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경합의 시련 (1)
“운석의 정체에 대해 알아냈습니다. 이건 곧바로 알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달려왔습니다.”
시르케는 어지간히도 서둘렀던 모습이었다.
허리를 숙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이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어떤 내용인데 그렇게 아연실색한 거야?”
전요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시르케의 등을 두드려줬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나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단 듯이 머리를 꼬았다.
“뭐, 단서가 나온 모양이네. 그 마녀가 대재앙이 일어날 거라 선언했으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예상하건대, 유럽에 남아 있는 운석 하나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짐작대로입니다. 영국의 서쪽 바다에 떨어졌던 운석이 활성화되었다고 합니다.”
시르케는 왕립협회로부터 얻은 정보를 자세히 알려주었다.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후, 일행의 표정이 어둡게 물들었다.
“이번엔 해상 유적지라고? 정말로 골치 아픈 일을 저질러 주셨네.”
생각만 해도 곤란한 문젯거리였기에 한나는 투덜거렸다.
일단 바다에 위치해 있단 점 때문에 천공섬과 마찬가지로 접근하기가 어렵다.
“만일에 대비해서 관리국의 도움을 받아야겠어.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날지도 모르니까.”
전요한은 침착하게 대응 방안을 생각했다.
저번처럼 대규모의 공략대를 편성해서 가는 건 아무래도 비효율적이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이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했고, 혼란만 부추긴 격이었던 탓이다.
“저도 정예 부대만으로 시도해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운석은 이능력자들을 타락시키는 힘도 갖고 있으니까요.”
시르케는 운석에 서려 있는 기운의 위험성에 대해 강조했다.
그녀가 예전부터 연구해온 고문서의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그것은 파멸한 신들의 원념이었다.
“네가 해독했다는 고문서, 신빙성은 있는 거야? 이쪽 세계에도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화는 충분히 많아서 말이지.”
한나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고, 물질에 의한 변혁을 꿈꾸는 연금술사로서,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야긴 쉬이 믿을 수 없었다.
“의문을 갖는 것도 당연합니다. 세상엔 의도적으로 날조된 기록도 많으니까요.”
시르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러한 출처를 연속적으로 손쉽게 얻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한 사람만큼은 신뢰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전요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동안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줄곧 인도되어 왔습니다.”
지구의 여신이 배후에서 모든 걸 안배해 놓은 것일까.
아니면 거듭되는 전생의 발자취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알려주는 걸까.
정답은 지난 업을 전승받은 전요한만이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분명, 필연은 존재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도달한 미래야. 그러니까 지금 주어진 기회를 믿자.”
잠시 생각하던 전요한이 의지를 밝혔다.
시르케가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에 가능성을 걸어보기로.
“그 판단이 정확하길 바라. 이제부터는 사소한 실수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테니까.”
한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이쪽으로 현재 계약되어 있는 S급 랭커들 좀 붙여줘. 최소한 3명 이상으로.”
프리메이든 사의 본부에 전력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럼 가보자. 해상 유적지가 있는 곳으로.”
관리국에 상황을 보고한 후, 전요한은 걸음을 옮겼다.
그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과업이 모두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북유럽 신화에 관심이 있다면 에인헤랴르에 대해선 어느 정도 들어본 바가 있을 것이다.
최후의 종말에 대비해 소집된 영웅들의 혼백.
그들은 아스가르드의 발할라에서 매일 서로 결전을 벌이며 그 후엔 성대한 축제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저기가 발할라와 유사한 유적지란 말이야?”
“네, 아마도 이번 시련은 영웅들과의 경합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자세한 건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요.”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며 전요한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질문을 던졌던 한나는 물끄러미 해상의 콜로세움을 바라봤다.
“학원도시에 세워져 있던 모조품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아하네. 마치 영웅들의 혼백이 서려 있는 것 같아.”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곧 영향권하에 들어가니 철저히 대비하도록 해요.”
정예 인원을 통솔 중인 멜리사가 흘끔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긴장감 때문에 신경이 매우 곤두선 상태였다.
“아무튼, 저 안에 들어가면 신화적인 영웅들과 조우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존재도 없진 않을 테죠.”
“역사적 인물이라면… 조금 기대가 되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도 좀 있거든.”
멜리사와 눈싸움을 하던 한나가 기대감을 내비친다.
한편, 그리젤다는 무언가 불안한지 계속해서 눈을 굴리고만 있었다.
“걱정하지 마.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 테니까.”
전요한은 그리젤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보트에서 뛰어내려 콜로세움의 입구 쪽으로 발을 디뎠다.
“저기 벌써 다툼이 시작된 것 같네. 아직은 개인적인 차원인 모양이지만.”
내부를 흘끗 훔쳐본 한나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 위에 몰려들기 시작하는 먹구름.
불길한 상승 기류까지 발생하는 걸 보면 신중하게 행동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아무래도 저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유물을 가지고 싸우는 것 같네요.”
멜리사가 내부의 한쪽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 옥새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일행은 침묵한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격전을 지켜봤다.
각자의 무구를 쥐어 든 채 노골적인 살의를 내뿜는 무장의 화신들이 있었다.
“최충헌, 내 너를 죽여 생전의 치욕을 씻고 저 옥새를 취하리라!”
“천민 출신인 주제에 탐욕이 과하구나! 이의민 네놈이 정녕 무슨 연유로 비참하게 죽었는지 모른단 말이냐!”
이의민과 최충헌.
고려 시대 무신집권기의 유명한 두 인물들이다.
양쪽 다 용력이 출중한 무장이라 장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굉음이 울려 퍼지고 주위 풍경이 이지러졌다.
“의외로 한국의 영웅들이군요.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데….”
“우선은 지켜보죠. 저 둘은 이쪽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니까요.”
