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경합의 시련 (2)
삼봉(三峰) 정도전.
맹자의 역성혁명을 기초로 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급진파 신진사대부다.
재상 정치를 추구하다가 후일 태종 이방원에게 숙청당했던 그가 여기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바로 옥새를 자신의 생전 군주에게 바치고 다시 대업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생전 군주인 태조 이성계는 말년에 자식들로 고통받아서인지 사후의 영향력 확대에 소극적이었다.
“저, 저 교활한 반역자 놈이 여긴 무슨 낯짝으로 나타난 것이야!”
정도전의 등장에 최영은 이전과 비할 데 없이 크게 진노했다.
이성계를 꼬드겨 역성혁명을 일으키게 한 원흉이 바로 그라고 판단했던 탓이다.
최영이 무구를 든 채 성큼성큼 걸어오자 정도전은 한숨을 쉬었다.
“시대가 이토록 혼란한데도 끝까지 고려의 무신으로 남으려 하십니까?”
“시끄럽다! 네놈이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무구를 높이 들어 올린 최영은 당장에라도 정도전의 화신을 참살할 기세였다.
그 모습을 본 공민왕이 최영을 제지했다.
“잠깐 내버려 두시게. 내가 키워냈던 사대부들이니 한번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네.”
정도전, 정몽주 등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를 관직에 등용한 건 바로 공민왕이었다.
정도전도 공민왕의 신하였던 적이 있었기에 최소한의 예는 갖추었다.
“오랜만입니다, 대왕이시여.”
“그대의 최후는 들었네. 새롭게 옹립한 왕의 다섯 번째 아들에게 밀습을 당했다지? 후손들이 시신도 찾지 못한다니 안타깝군.”
공민왕은 정도전의 비참했던 말로를 언급하며 회유하려 했다.
역사적으로 그가 결코 무능한 왕은 아니었기에 정도전은 조금 난색을 표했다.
“뭐, 방심하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어차피 제명대로 살진 못했을 것 같습니다만.”
“그 왕조는 그만 잊어버리고 나와 함께 다시 시작해보세. 어떠한가?”
다가와서 손을 붙잡은 공민왕이 정도전의 눈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정도전은 조선 창업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지 한사코 거절했다.
“비록 조선 또한 망했다고 하나 민본의 정치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이전 국가와는 다릅니다. 제의는 감사하지만 저는 신무대왕(神武大王)을 섬기겠습니다.”
신무대왕은 태조 이성계의 시호 중 일부를 따서 이르는 말이다.
정도전의 입장 표명에 공민왕은 물론이고 저만치 있던 무장들도 벙찐 표정을 지었다.
“뭐, 신무대왕?”
“왜구들 좀 때려잡았다고 지나치게 격상을 했군.”
“…허어.”
특히 최영의 반응이 볼만했다.
아직 마음속에 한이 남아 있는지 이성계가 언급되기만 하면 말을 잇지 못한다.
“이러면 여말선초(麗末鮮初)로 분위기가 굳어지는 것 같군요.”
“최근에 고려 시대를 무대로 한 어비스 유적지가 있었던 탓입니다.”
역사물 덕후인 멜리사와 함께 잡담을 주고받으며 전요한은 정도전을 주시했다.
다른 무장은 적절히 회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 양반이 문제다.
생전에도 좀 극단적이고 외골수 같은 성향이 있어서 이리저리 미운털이 많이 박혔던 인물.
게다가 혁명처럼 판을 뒤집어엎는 걸 좋아해서 적으로 돌리기 껄끄러웠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새로운 인물이 원형 경기장으로 진입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자네는 나와 적일세. 부디 나를 친우라 부르지 말아주게.”
포은(圃隱) 정몽주.
최영과 함께 고려 말의 충신으로 유명한 그가 나타나자 분위기는 미묘하게 바뀌었다.
“…끝까지 나를 방해할 셈인가?”
특히 정도전의 표정에 적잖이 언짢은 기색이 어린다.
삼포지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친했던 자가 다시 앞을 가로막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
“나는 언제나 일편단심이네. 자네도 선죽교에서 나와 함께 피살당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야.”
두 사람은 목은(牧隱) 이색의 제자인 신진사대부였고 태종 이방원에게 죽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더 이상 과거의 인연엔 연연하지 않는 듯 보였다.
“지금도 역성혁명을 한 것을 후회하진 않네. 우리는 길이 다르니 그만 이야기하세.”
반목이 끊이지 않는 사극 분위기.
