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경합의 시련 (5)
충분히 일리는 있는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저들을 피해 다닐 수만은 없다.
차라리 여기서 정리해 버리는 편이 여러모로 나은 판단일 테지.
마음을 굳힌 전요한은 최영을 만류한 후 옥새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옥새를 부숴버리는 방법도 있어.’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선택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과연 최영을 비롯한 이들이 그걸 방관할까?
은발 여인의 함정이라고 해서 잠자코 있을 뿐이지 공민왕도 옥새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더는 인파의 유입이 없도록 일단 원형 경기장을 폐쇄해야겠어.’
추가적인 유입만 없으면 현재의 인원은 어떻게든 관리가 가능했다.
전요한은 한나를 향해 돌아본 후 그녀에게 결계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당장 원형 경기장을 봉인해 주세요. 더 이상의 출입은 안 됩니다.”
“알겠어. 그걸 사용할게.”
마법공학 동력장치를 높이 들어 올린 한나가 정신을 집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푸르스름한 빛이 번쩍하더니 원형 경기장이 투명한 결계에 휩싸였다.
이제 결계가 유지되는 한 누구도 거추장스러운 수작질을 부리지 못할 터.
“누가 옥새를 차지할지 여기서 결정합시다!”
“최대한 공정한 방법으로 말이오!”
“후발주자이긴 하나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어느새 가까이 접근해온 영웅들이 소란을 피웠다.
고개를 돌려 흘끗 확인해보니 상당수가 별 볼 일 없는 부류다.
그나마 계백과 견훤이 영웅이라 부를 만하고 다른 의미에서 주목해야 할 자가 한 명 있다.
베네거 칼스웨인.
미국 출신의 헌터가 이 시점에서 여기로 나타난 이유를 심히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거, 처음 뵙겠습니다. 호기심 차 들려봤는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군요.”
과감하게도 베네거는 먼저 인사를 해왔다.
이번 작전에 다른 이능력자의 개입은 관리국에 의해 엄밀히 통제되고 있었을 터.
그런데도 편법으로 운석에 접촉하려 하다니, 무언가 흑심이 느껴졌다.
‘제대로 경계해야겠네.’
저만치서 옥새에 대해 떠들고 있는 자들을 애써 무시했다.
우선순위를 잠시 바꾼 후, 히죽 웃고 있는 베네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속셈이 뭡니까?”
“저는 진실이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다지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베네거가 씨익 웃었다.
이후 그는 안치되어 있는 옥새를 보더니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어려움에 처하신 것 같은데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대신 문제가 해결되면 제 몫도 남겨주시지요.”
예상대로 베네거는 운석의 파편을 노리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입자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신소재 분야에서 최상급이라 평가받는 재료.
솔직히 양보할 생각은 없었지만, 일단 녀석을 안심시키기로 했다.
“좋습니다. 다만, 그만한 값어치만큼 충분히 도움을 받았다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저는 파렴치한 인간이 아닙니다. 합리적인 거래와 지속적인 관계를 추구하지요.”
잘해보자는 의미로 베네거가 악수를 청했다.
전요한은 그의 손을 잡고 흔든 후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중간에 배반을 하면 그 대가는 수어 배만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베네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진 모르겠으나 일단 손을 잡아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런 걱정까진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당신을 중요한 파트너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저만치서 옥신각신하는 영웅들을 보며 베네거가 호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협상이 체결되자 멜리사는 소란을 피우는 무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데 저쪽은 어떻게 할 거예요? 다시 설득하려면 시간이 꽤나 소요될 것 같은데….”
“인원도 제법 많아져서 골치 아픕니다. 일단 서열 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군요.”
명확하진 않더라도 위아래를 어느 정도 구분해놓는 편이 혼란 방지에 도움이 된다.
“위계가 높은 자는 많지 않다. 저들 대부분은 혼란을 틈타 옥새를 취하려 드는 것이니 먼저 기세로 누르는 게 어떻겠나?”
아까부터 몇몇 인물들의 동태를 살피던 척준경이 제안을 해왔다.
그가 주시하는 이는 바로 계백.
계백은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로막은 자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내 여기에서 잃어버린 옥쇄를 되찾아 오래전 백제가 망한 한을 조금이나마 풀 것이다!”
황산벌 전투로 유명한 백제의 비극적인 영웅.
처자식을 죽이고 사지로 떠난 그의 선택은 오랫동안 이야기로 회자되어 왔다.
