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경합의 시련 (3)
홍륜의 화신에게서 붉은 피가 줄기차게 흘러내린다.
곱상한 얼굴을 한 녀석이 입을 악물고는 척준경을 똑바로 노려봤다.
“자존심? 지금 네가 나에게 자존심을 논하는 것이냐?”
고려 시대의 무장으로서 함께 반역 열전에 오른 척준경을 홍륜이 모를 리 없다.
집요하게 자신의 허물을 물고 늘어질 것이 예상되었지만 척준경은 의연하게 받아쳤다.
“그렇다. 너는 어찌 모두가 지나온 시대를 부정하느냐? 과거로 되돌아가 업을 바꿀 순 없더라도 자신의 이름만은 당당해야 한다.”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신념을 저버려선 안 된다는 것이 척준경의 지론이었다.
얼굴이 붉어지게 만드는 훈계에도 홍륜은 코방귀를 뀌었다.
“국왕 시해자가 되어 능지처참을 당한 내가 무엇을 긍정하겠냐? 이참에 너희들도 전부 죽어버리고 지난 업을 운운하는 자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생전에도 개차반이었던 자가 이제 와서 정신을 차릴 리 없다.
홍륜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을 때 돌연 화살이 날아와 오른쪽 어깨에 꽂혔다.
“크흑!”
결코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기에 홍륜은 신음과 함께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그가 쉽게 일어나지 못하자 이성계는 신궁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나의 허물을 떠들어대는 것은 괜찮으나 대업을 함께한 사대부들까지 욕되게 하지 말라.”
여차하면 일대일로 상대해 주겠다는 듯 노기가 어린 눈빛에 군왕의 패기가 서린다.
“큭큭… 아주 잘난 작자들만 모이셨구만. 여기서 몇 마디만 더 하면 날 못 죽여서 안달이 나겠구나?”
홍륜은 그렇게 떠들었으면서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이성계가 다시 활시위를 당기려 하자 정도전이 그를 말렸다.
“뭔가 이상합니다. 필경 노리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타락해서 유흥과 살생에만 심취하고 옥새에는 관심이 없을 홍륜이었다.
이성계도 그리 여겼는지 행동을 멈추고 공민왕을 쳐다봤다.
“옥새 가지고 싸우지 맙시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구천 세계의 변방을 지키며 그저 무장 역할이나 하고 싶소.”
유혈 사태와 거센 비난을 감수하며 끝내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온갖 못 볼 꼴을 보며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왕자들의 권력 다툼과 잡다한 논쟁이 끊이질 않는 조정.
병상에 누운 틈을 타 권력마저 빼앗겼을 때는 심히 인생무상을 체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년을 알면서도 공민왕과 최영은 이성계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진정 무장으로 지내고 싶다면 자네의 가신을 데리고 여길 떠나시오.”
“오래전에 신뢰가 깨진 사이니 진심 같아도 어쩔 수 없구만. 이것도 다 그대가 짊어져야 할 업이라고 생각하시게.”
결자해지.
본인이 자초한 결과이니 스스로 매듭을 지어야 한다.
무심한 말에 이성계는 말없이 먹구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봤다.
“…….”
마치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풍경이다.
이대로 회합은 결렬되나 싶었는데 곤란한 존재가 더 등장했다.
“여전히 왕가의 계보 따위에 연연하는 자들이로군. 지금이 무슨 시대인지 알고는 있는가?”
홍륜과 비슷한 분위기의 어두침침한 사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정보 덕분에 나는 그의 정체를 즉시 알아차렸다.
비담.
신라의 왕족이었던 그는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에 의해 제압당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우리는 현생자가 아니오. 비록 육신은 썩어 없어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나 이렇듯 옛 시대의 기억을 간직하며 지내고 있소. 그런데 신라 시대의 상대등은 무슨 일이신지?”
상대가 비담인 것을 눈치챈 정몽주가 먼저 그를 대화로 상대했다.
비담은 정몽주를 흘깃 보더니 귀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 비록 생전엔 김유신과 김춘추에게 패배하여 역사의 치욕을 남겼으나 그런 것은 이제 신경 쓰지 않소. 옥새야 지금이라도 차지하면 그만이니까 말이오.”