설상가상으로 은거 중이던 태조 이성계까지 어디선가 나타나서 이에 가세했다.
“지난 일 가지고 뭐 하러 그리 싸웁니까. 다들 조용히 물러나시오.”
결국 왕조가 다른 두 군주가 대치하게 된 상황이다.
이를 인지한 공민왕이 이성계에게 한마디 했다.
“그대가 나의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을 자처할 줄은 꿈에도 몰랐소. 하지만 조선 또한 결국엔 망해 버렸으니 참으로 허망하구려.”
이성계는 공민왕의 재위 기간에 개혁 정치를 도왔던 공적이 있었다.
자신의 신하였던 자가 후일 왕조를 뒤엎었으니 곱게 보일 리 없다.
“미안하게 되었소. 변명하지 않을 테니 삼봉만 데리고 가면 안 되겠소이까?”
이성계는 옥새에 미련이 없었다.
그냥 돌아가겠다는 그의 말에 정도전이 무릎을 꿇었다.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부디 난세를 끝내기 위해 옥새를 취하시옵소서.”
정도전은 혼란한 시대를 수습하기 위해 필요한 지도자가 자신의 주군뿐이라 믿었다.
한편, 최영과 정몽주는 황당무계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공민왕을 지지했다.
“요동 정벌이란 대의를 앞두고 회군이나 한 작자가 어찌 이 같은 난세를 끝내겠는가?”
“진취적인 기상은 우리 고려에 있으니 먼저 옥새를 취하시옵소서.”
이쯤 되면 개판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슬슬 개입하는 게 좋겠다고 여긴 전요한은 그들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고려든 조선이든 기억해줄 후손이 없다면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옥새는 우리 모두를 위해 포기하셔야 합니다.”
저들로서는 조금 황당한 등장이라 할 수 있겠다.
전요한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정몽주가 이내 한마디 했다.
“아까부터 지켜보던 자이군. 대체 자네는 누군가?”
예상했던 질문.
준비해둔 대답은 간단했다.
“저는 운석의 시련에 도전하는 현생자입니다. 한 가지 아뢰옵건대 이것은 함정입니다.”
운석의 시련을 짊어졌다는 건 비범한 영웅의 자격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영웅들에겐 우호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다.
예상대로 정몽주와 정도전을 비롯한 모두는 전요한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대가 은발 여인의 음흉한 계략을 막아내고 있었군. 정말 큰일을 했네.”
“현생자이긴 하나 난세의 영웅이니 우리와 대화할 수준은 되는군.”
한편, 최영은 전요한을 인정하기 싫은지 반응이 남달랐다.
“그런 시련을 받아들이고도 용캐 아직 살아 있었군. 하지만 어비스의 존재들을 상대로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야.”
여기 모인 영웅들인 대혼돈의 차원, 어비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비스의 시공교란은 그들이 사후에도 영면에 들지 못하고 투쟁을 계속하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다.
그런 악의 근원과 대적하려 하다니, 대담하다며 기특해하던 공민왕이 내게 물었다.
“그래, 이것이 어찌하여 함정인가? 우리에게 한번 설명해보라.”
공민왕은 손익 계산이 빠른 인물이었다.
옥새가 비록 중요하다고는 하나 대의에 맞지 않으면 잠시 물러날 줄 알았다.
“은발 여인은 옥쇄를 미끼로 한민족의 영웅들이 반목하게 유도했습니다. 그건 같은 역사관을 지닌 저를 혼란시켜서 주저하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이죠.”
일부의 영웅만을 편들기 어려운 처지인 만큼, 전요한이 이들 간의 다툼에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결국, 경합의 시련은 새로운 혼란을 낳고 이 세계에 재앙을 일으킬 것이다.
이미 그러한 간계에 몇 번 당했는지 최영이 대번에 화를 냈다.
“아니, 그 작자가 우리를 또 이간질한단 말인가! 대회합을 무산시킨 것도 모자라서!”
대회합.
우리 세계관의 영웅들이 한자리에 모여 어비스의 위협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회의였다.
그런 중요한 회의에서 각 세력 간의 갈등을 일으키고 모두를 기만한 존재가 바로 은발 여인이다.
“여기서 그 기분 나쁜 기억을 되살리다니, 심히 불쾌하군. 내 그냥 가려 했는데 이건 안 되겠어.”
옥새에도 관심 없던 이성계가 자신의 무구를 꺼내들었다.
신궁(神弓).
