제대로 구르셨겠습니다.”
조금 무책임하다 여겼는지 베네거가 전요한을 비꼬았다.
녀석은 자신의 외장형 강화파츠로 화력을 퍼부으며 죄악의 군세를 물리치고 있었다.
“…근데 무슨 현대판 히어로야? 이대로 계약서 쓰고 마블 영화에 등장해도 되겠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여러 개의 강화 파츠에 한나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마법공학 소총을 쏘고 있어서 이따금 사선을 가로막아대며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들이 심히 거슬리는 모양이다.
“실은 은밀히 제안이 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비슷한 컨셉의 히어로도 있어서 거절했죠.”
“…누군지 알 거 같네. 최근에 은퇴한 그 사람.”
한나는 비교라도 할 셈인지 로건 베네거를 흘끗 쳐다봤다.
확실히 오버 테크놀로지 같은 느낌이 비슷하긴 한데 외형은 다르다.
마치 무기란 무기는 한데 뭉친 것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조금 조잡해 보였다.
“뭐, 도움은 되니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저 강화 파츠라는 것도 몬스터들을 제법 잘 요격하고요.”
한차례 대검을 휘두른 멜리사가 공백이 생겨난 틈을 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강화 파츠의 위력은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소형 드론처럼 비행하며 강력한 마공포를 쏴대는 모습에선 어렸을 때 즐겨했던 전략 게임의 우주전함이 떠오를 정도였다.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긴 했구나. 언제 시간이 있으면 이 시대의 선진 문물에 대한 서적들을 좀 읽어 봐야겠다.”
옛날 사람인 정도전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가 무구로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인참사검.
몰려오는 죄악의 군세를 무찌르기엔 적합하나 로건 알렌의 무기가 신기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삼봉, 관심이 있다면 연구해서 언제 한번 저런 거 만들어주게.”
이성계도 내심 마음에 들었는지 신궁을 쏘면서 정도전을 부추긴다.
생전에 그는 살촉에 커다란 호각이 달린 화살을 애용했다.
대초명적(大哨鳴鏑).
살촉이 무겁고 살대도 길어서 어지간한 이는 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전하.”
이성계의 마니악한 취미를 익히 알고 있는 정도전은 평소의 간언조차 하지 않았다.
그도 베네거의 강화파츠가 전략적으로 쓸 만하다 여긴 것이리라.
‘프리메이든 사의 최신 기술이라면 아마도 양산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들의 활약에 지지 않기 위해 전요한은 녹티스의 능력을 이끌어내기로 했다.
콰드드득!
이후 지면에 녹티스를 내리꽂자 한기 어린 검기가 굽이치듯 여러 갈래로 나아간다.
[만개하는 혹한].
빙결 마법의 일종으로, 룬을 이용해서 검술의 형태로 활용한 것이었다.
“이건… 대체 뭐야? 처음 보는 기술인데.”
일순간에 얼어붙어 버린 몬스터들을 보며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순히 위력이 대단해서라기보단 스킬이 발동했을 때의 마력을 느낀 탓이다.
“제 무구가 지닌 능력입니다. 룬 마법과 연계하여 그와 관련된 기술을 사용할 수 있죠.”
“대단한 물건이네. 어떻게 보면 마검사의 전용장비라고 할 수도 있겠네?”
한나 앨리슨은 프리메이든 사의 장녀 아니랄까 봐 다시금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녹티스는 최상급의 위장 효과가 적용되어 있는 유물이라서 그녀의 눈엔 평범하게 보일 것이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단지, 저도 최근에서야 다룰 수 있게 된 능력이라 써볼 기회가 거의 없었죠.”
“흐음, 어쨌거나 대단한걸? 여러모로 저기서 활약하는 너희 나라의 영웅들 못지않아.”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가볍게 도륙한 한나의 시선이 최전방으로 향했다.
그 적진의 한복판에선 최영과 척준경이 각자의 무구를 휘두르며 맹위를 떨치고 있다.
“경합의 일등석은 제가 차지할 겁니다. 안 그러면 옥새 가지고 또 다툼이 일어날 테니까요.”
이번 무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한민족의 영웅들이 결속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현생자인 자신이 구심점이 되어 그들을 조율해야 했다.
딱히 숨길 것도 없는 계획에 저만치 있던 정몽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시대의 대의를 내세우겠단 것이로군. 듣기에 나쁘지 아니하네.”
정몽주는 후위의 공민왕을 보필하며 이따금씩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장검으로 베어 넘기는 중이었다.
충절의 화신이란 이미지가 너무 강한 탓에 간과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는 생전에 무장의 역할도 제법 자주 맡았다.
황산대첩에선 이성계의 부장이었고 이외에도 여러 차례 참전한 바 있다.
물론, 직접 선두에서 싸운다기보단 병법으로 군을 지휘하는 역할이었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정도전도 요동 정벌을 감행하기 위해 병서를 집필하고 진법 훈련을 여러 차례 실시하는 등 비슷한 이력이 있다.
“도망치지 마라, 최충헌! 네가 정녕 내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성 싶으냐!”
한창 전투가 계속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분기탱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찰나의 틈을 타서 고개를 돌려보니 흑화한 이의민이 죄악의 군세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최충헌을 맹렬히 뒤쫓고 있었다.
