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경합의 시련 (4)
“크윽!”
비담이 휘두른 환두대도를 겨우 받아낸 멜리사가 몸을 휘청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비담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옥새를 차지한 후 나는 현세의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해쳐먹은 신라 따윈 이제 관심도 없다.”
비틀린 정체성 위에 새롭게 싹트기 시작하는 야망.
애초에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지만 그 계획이 듣기 거북했으므로 전요한은 비담을 전력으로 몰아붙였다.
“헛된 꿈은 포기하고 이제 그만 안식을 되찾으십시오!”
여기 모인 역사적 인물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시대를 살다갔을 뿐, 옳고 그름의 문제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전요한이 막으려는 것은 일상의 평온과 즐거움을 위협하는 이세계의 재해였다.
대혼돈의 차원, 어비스.
그 종말이 현실 세계를 뒤덮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비담을 벨 터였다.
스걱!
찰나의 빈틈을 보였던 비담의 오른팔이 절단음과 함께 허공을 날았다.
이윽고 그가 굳세게 쥐고 있던 환두대도가 비명을 내지르며 지면에 떨어진다.
경악한 표정의 비담이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내게 물었다.
“너, 너는 대체 정체가 뭐냐?”
이제 곧 사자의 세계로 되돌아갈 존재에겐 무의미한 질문.
수급을 베기 전, 눈을 마주한 채 간단히 답해주었다.
“전요한입니다. 한국 출신의 헌터죠.”
* * *
결전에서 패한 비담이 최후를 맞이하자 잠시 물러나 있던 멜리사가 전요한에게 다가왔다.
“과연 대단하시네요. 저는 일합을 겨룬 것만으로 팔이 아리고 내장이 뒤틀렸는데 멀쩡하시군요.”
주위의 평판이 점차 긍정적으로 바뀌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다른 영웅들이 모여 있는 전장이라 특히나 현생자의 활약은 더욱 주목받고 있었다.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닙니다. 여기엔 타락한 영웅들이 많으니까요.”
“그들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전에 어서 제압하죠.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리기 전에요.”
말을 마친 멜리사는 다른 영웅들과 대치 중이던 홍륜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서 감히 계집 따위가 사내대장부에게 덤벼드는 것이냐!”
멜리사가 휘두르는 대검을 피하며 큰소리를 치는 홍륜.
하지만 땀을 삐질 흘리는 것이 여유는 조금도 없어 보인다.
“우리가 여자라고 깔보는 거야? 지금이 무슨 시대인 줄 모르네.”
반대편에서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 한나가 마법공학 중화기를 들어 올렸다.
이후 가차 없이 쏟아지는 마탄이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고통에 찬 홍륜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커헉!”
보아하니 저기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안 그래도 부상을 입은 홍륜인데, 포위까지 당해서 더는 생존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녀들과 함께 포위망을 형성중인 최영이 마무리를 짓겠지.
그렇다면 남은 상대는 바로 궁예.
그쪽에도 제법 인원이 붙어 있기는 하나 궁예는 만만히 봐선 안 되었다.
“나까지 쓰러지면 그 다음 차례는 누구라고 보는가, 고려의 무장?”
이의민의 공세를 법봉으로 막아내던 궁예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여태껏 무시하던 이의민이 비담과 홍륜이 당한 것을 보고는 주저하는 반응을 보인다.
“…무슨 뜻이냐?”
조금만 틈을 보여도 격살당하는 무인 시대를 겪은 이의민이었다.
그의 최후 역시 좀 더 신중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기에 궁예의 회유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토사구팽.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사냥개는 쓸모가 없어 주인에게 잡아먹히는 법이지.”
흑화한 궁예는 사람의 마음을 잘 파고들었다.
그가 문종과 한신의 고사를 읊자 이의민은 고민하다 칼끝을 최충헌에게 돌렸다.