5천의 결사대만으로 김유신의 5만 신라군에 맞서고도 네 번이나 그들을 패퇴시킨 것 또한 포함해서 말이다.
“계백의 기백이 저러한데 어찌 기세만으로 굴복시키겠습니까?”
자칫하면 더 큰 혼란을 부를 수도 있다며 우려한 정도전이 앞으로 나섰다.
이후 그는 후백제의 군주인 견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견훤으로 하여금 계백을 설득시킬 생각이신 겁니까?”
“달리 방법이 없지 않느냐. 그나마 비슷한 정체성을 지닌 견훤이 마음을 열게 하기에는 최선이다.”
전요한의 질문에 정도전이 돌아보며 자신의 의중을 밝혔다.
실은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터라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여줬다.
“좋습니다. 그럼 견훤과 이야기를 해보죠.”
현재 견훤은 자신과 말싸움이 붙은 자의 멱살을 잡은 채 주위에 호통을 치고 있었다.
“이런 자들이 옥새를 차지하겠다며 큰소리를 치고 있단 말인가! 삼한의 내로라하는 영웅들이 겨우 이들뿐인 것이냐!”
참고로 견훤에게 붙들려 있는 인물은 고려의 유명한 간신, 기철이다.
“이것 놔라!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딴 짓을 하는 게야!”
기철은 자신의 누이가 원나라의 황후가 된 것을 이용하여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그 결과, 개혁 정치를 하던 공민왕의 눈 밖에 났고 궁궐에서 열린 연회를 즐기던 도중 철퇴에 맞아 격살당한다.
외세를 등에 업고 왕을 폐위시키는 등 횡포를 부렸단 점에서 역사적인 평이 매우 박한 인물.
그래서인지 녀석도 한껏 흑화하여 불온한 기운에 휩싸인 상태였다.
“기철의 사악한 기운이 주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네. 어서 서두르세.”
함께 지켜보던 정몽주가 일행에게 행동을 촉구했다.
한편, 공민왕과 이성계는 서로 마주한 채 아무런 말이 없는 상태.
전요한은 심호흡을 한 후 우락부락한 표정의 견훤에게 다가갔다.
* * *
“한때 대왕이라고 불렸던 분께서 어찌 그리 노여워하십니까?”
“네놈은 누구냐? 비루한 역사서 몇 장 훑어보고 아는 척할 속셈이라면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자 견훤은 한 손으로 붙잡고 있던 기철을 내던진 후 경고해왔다.
비록 삼한통일의 주인공은 되지 못했지만 그도 걸출한 난세의 영웅.
화신으로부터 전해져오는 패기와 위압감이 남달랐다.
“이번 기회에 새롭게 뜻을 펼쳐보고 싶으십니까? 솔직히 대왕께서 말년에 겪은 일로 많이 저평가되긴 하셨지요.”
“거, 아는 척 좀 그만하라고 말했다! 네놈은 대체 정체가 뭐길래 나를 꼬드기려 하는 것이야!”
계속 대화를 시도하는 전요한의 모습에 견훤이 위협적인 몸짓을 했다.
예상대로 성정이 조금 불같은 면이 있다.
여기서 밀리는 반응을 보이면 앞서의 기철처럼 멱살을 잡힐 터였기에 전요한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운석의 시련을 한 번 통과했습니다. 그러니 속는 셈치고 믿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운석? …아아, 현생자들에게 종말의 시련을 주는 악의 원념을 말하는 것이로군.”
“네, 자질이 있는 자들을 타락시키는 짓도 일삼아서 상대하기 매우 까다롭더군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면서 견훤에게 그간의 활약상을 어필했다.
수차례의 혼란 수습과 질서 유지.
현실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영웅이라면 이 같은 공로에 호의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대가 그간 수고를 많이 했군. 실은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좀 듣긴 했네. 현생자 중에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는 인물이 있다고 말이야.”
견훤까지 전해 들었단 걸 보면 벌써 전요한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다.
‘조금은 감회가 새롭군.’
하지만 지금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튼, 옥새는 함정입니다. 저걸 이용해서 영웅들의 무력 충돌을 일으키고 재앙을 일으키려는 자가 있죠.”
“…함정이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았던 건 아니네. 그런데 자네는 그걸 어떻게 눈치챈 것이지?”