비담 역시 흑화하여 기존의 정체성 따윈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자신들보다 더 이전 시대의 인물까지 가세하여 대치하자 정몽주를 비롯한 이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러다가 장보고나 만적 같은 인물까지 등장할 판이다.
대체로 공훈이 적거나 역사적인 평판이 좋지 않을수록 쉽게 흑화하므로 전요한 또한 더는 좌시하기 어려웠다.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것은 좋으나 이건 아까도 말했듯이 함정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소란을 일으킬수록 문제가 된다는 걸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 모인 인물들 중 적어도 두 명은 제압할 필요성이 있다.
홍륜과 비담.
애초에 이들은 자신의 비틀린 욕망에 매몰되어 절제력을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칼끝을 자신에게로 향하자 비담이 비릿하게 웃으며 본색을 드러냈다.
“현생자가 업화의 화신을 이길 수 있을 성싶으냐. 이 몸은 지난날의 모든 걸 포기하고 한 번의 투쟁에 운명을 걸었느니라.”
쉽게 말해서 그동안 쌓아올린 업을 불태우며 흑화한 만큼 무슨 짓이든 할 거란 의미다.
이렇게 폭주 직전의 영성은 사실상의 재앙과도 같아서 점차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벌여댄다.
“일단 우리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는 것이 어떻겠소. 저 둘을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얼마나 더 많은 원흉들이 몰려들지 모르오.”
마침 홍륜을 제거하고 싶었는지 공민왕도 모여 있던 이들에게 칠흑성의 타도를 제안했다.
가장 먼저 정도전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장차 화근이 될 우환은 빨리 제거할수록 좋으니 서두르도록 합시다.”
무장도 아닌 그가 나서자 어깨에서 화살을 뽑아낸 홍륜이 일어서며 코웃음을 쳤다.
“책이나 읽으며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유학자가 대체 무엇으로 경합을 하겠단 것이야?”
“…….”
굳게 입을 다문 정도전이 몸을 돌려 홍륜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오래된 유물 하나를 소환하여 그를 향해 겨눴다.
“아니, 그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몽주가 놀란 나머지 크게 입을 벌렸다.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劍).
조선 창업 이후 태조 이성계 재위 시기부터 왕실의 안위를 위해 제작해오던 보검이다.
사악한 기운과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전해지며, 이 때문에 각종 소설이나 드라마 따위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유물이었다.
“삼봉, 그걸 언제 가져온 것인가?”
이성계도 뜻밖이었는지 정도전에게 한 마디 했다.
현재 정도전이 들고 있는 것은 사인참사검 중에서도 가장 먼저 제작되어 그 위력이 심히 강대하다.
“신(臣)이 헤아려 보건대, 장차 이런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여겨서 준비했습니다. 칠흑성을 제압하는 데에 이만한 유물이 또 없지요.”
검신에 동서남북의 사방을 상징하는 28수 별자리가 새겨진 보검이다.
게다가 일종의 주문 격으로 29개의 한자가 포함되어 어지간한 잡귀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기세등등해진 정도전이 압박하자 홍륜은 일단 뒤로 물러났다.
“이놈, 무력으로 안 되니까 보검의 위세를 빌리려 드는구나. 하지만 정녕 뜻대로 될 듯싶으냐?”
홍륜에게도 전혀 계획이 없는 건 아니었다.
녀석은 공민왕을 다시 한번 암살하여 국왕 시해자로서의 악명을 드높인 후 자신과 같은 칠흑성을 끌어모을 생각이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이번엔 그 거사를 이루기가 어려워 보인다.
“저 역적은 내가 직접 죄를 다스릴 것이다! 왜구만도 못한 망나니 같으니라고!”
홍륜이 계속 공민왕을 향해 눈길을 돌리자 분개한 최영이 칼을 뽑아 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이미 부상이 깊어 둔해진 홍륜의 운명은 정해진 듯싶었으나 누군가가 멀리서 그를 도왔다.
휘이이익!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에 최영이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홍륜이 자신을 구해준 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으음…?”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승려.
하지만 제법 호화로운 의복을 걸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그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이내 혀를 찼다.