“뭐 하는 짓이냐, 이의민!”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덤비려고 계속 틈을 노리는 것 다 안다! 네가 어부지리로 옥새를 차지하는 걸 좌시할 성싶으냐!”
이것이 무인 시대의 한계.
공동의 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둘은 다시 반목했고 정도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것 참 난망하구나.”
물론 문신들이라고 해서 이 같은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삼봉. 마지막으로 제안하겠네. 결국엔 사분오열하는 형세이니 그만 집착을 버리고 나와 함께 경효대왕을 따르세.”
아까부터 공민왕의 곁을 지키던 정몽주가 다가와 정도전을 설득했다.
정도전이 고개를 돌리니 이성계는 저만치서 먹구름이 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의 마음에도 간교한 나찰이 자리 잡고 있소이다. 내가 당장 그놈을 혼쭐내 주겠소.”
이의민과 최충헌이 다투는 틈을 타서 궁예가 정몽주를 향해 법봉을 들어 올렸다.
거리를 좁혀가던 전요한이 그의 횡포를 저지하려 할 때, 멀리서 화살이 날아왔다.
“크헉!”
화살이 노리던 대상은 다름 아닌 궁예였다.
뜻밖의 공격으로 가슴에 중상을 입고 몇 걸음을 뒤로 밀려나는 궁예.
그가 눈을 부릅뜨며 자신을 공격한 인물을 노려봤다.
“옥새에 관심이 없다더니 어찌하여 끼어드는 것이오! 하물며 상대는 그대의 정적이거늘!”
이성계.
신궁을 들어 올린 채 그윽한 눈빛을 하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나의 적이 이곳에 하나 있다면, 그는 바로 당신이오.”
* * *
이성계가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짐작하고 있었다.
분명 그는 이제 옥새엔 미련이 없었으나, 자신과 같은 시대를 보내온 인물들이 고통받는 것은 좌시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 대상은 정몽주, 숱한 어려움에도 자신이 마지막까지 끌어안으려 했던 인물이다.
“주군이시여….”
이성계의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던 정도전이 끝내 눈물을 보였다.
최측근인 정도전은 자신의 군주가 느끼고 있을 번민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참으로 한심한 자로군. 그렇게 대의명분이 필요한 것이오? 그대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魔)가 너무 많이 끼어 있소.”
“…….”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르니 다들 그대를 의심만 하는 게요. 지금이라도 속 시원하게 옥새를 갖고 싶다 말하시오.”
조금 전의 중상으로 한층 더 흑화한 궁예가 이성계를 헐뜯었다.
그 모습에 노한 정도전이 다시 궁예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사인참사검을 겨눴다.
“무엄하다! 어찌 네가 감히 신무대왕을 모욕하느냐!”
“그대도 별반 다를 것 없소. 가까운 벗이 바로 옆에서 죽을 뻔했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잖소.”
정도전을 향해 고개를 돌린 궁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눈치.
실제로 궁예는 흑화한 결과 사람의 마음을 읽는 심법을 지니고 있었다.
“…….”
부정하지 못하는 정도전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는 대업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스승도, 친우도 버릴 수 있는 자.
어떻게 보면 비정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운 존재였다.
이쯤에서 나서는 편이 좋을 것 같았기에 전요한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이간질이 심하시네요, 미륵불님. 무소불위의 권력을 위해 처자식까지 잔인하게 살해하신 분이 왜 그러십니까?”
“뭣이?”
“한번쯤은 자신의 마음속도 들여다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주위의 인물들이 전부 불행하게 살다간 이유를 정말로 모르진 않으시지요?”
첫 등장 이래로 늘 평온함을 유지하던 궁예의 표정에 처음으로 노기가 어렸다.
하지만 이내 거짓 미소를 띤 그는 훈계하듯 전요한을 쳐다봤다.
“그들은 극락왕생하였소이다. 죄가 있으면 내가 모두 정화해 주었으니까요. 그대도 내가 보기에 도움이 필요한 듯한데… 어떻소?”