그것을 본 정도전의 표정에 긴장한 기운이 역력했다.
“아니, 그걸로 무엇을 쏘려고 하십니까? 주위에 파란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나는 이제 임금 노릇은 안 해도 그 몹쓸 우환은 없애야겠어. 어서 가별초(家別抄)를 소집하라.”
가별초(家別抄).
생전에 왜적을 물리치고 역성혁명을 일으킬 때 동원했던 사병 집단을 의미했다.
이성계가 군세를 일으키려 하자 곧바로 정몽주의 제지가 들어왔다.
“정말로 그런 목적에서입니까. 그대의 뜻이 심히 의뭉스럽습니다.”
예전에 속고 당한 것이 많아서인지 정몽주는 이성계의 진의를 의심했다.
무신집권기의 고려 무장들도 썩 내켜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거, 물증도 아직 없는데 혼자 소란 떨지 마라.”
“거병은 좀 더 지켜보고 해도 늦지 않아. 특히나 이런 자리에선 더욱.”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와 격해지기 시작하는 반목.
공민왕을 호위하는 최영 또한 이성계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업자득이야.”
공동의 적이 존재함에도 서로 믿고 연대하지 못하는 상황.
이때, 흉악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어디선가 검격이 날아들어 왔다.
카랑―!
눈먼 공격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맹목적인 침입이다.
녹티스를 들어 올려 불의의 기습을 막아낸 전요한은 눈앞의 상대를 응시했다.
“조금 무례한 불청객이군요.”
홍륜.
살기를 불태우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공민왕의 시해자였다.
“옥새는 내가 가질 것이다!”
상태를 보아하니 일전에 만났던 원균처럼 흑화해서 본래의 정체성이 많이 훼손되었다.
검은 별.
칠흑성이라고도 불리는데 폭주하면 불미스러운 일의 원흉이 된다.
“아니, 저 역도 놈이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홍륜의 등장에 최영이 눈을 부라렸다.
따지고 보면 홍륜이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그의 인생도 상당 부분 꼬이기 시작했다.
공민왕의 친위대이면서 후비와 간음하여 임신까지 시킨 장본인.
공민왕 시해 당시에 최영은 멀리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원정을 나가 있던 상태였다.
“저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하긴, 호부견자(虎父犬子) 소리를 매일 듣고 사니 제정신으로 버티겠느냐.”
생전의 치욕이 떠올랐는지 공민왕이 노여워하며 홍륜을 비꼬았다.
홍륜의 부친인 홍사우는 왜구를 물리친 명장이고 조부 홍언박은 문하시중을 지낸 중신.
그런 집안의 자식이 개차반이었으니 후세의 평이 가히 최악이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 홍 씨는 임금 하면 안 되는 것이야? 저기 있는 이 씨의 집안도 500년을 해쳐먹었느니라!”
전요한과 무구를 맞대고 있던 홍륜이 눈짓으로 이성계를 가리켰다.
그러자 정도전이 역성을 내며 이성계를 비호하기 시작했다.
“네놈은 왕재(王才)가 되지 못한다! 대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더냐? 위화도 회군은 명분이 있는 결단이었고 역성혁명 또한 명운이 다한 고려를 방치할 수 없어서 행해진 것이다!”
정도전은 급진파 신진사대부이니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공민왕과 최영은 심히 거슬린다는 반응이었다.
“요동 정벌이 아무리 어려웠다고 해도 회군과 폐왕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너도 똑같은 역적이다, 이놈!”
서로 극상성의 조합이다 보니 분위기가 계속 흉흉하다.
눈앞의 막장 사극을 보며 홍륜이 크게 웃어댔다.
“하하하하! 고려나 조선이나 이렇듯 근본 없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망국의 허깨비들끼리 뭐가 그리 잘났다고 위세를 떨고 있나 그래?”
홍륜은 점차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개입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결국 저만치서 구경만 하고 있던 척준경이 나섰다.
그는 고려 최고의 소드마스터라고 불렸던 영웅이었다.
“자존심도 없는 녀석 같으니.”
뒤로부터 돌연 가해지는 기습.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일격에 여유를 부리던 홍륜이 황급히 등을 돌렸다.
스윽―!
하지만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검성이 내디딘 걸음이었다.
마음마저 무너져 어비스에 의해 정체성이 훼손된 홍륜이 그로부터 쉽게 벗어날 리 없다.
“크윽!”
대퇴부에 깊은 상처를 입은 홍륜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