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66화 (166/180)

제166화. 경합의 시련 (6)

순간 찾아온 정적.

주위의 시선이 일시에 이의민 쪽으로 향했다.

자청하여 타락한 영웅이라 그런지 어비스의 심연에 잠식당하는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다.

“생전의 미련을 모두 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볼썽사납게 망가질 리 없다.”

이의민의 상태를 살핀 척준경이 단언하듯 말했다.

현재 이의민은 생전 별명이었던 금강야차처럼 흉포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천민 출신으로 최고 권력자가 된 이의민에겐 권력이 곧 모든 것이었던 것이죠.”

어느새 다가온 정도전이 동감하며 덧붙였다.

이후 그는 여태껏 지켜보고만 있던 자신의 군주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주군, 이를 내버려 둬선 안 됩니다. 자칫하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화가 미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판을 유도한 은발 여인은 지금쯤 어딘가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녀석으로선 이의민이 폭주하는 시점이 절호의 기회.

타락한 영웅은 재앙을 일으키기에 좋은 수단이므로 경각심을 가져야 했다.

정도전이 거듭하여 간청하자 이성계는 전요한 쪽을 바라봤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뭔가 방도가 있는 눈치인데 삼봉이 나설 때까지 가만히 있는군.”

의중까지 묻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번 일이 정말로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이성계의 무력은 확실히 도움이 되므로 이참에 중요한 정보 하나를 흘렸다.

“분명 칠흑성을 방치하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그건 저기 있는 유물도 마찬가지이죠.”

“옥새 말이로군. 그것으로 누군가 장난질을 친다고 보는가?”

“네, 비록 모조품에 가까우나 저 유물은 라그나로크의 전조를 일으킬 만한 위력이 있습니다.”

모조품에 가깝다고 한 이유는 사실상 가짜나 다를 바 없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구전되어 왔으나 그 존재를 무어라 명확하게 설명 할 수도, 진정한 실체를 본 이도 전무한 신기.

이런 특성 탓에 일각에선 모종의 이유로 옥새라는 유물에, 원형이 되는 수수께끼의 신화가 존재한다고 믿기도 했다.

아무튼, 그들 앞에 놓인 옥새는 파생적이고 불완전한 설화에서 나온 유물의 파편을 보기 좋게 위장한 것이다.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자 잠자코 듣던 멜리사가 표정이 굳어졌다.

“영웅들이 저걸 탐내는 이유가 있었네요. 모체 격인 유물이 그렇게 엄청난 격을 지녔다니….”

“하하, 저는 거기까진 몰랐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군요.”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베네거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전요한은 녀석을 흘끔 노려본 후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였다.

“물론, 강력하지만 사실상 모조품인 탓에 크게 불안정하기도 합니다. 라그나로크의 전조를 일으키는 것도 주어진 여건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가능할 테죠.”

“주어진 여건? 무슨 말이야?”

“칠흑성의 폭주 따위를 일컫는 겁니다, 한나 양.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그 이변은 유물에 영향을 줍니다.”

특히 유물이 불안정하다면 더욱 전개 양상을 예측하기 어려우리라.

여러모로 위험하다는 이야기에 한나는 골 때린단 표정을 지었다.

“그럼 최대한 손대는 짓은 삼가야겠네. 여차하면 파괴해 버릴까 생각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어.”

“옥새는 시한폭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적당히 대화를 일축한 후 전요한은 이성계에게 다시 의향을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슬슬 결단을 내리시지요.”

사실 이성계에게 굳이 나서야 할 이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옥새도 미련이 없고 더군다나 주위에 정적도 있다.

따라서 오히려 지켜보는 쪽이 전략적인 측면에선 더 바람직하다.

하지만 예상대로 그는 수락의 말과 함께 신궁을 들어 올렸다.

“좋다. 그것이 현실적인 해결책이라면 나도 기꺼이 함께하지.”

조선을 연 군주로서의 면모가 많이 부각되다보니, 무장으로서는 역사적으로 많이 저평가된 바 있는 이성계다.

하지만 당대에 최영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았던 만큼 그 무위는 실로 대단했다.

휘이이익!

이성계가 애용했던 화살은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살촉 또한 무거웠다.