옆에서 의향을 묻는 멜리사를 향해 개입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아마도 저 옥새는 삼한의 여러 명장과 군주를 이리로 이끌 터.
개중엔 격이 제법 높은 존재도 있을 것이다.
이의민과 최충헌은 생전의 위업에 매몰되어 멋대로 움직이는 흉기에 불과했다.
누가 먼저 지치나 계속 관망하고만 있을 때 어디선가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옥새에서 썩 물러나라! 감히 일개 무장 주제에 무엇을 탐하려 드는 것인가!”
* * *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익숙한 목소리.
그는 충절과 용맹함으로 유명한 고려 후기의 무장, 최영이었다.
“아니, 너는….”
“무장 주제라니, 너도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출신이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이의민과 최충헌이 서로 물러나며 무구를 거뒀다.
딱히 최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라기보단, 삼파전이 예상되었던 탓이었다.
“그대들이 권력에 눈이 멀어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전횡을 일삼은 결과, 고려가 끝내 망한 것이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최영은 두 무장을 향해 다가가며 계속 호통을 쳤다.
두 무장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어이없다는 실소를 내뱉었다.
“아니, 그건 순전히 네 잘못이지.”
“동북면에서 이민족과 노닥거리던 놈을 데려와 스스로 화를 자초한 자가 누구더라?”
이의민도, 최충헌도 무장이다 보니 최영의 실책에 대해 돌려 말하는 것이 없었다.
요동 정벌을 떠났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해서 능욕을 당했던 일화를 두 사람이 계속해서 떠들어대자 최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 뭣이….”
공민왕 피살 사건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최영의 가장 큰 트라우마들이다.
최영이 아무 말도 못 하자 이의민이 한술 더 떠서 그를 비방했다.
“고려의 수호신이 아니라 정적도 제대로 못 알아보는 호구였던 게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해봤자 무엇 하겠는가?”
본래 역사적인 인물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만나면 서로 못 할 말을 다 한다.
계속 지켜보기에 비위가 상했는지 멜리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분골쇄신하여 나라를 지킨 최영 장군을 저렇게 업신여기다니.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권력이나 누린 자들이 할 말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더 개판이 될 겁니다. 마음 단단히 먹으시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부들부들 떠는 멜리사를 독려한 다음 나는 다음 인물을 기다렸다.
“감히 떠들지 말라. 최영은 만고의 충신, 고려가 망했던 것은 그저 천운이었다.”
이윽고 위엄 있는 표정을 한 채로 걸어오는 한 사내.
대담하긴 해도 생전에 무장은 아니었던 듯한 그 모습에 이의민이 정체를 물었다.
“넌 또 뭐야?”
“고려의 31대 군주이니라.”
공민왕.
그의 사후에 즉위하는 세 명의 왕들은 모두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으므로 사실상 마지막 고려의 왕이다.
뜻밖의 인물이 거동하자 최영의 화신이 황급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대, 대왕이시여. 어찌 이곳까지 행차하셨나이까?”
최영은 공민왕 생전에 그의 개혁 정치를 도와 홍건적, 왜구를 무찌른 공적이 높았다.
공민왕은 최영을 일으켜 세운 후 작금의 노고를 다시 치하했다.
“사후에도 이렇게 내 곁을 지켜줘서 고맙네. 비록 망국의 군주이긴 하나 그대가 있어서 외롭진 않아.”
역사적인 인물들은 당대에 뜻을 함께했던 이들과 재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최영은 여전히 공민왕을 따르며 그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는 일에 앞장서는 중이었다.
“31대 군주라면… 이민족 출신의 왕비가 죽자 남색에 빠져 놀다가 패망한 자가 아니던가?”
“자신의 후비가 너무도 외로운 나머지 친위대의 아랫것과 놀아나자 벌을 주려다 역으로 당했다지요?”
이의민과 최충헌은 공민왕도 별로 무섭지 않은 듯 생전의 일들을 흠잡았다.
둘 다 허수아비 왕을 세워두고 권력을 휘두른 무장이었으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입 닥치거라! 네놈들이 무신집권기의 실세였다고 지금 대왕을 능멸하려 드는가?”
공민왕이 폄하당하자 예상대로 최영은 진노했다.
그가 무구를 치켜들면서 분위기는 한껏 악화되었고 조용히 있던 한나가 우려를 표했다.
“이대로 맞붙으면 곤란하지 않아? 왕까지 등장했으니 본격적인 세력전이 시작될 수도 있어.”
“단순히 화신끼리 맞붙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끼어들 명분이 부족하니까요.”
보아하니 옥새를 누군가 차지하지만 않으면 아직까진 괜찮다.
당분간은 계속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옥새가 왜 중요한 거죠? 자기들끼리 사극 놀이라도 하려고 그러나?”
한편, 멜리사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한다.
“뭐, 상징적인 의미가 있겠지요. 과거에 세운 위업은 이런 무대에서 저들의 영향력 그 자체입니다.”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기고 그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는 존재가 더 높은 위계를 차지한다.
그렇기에 망국의 옥새라고 해도 중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업이 뒤얽히기 시작하면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기존의 것과 연관성이 있어야 유리한 탓이다.
“결국 저들은 과거의 생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거네. 어떻게 보면 딱한 운명이야.”
아직도 언성이 오가는 이들의 모습에 한나가 자신의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저 길을 잃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대업을 추구하기엔 서로의 반목이 심하고 신뢰도 부족한 거지요.”
어쩌면 저들을 설득하여 대재해가 발생하는 걸 막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새롭게 국면을 바꾸는 인물이 등장했다.
“피곤하군요. 옥새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 이거 공민왕을 제외하곤 전부 무장뿐입니다그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