견훤은 호기심이 동한 표정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별로 의심을 하는 것 같진 않고 이 일의 배후가 누군지 궁금해진 눈치다.
“최근 발생한 사건의 흑막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은발 여인의 개입이 확인되었습니다.”
“은발 여인? 멸망한 신들을 대신하여 세계에 대재해를 일으키려는 호문클루스 아닌가?”
“네, 그녀는 종말의 한 유형인 라그나로크를 발동시키려고 합니다.”
“…뭣이?”
순간 견훤의 눈썹이 불편하게 뒤틀렸다.
발할라에 속박된 채 종말을 대비해왔던 그라면 라그나로크에 대해선 잘 알고 있을 터다.
“이미 은발 여인은 라그나로크에 필요한 준비 작업을 모두 마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도화선을 지피기 위해 영웅들을 끌어모으는 것이죠.”
“옥새를 미끼로 던져서 이쪽을 분쟁지대로 만들겠단 속셈이로군.”
그렇다.
분쟁지대가 형성되어야 차원 간의 위계를 정하는 서열전이 시작될 수 있다.
하지만 기껏해야 협잡배와 무뢰한이 등장하는 무대에선 높은 수준의 서사를 구현하기 어렵다.
따라서 라그나로크와 같은 신화 등급의 서사가 발동하기 위해 내로라하는 영웅들의 참여가 선행되어야 한다.
좌시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자 견훤은 곧바로 협력을 약속해왔다.
“얼마나 도움이 될진 모르겠는데 그대와 뜻을 함께하겠소. 옥새야 나중에 차지하면 그만이니 말이오.”
다음 차례는 계백인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시비 붙은 이들을 단신으로 도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촤아악―!
계백은 분명 그 기백이 여기 있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무장.
무력으로 굴복시키기보단 대화를 선택함이 현명했다.
“잠시 멈추시게, 계백. 그대가 알아야 할 것이 있네.”
내 부탁을 받은 견훤이 종횡무진하던 계백의 앞을 가로막았다.
계백은 잠시 움직임을 멈춘 후 고개를 돌려 견훤을 쳐다봤다.
“왜 나를 가로막나? 자네도 백제의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것 아닌가?”
“그런 문제가 아니네. 일단 이야기를 좀 들어보시게.”
다시금 무구를 들어 올리려는 계백을 만류하며 견훤이 통사정을 시작했다.
저쪽은 맡겨둬도 되겠군.
어중간한 나머지 인물들은 뭘 하고 있나 보니 이미 최영과 척준경이 기강을 바로잡아 놓았다.
“옥새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 너희는 감히 탐하려 들지 말라!”
“어부지리를 노린다면 기대하지 마라. 난세라고 해도 그렇게 뻔한 수작은 안 통한다.”
고려 시대의 두 명장이 덤벼보라는 듯이 일갈하자 좌중은 이내 조용해졌다.
한편, 아까부터 격렬하게 맞붙던 이의민과 최충헌은 슬슬 승부수가 난 듯하다.
“크윽!”
휘청거리며 몸놀림이 위태하던 이의민이 상처를 입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상박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최충헌이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정녕 깨닫지 못하겠냐? 생전에 너를 죽인 것은 바로 나다. 그 업을 여기서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최충헌의 말대로 업에 의한 상성은 영성의 주된 약점이다.
점차 패색이 짙어지자 이의민이 결단을 내렸는지 이를 악물었다.
“최충헌! 다른 놈은 몰라도 너만큼은 이 자리에서 끝장을 내주겠다!”
두 무장이 살아온 시대는 무법에 가까운 무인 시대였다.
따라서 이의민도 별다른 대의명분은 없으나 자신을 암살한 장본인인 최충헌에게 더는 능욕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으음…?”
끼어들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전요한은 이의민에게서 일어나는 이변에 순간 표정이 굳었다.
타락의 전조.
전혀 우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주위가 거의 정리되어 가서 순간적으로 방심했다.
“네놈이 드디어 실성을 한 모양이로구나! 진정 악귀가 돼서 수라도를 걷고 싶은 것이냐?”
한층 흉악해진 이의민의 모습에 최충헌이 식은땀을 흘리며 일갈했다.
하지만 이의민은 이미 끓어오르는 분노에 잠식되었는지 눈알이 뒤집힌 채 최충헌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지면이 갈라지는 굉음과 함께 대번에 최충헌의 장검이 두 동강 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