따라서 쏘는 힘이 보통의 것보다 몇 배는 더 소모되었고 파괴력 역시 그만큼 강력하다.

거기에다 설화 전승으로 인한 업의 위계까지 더해진다면… 진심으로 쏘았을 경우 흑화한 이의민도 끝장낼 수 있다.

“크헉!”

흉부의 급소에 강력한 힘이 서린 화살을 맞은 이의민이 뒤로 밀려나 주저앉으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안 그래도 생전에 화살로 한쪽 눈을 잃은 바 있는지라 이성계와의 상성이 별로 좋지 않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자 최충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저만치 떨어져 있던 최영은 염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러다 옥새를 가져다 놓았단 자의 수작에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최영이 염두에 두는 상황은 이의민이 폭주했을 때 저지를 수 있는 한 가지의 가능성이었다.

업화의 겁박.

흑화한 수호성은 그동안 쌓아올린 업과 위명을 불사르며 주위를 자신의 심상 세계와 동화시킬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여기서 실현될 경우 모두가 위험에 처함은 물론이고 예기치 못한 이변까지 부른다.

‘하지만 내가 있으니 그저 가능성에만 머무르겠지.’

이제부터 전요한은 흑막인 은발 여인도 놀랄 일을 벌일 계획이었다.

“이야기의 격이 충분히 높아졌으니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합니다. 이렇게 된 바에 우리가 먼저 무대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얼핏 듣기엔 황당무계한 헛소리.

언제 다시 일어설지 모르는 이의민을 주시하던 모두가 고개를 돌려 전요한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 * *

“지금 그게 무슨 소린가?”

“무대를 연다니… 여태까지 그걸 막으려고 한 것 아니었나?”

가장 먼저 정도전과 정몽주가 이의를 제기했다.

이어서 계백과 최영이 노한 표정으로 위협을 가해왔다.

“누군가의 음모라 해서 참고 있었거늘, 만약 나를 가지고 논 것이라면 단단히 각오해둬라.”

“말을 뒤집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더 분노를 사기 전에 어서 우리를 납득시켜야 할 것일세.”

예상했던 것보단 온건한 반응이다.

아무래도 전요한이 시련을 받아들인 현생자다 보니 일단 참는 모양인데 표정들이 하나같이 혼란스럽다.

여기서 쓸데없이 지체하면 이미 검집에서 칼을 반쯤 빼 든 계백이 일순위로 달려들 터.

흥분한 이들을 진정시킨 후 곧바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전에 말씀드리지 못한 점은 죄송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흑막도 이곳의 상황을 주시할 것이기에 불가피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말하라고 하지 않는가! 잡다한 사정은 그 후에 덧붙이게!”

이번엔 견훤이 성화를 내며 해명을 촉구했다.

상당수가 무장 출신이다 보니 흥분하면 좀처럼 다루기 어렵다.

“이대로 이의민을 처단하는 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도 업화의 겁박을 통해 우리를 곤란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으음….”

업화의 겁박에 대해 이야기하자 최영을 비롯한 일부가 곤란해하며 잠시 조용해졌다.

똑같이 흑화했다고 해도 성향상 이의민이 침식 속도가 빠르고 홍륜이나 비담보다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임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무대화를 시도하는 편이 낫습니다. 라그나로크처럼 암울한 쪽 말고, 조금 더 희망적인 쪽으로요.”

“희망적인 쪽? 혹시 협동 미션을 말하는 건가?”

의중을 눈치챈 정도전이 놀라며 질문을 던졌다.

역시 저 양반은 책사 체질이라 그런지 두뇌 회전이 빠르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마저 설명을 해주었다.

“네, 협동 미션은 보통 스케일이 큰 무대에서 주어지지만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허면 구체적으로 어떤 무대를 생각하고 있는가?”

“경합의 장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단순히 서로 일기토를 하는 것이 아니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이죠.”

운석의 시련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에 대한 구상은 이미 끝난 상태다.

다시금 의견을 묻자 최충헌이 마지막으로 세부 사항을 물었다.

“그럼 이의민은 내버려 두자는 것인가? 이미 흑화하여 폭주 직전의 모습인데 더는 좌시하기 어렵다.”