더는 저 사이비 교주의 유세를 못 들어 줄 것 같았다.
녹티스도 궁예를 심판의 대상으로 인식했는지 서슬 퍼런 불꽃을 이글거린다.
자질구레한 대화를 하는 대신 전요한은 웃어 보였다.
“먼저 극락왕생하시지요.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비담도 베었는데 궁예를 처리 못 할 리 없다.
단지, 궁예는 심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잘 흔들어 놓아서 그것을 경계한 것이다.
전요한이 망설임 없이 달려들자 궁예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나, 나는 미륵불이니라! 이놈! 정녕 깨닫지 못하겠느냐!”
능력을 개방한 전사자들의 검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모양.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녹티스의 서슬 퍼런 궤적에 튼실하던 법봉이 바로 절단 났고 이어서 궁예의 심장이 단번에 꿰뚫렸다.
“크헉!”
생전에는 그래도 이것보단 나은 인물이었을 테지만 굳이 생각해서 평가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이들은 세월이란 풍파에 빛이 바랜 존재이고 누가 옳고 그른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궁예가 왈칵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정도전이 감사의 말을 표했다.
“고맙네.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군.”
“별것 아닙니다. 회합에 방해가 되는 무리를 정리했을 뿐이죠.”
흑화한 수호성은 세계관의 약화를 부르기에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물론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녹티스처럼 흑화하고도 자기 절제가 가능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아아악!”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왔다.
다급히 고개를 돌리니 검은 기운에 휩싸인 채 몸부림치는 한나 의 모습이 보였다.
홍륜은 거의 제압되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당해 버리다니.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멜리사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본인의 문제 같아요.”
홍륜의 수작이 아니란 건가.
그럼 문제가 더 심각하다.
상황을 파악한 전요한은 정도전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사인참사검을 잠시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도움이 필요합니다.”
“…좋네. 나도 문제가 더 번지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정도전은 의외로 순순히 사인참사검을 넘겨주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한나에게 다가간 후 곧장 검신을 어깨 위에 올렸다.
스르르르.
한나를 휩싸고 돌던 검은 기운이 검신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을 본 멜리사가 놀라움에 입을 벌렸다.
“세상에… 무슨 성검이에요?”
“아직 전조에 불과해서 제압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본인이 계속 흔들리면 이걸로도 어렵겠죠.”
프리메이든 사의 장녀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오던 한나는 현재 많이 지쳐 있었다.
그 결과, 흑화한 홍륜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졌고 하마터면 위기를 맞을 뻔했다.
근묵자흑(近墨者黑).
이렇듯 흑화한 영성은 이리저리 민폐를 끼치며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킨다.
“하아… 하아….”
본래의 낯빛으로 되돌아온 한나가 허리를 숙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본 멜리사가 그녀를 부축했다.
“저것 보십시오. 인파가 다시 몰려오고 있습니다.”
잠시 한나의 상태를 확인하던 전요한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니 옥새를 차지하려는 영웅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인지도가 낮아서 위명을 잘 모르겠는 자들의 모습도 다수 섞여 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아비규환이 되고 말 것이다.”
한동안 구경만 하고 있던 척준경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건 별로 선호할 만한 전개가 아니다.
저 중에도 불순한 이들이 다수 섞여 있을 테고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이 생겨나는 탓이다.
정도전에게 사인참사검을 되돌려준 후 전요한은 아직도 한참 싸우는 중인 이의민과 최충헌을 바라봤다.
“저 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중재를 해도 다시 맞붙고 말 겁니다.”
멜리사의 물음에 고개를 젓자 정신을 차린 한나가 다가왔다.
“미안해. 내가 민폐를 끼쳤네.”
“당분간은 배후에서 지켜만 보세요. 아무래도 휴식할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역사적인 영웅들이 난무하는 무대인 만큼, 지금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때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최영이 한가지 제안을 해왔다.
“지금 문제가 커지는 이유는 옥새가 저곳에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옥새를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이 어떠한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