* * *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거예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는 이의민의 모습에 멜리사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황이 이러한데 생전 원수만 죽이려 드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그래도 덕분에 흑화의 진전 속도는 늦춰졌습니다. 최충헌이 당하고 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요.”
애초에 이의민이 흑화한 이유는 오로지 최충헌을 벌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최충헌이 없어지고 난 후엔 목표 의식이 사라져 다른 의미로 폭주할 수 있었다.
보기 안 좋아도 현상 유지가 좋다고 설명하자 근처에 있던 베네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 시대의 인물들은 다루기 어려운 면이 있으니 이렇게 이이제이의 전략을 펼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
그 단어를 들으니 생각나는 인물이 있어 조금 떨어진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철.
고려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손꼽히는 그는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나, 나는 원나라 황후의 오라버니다! 거기 누구 없느냐!”
아직도 자신의 여동생을 등에 업고 행세하려 하다니.
뭔가 상당히 시대착오적이면서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권력의 꽃, 기황후’가 무대 위에서 갖은 수모를 겪는 기철을 측은하게 여깁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나타났다.
본래 이런 무대는 민족적 성향이 강한 탓에 다른 수호성들이 별로 참관하지 않는데 그녀는 조금 예외다.
“오오, 내 여동생이여! 어서 도와다오!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나를 업신여기느니라!”
구원의 손길을 느낀 기철이 비굴하게 울면서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
사실 기황후도 본명을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체성이 일부 반전된 수호성.
하지만 생전에 자신의 가족을 지키지 못한 한이 남아 있는지 곧바로 개입을 선언해왔다.
「‘권력의 꽃, 기황후’가 자신의 권능으로 군세를 불러모읍니다!」
기황후는 원나라 혜종의 정실.
공녀로 끌려갔다가 대박 운이 터진 고려 시대의 신데렐라였다.
그런 그녀의 자부심은 실로 대단하였기에 무대 위의 영웅들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달그락. 달그락.
기황후의 개입으로 등장한 원나라의 정예 기마 부대.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저 너머로부터 차원문을 통해 넘어온 그들은 순식간에 죄악의 군세를 도륙했다.
스걱! 스걱!
수많은 나라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원나라의 기마부대다웠다.
형세가 급변하자 한민족의 영웅들은 내심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기황후….”
“또다시 간섭을 하려 드는가.”
특히 최전선에 있던 척준경과 최영의 기색이 좋지 않다.
죄악의 군세가 소거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나 문제는 그다음.
저 권력욕 강한 여인이 옥새를 보고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아무래도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기마 부대의 움직임이 보기에 수상하구나.”
거듭하여 신궁을 쏘며 진중을 관찰하던 이성계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기마 부대는 죄악의 군세를 물리치면서도 빙빙 돌며 일행의 주위를 포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민왕도 그리 생각했는지 이성계에게 합의를 제안했다.
“비록 우리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선의의 경합을 벌이는 중이오. 만일 저들이 옥새를 탐하면 우리도 합심하여 군세를 일으키는 것이 어떻겠소?”
사실 공민왕은 왕위 계승 과정에서 원나라 황실뿐만 아니라 기황후의 도움도 받았었다.
하지만 그것은 원나라에서 오랫동안 절치부심하며 친원 세력인 척했던 성과였고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공민왕이 우호적으로 대하는 원나라의 인물은 오직 자신의 정실인 노국 대장 공주뿐.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동시대의 인물, 이성계는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우리 함께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친원파를 몰아내 봅시다.”
고려 최후의 개혁 군주와 조선의 창업 군주가 진심으로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
이를 아니꼽게 여겼는지 기황후가 노한 기색을 보이며 둘에게 선전 포고를 해왔다.
「‘권력의 꽃, 기황후’가 은혜를 모르는 속국의 졸장부들에게 엄벌을 내리겠노라 선언합니다.」
죄악의 군세를 유린하던 원나라의 정예 기마 부대가 말머리를 이쪽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그것을 본 전요한은 슬슬 다음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 * *
달그락. 달그락.
저 너머로부터 원나라의 기마부대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유목민족의 후예들답게 제법 승마 솜씨가 제법이다만 여기는 21세기다.
21세기의 지구는 바로 이능력을 사용하는 헌터가 지킨다.
물론, 위명 있는 한민족의 영웅들과 함께 말이다.
“어떻게 할 거예요? 우리도 뭔가 대책을 세워야죠!”
“이대로 말발굽에 치여 죽고 싶진 않은데 마력 방벽이라도 세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급해진 한나와 베네거가 내 쪽을 보며 행동을 촉구했다.
한편, 사극 매니아인 멜리사는 경건한 눈빛으로 대검을 들어 올린 채 전방만 주시하고 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신 신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한민족이 당했던 굴욕을 되갚아줄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역사적 사명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이런이런, 점점 일이 커지는 것 같군요. 강화파츠를 조금 방어적으로 운용해야겠습니다.”
물러설 기미가 조금도 없는 멜리사의 모습에 베네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후 그는 흩어져 있던 강화 파츠들을 불러 모아서 착용 중인 외장골격에 결합시켰다.
마치 로봇물의 로봇들이 합체하거나, 만화 속 주인공이 변신하는 것 같았다.
“…혹시 항공모함이나 대공 전차 같은 거 좋아합니까??”
“하하, 관련 지식은 조금 있습니다. 서브컬처도 즐기는 편이고요.”
대단하단 반응을 보이는 전요한의 질문에 베네거가 멋쩍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