확실히 이의민을 방치하면 흑화로 인한 이변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벼랑 끝까지 몰려 최후의 보복 수단인 업화의 겁박을 쓰게 만드는 것보단 일단 분풀이를 하게 해주는 편이 낫다.

따라서 미끼가 되어달란 부탁에 최충헌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뭐, 뭣이….”

사실 최충헌이 찬성하든 반대하든 현 시점에선 중요하지 않다.

위명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전요한의 의견을 옳다 여겼고 긍정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히는 중이다.

“한번 해보세.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그 편이 나을 것 같네.”

“지난 악연을 정리하려다간 또 이의민 같은 자가 나올 수 있으니… 하는 수 없지.”

이성계와 최영이 서로를 흘끗 쳐다보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합의는 끝난 상황.

전요한은 홀연히 옥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한반도의 영웅들에게 걸맞은 무대, 그건 바로 외세로부터의 옥새 수호일 것입니다.”

외세는 비단 왜구나 홍건적 따위만이 아니라 이세계의 위협 요소도 포함되었다.

[협동 미션 #1]

명칭: 한민족의 영웅

내용: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중앙부의 옥새를 수호할 것

제한: 타임 어택(6시간)

보상: 기여도에 따른 차등 지급

기타: 실패 시 메인 미션 개방.

모두의 합의가 도출되자 별다른 무대 조성도 없이 미션 시나리오가 생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운석에 깃든 이능의 진정한 본질.

대혼돈의 차원, 어비스에 집어삼켜진 신들의 원념은 끝없는 희생양을 갈구하고 있다.

현생자가 알기 어려운 진실이었기에 정도전은 전요한을 의심스럽게 쳐다본다.

“자네, 대체 무슨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최소한 어비스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가능하거늘.”

현세는 이제 막 어비스에 의해 침식되기 시작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동안 나타났던 던전 게이트를 그것과 연관시킬 만한 근거는 상당히 부족한 터다.

사정을 밝히기 어려웠던 전요한은 정도전을 향해 그저 웃어 보였다.

“뭐, 조금은 특이한 재주가 하나 있습니다. 못 본 척 넘어가시죠.”

“정말 재미있는 친구로군. 담력도 제법 높고 예전의 누구처럼 강개한 의기가 있어.”

몇 마디 칭찬을 해주고 싶었는지 정몽주가 다가오며 말했다.

아직 무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라 다들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황.

지금 정몽주를 상대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예전의 누구라면, 오래된 지기지우를 일컫는 것입니까?”

“그렇네. 역성혁명처럼 허망한 목표에 빠지기 전엔 나의 참다운 벗이었지.”

정몽주는 옛 시절이 그리운지 회상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에 정도전이 불편한지 입을 열었다.

“선의의 경합을 앞두고 이 무슨 경거망동인가? 그대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지만 그도 진심으로 꾸짖는 어조는 아니다.

아까 정몽주에게 닥쳤던 위기를 방관하려 한 자신에 대한 모멸감 때문일까.

오랫동안 막역한 사이였던 정몽주는 이를 알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저 감사의 표시만 하려고 온 것이네. 이만 물러가겠네.”

어쩌면 전요한에게 기대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다.

생전의 친우와 더는 반목하지 않아도 되게 해줄 새로운 대의.

포은 정몽주는 이번 일로부터 그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엿본 것이다.

“앞뒤가 꽉 막혀서 이상만 바라보는 자일세. 덕분에 충신으로 이름은 남겼지만 말이네.”

점점 멀어져가는 정몽주를 보며 정도전이 씁쓸하게 말했다.

전요한은 무언의 눈빛으로 그런 정도전을 바라봤다.

사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추구하는 이상이 달랐을 뿐, 두 사람은 여전히 하늘과 바다처럼 서로 닮아 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던 도중, 사방의 허공에서 차원문이 생성되었다.

어두컴컴하고 불길한 모양새를 해서 건너편의 존재들이 영 좋지 않을 것임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상황.

모두가 일제히 무구를 꺼내 들었고 곧이어 죄악의 군세가 이쪽으로 쉴 틈 없이 몰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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