“쯧.”
미륵불, 궁예.
물론 재위 시절에 자칭한 것이고 누군가가 붙여준 존호는 딱히 없다.
후삼국시대의 군웅이었던 그는 전횡을 일삼다가 왕건에게 축출되는데 이로 인해 역사적인 평가가 박했다.
‘칠흑성의 수가 점점 늘어만 가는군.’
이렇게 흑화한 수호성이 많아지면 은발 여인의 계획대로 되어버린다.
지금까진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본 면이 있는데 이제는 정말 서두를 필요성이 있다.
아무튼, 궁예가 홍륜을 도와준 것은 고려가 자신을 축출한 왕건의 나라이기 때문일 터.
그리고 궁예 역시 세간의 악평으로 수호성으로서의 입지가 많이 좁아진 탓에 적잖이 흑화한 상태였다.
“저 애꾸눈을 보니 누군가가 생각나는군. 별로 재회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야.”
한때 기용했던 신돈이 생각나는지 공민왕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방해받은 최영은 대노하며 궁예에게 삿대질을 했다.
“감히 난세의 요승 따위가 역적을 처단하는 걸 막아? 너 또한 똑같은 죄명으로 다스릴 것이다!”
한번 결심이 선 최영의 추진력은 가히 대단하다.
그가 맹장의 기세로 엄히 꾸짖자 궁예가 음험한 미소를 띠었다.
“그대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흉포한 괴마가 도사리고 있소. 그러니 나 미륵불을 몰라보고 언성을 높이는 것이지요.”
흑화한 궁예는 광기 어린 사이비 교주 그 자체였다.
숭유억불 정책을 주장했던 정도전이 이것을 보고 한마디 했다.
“세상에 미륵 같은 건 없다. 어디서 해괴망측한 이야기로 혹세무민을 하려 드는가?”
여차하면 사인참사검의 주술력으로 궁예를 제압하려는 태세다.
하지만 궁예는 사인참사검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유학을 배웠다는 자들은 사후 세계도 믿지 않더군.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그대 역시 따지고 보면 망귀요.”
사이비 교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며 궁예는 이 자리에 모인 모두를 향해 불법을 설파했다.
듣다 못한 이의민이 장검을 치켜든 채 궁예에게 달려들었다.
“이놈,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천한 신분으로 권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의민은 요망한 교리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 또한 반란군을 제압하다 화살을 맞아 형색이 애꾸눈이었기에 궁예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흥미로운 자로구나. 어디 한번 자웅을 겨뤄 보자꾸나.”
궁예 또한 생전에 무술을 연마한 적이 있어 이의민에게 그리 쉽게 밀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영웅의 화신들이 서로 뒤얽혀 다투는 형세가 되자 나는 저만치 떨어져 있던 일행을 불러들였다.
“우선 흑화한 영웅들을 제압하는 일부터 신경 쓰죠. 애덤 카다스키의 수작질도 염두에 두면서요.”
슬슬 녀석이 나서서 본격적인 무대화를 시도할 시기가 되었다.
멜리사도 그것을 염려하는지 매번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딱 이들의 모습이 발할라에서 맞붙는 영웅들이네요. 확실히 중요한 국면인 것 같아요.”
각자 구체적인 목적은 다르지만 이들이 현장에서 다투고 있는 공통된 이유는 주도권 때문이었다.
한반도의 진정한 영웅을 가려내기 위한 경합.
비록 그 도전자의 수는 적어도 세력전으로 번지기엔 충분히 갈등의 골이 깊다.
이를 교묘하게 대재앙을 일으키는 도화선과 연결시키려는 것이 바로 은발 여인의 목적이다.
현세를 위해서라도 이 자리의 영성들이 결속할 필요성이 있다.
“아무런 위명도 없는 놈이 어디서 감히 덤벼드느냐!”
멜리사가 대검을 휘두르자 나와 대치 중이던 비담이 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역사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진다 해도 비담은 흑화한 데다 그 이름이 전승된 지 1,000년이 훌쩍 넘었다.
따라서 그에 따르는 영향력이 있었으므로 아무리 멜리사라고 해도 단신으로 감히 대적하긴 어려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