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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60화 (160/180)

제160화. 베스트셀러 작가 (4)

방심하고 있던 한나가 기겁하며 혼자서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공간 도약인가?”

이번엔 갑작스러운 출현이라 그녀를 비롯한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세계를 멸망시키겠단 이야기를 할 셈입니까? 그것이 당신이 창조된 목적이라는 이유만으로요?”

전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은발 여인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두 팔을 벌렸다.

“모든 건 세상의 순리대로예요. 시작에는 끝이 있는 법. 신들조차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죠. 당신은 무한히 쌓여가는 필멸자들의 업에 의해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길 원하나요?”

우주의 공간이 확장되어 가듯, 세계도 새로운 차원이 생겨나며 그 규모를 키우고 있었다.

만약 이것을 내버려 둔다면 언젠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태초의 신족도 그 억제법을 찾으려다가 의견이 충돌하여 공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죽어야 한단 주장은 말도 안 돼. 끝없이 창조와 소멸을 반복하는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어?”

전요한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단 표정이었다.

그리젤다도, 한나도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들의 세계가 잘못되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꿈에 불과해요. 당신들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정체성 또한 허상이죠. 그동안 수어 번이나 환생해왔으니 이제는 그 사실을 깨달으셨을 텐데요?”

은발 여인은 모든 것이 삶에 대한 집착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생명체는 신의 섭리를 불완전하게 떠받드는 부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시련을 내리겠단 거지? 이 천공섬이라도 떨어뜨려서 지구에 타격을 줄 셈이야?”

“얼추 맞추셨군요. 다음 무대는 바다가 될 것입니다. 아직까지 인류가 제대로 정복하지 못한 영역 중 하나죠.”

한나의 질문에 은발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보여줬던 악의와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마신께서 강림하는 그 날까지 원하는 만큼 발버둥 치세요. 당신들의 선택까지 간섭하지는 않겠어요.”

그것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여유이기도 했다.

언젠가 깨어나게 될 마신에 의해 세상은 다시 한번 절멸을 맞이하게 될 터.

신화시대에 이어 황금시대도 조만간 막을 내릴 운명이었다.

“마신이라면, 예전에 타락해서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타천사를 말하는 거야?”

“그분의 과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찌 되었건, 대혼돈의 차원에서 최상위 서열을 차지한 존재니까요.”

원래대로라면 최초의 신족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대적하지 못할 포식자였다.

그런데 연인이었던 릴리스가 먼저 봉인당하면서 그를 오랜 시간 잠들게 할 방법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간을 끄는 전략이었을 뿐, 마신은 다시 눈을 뜨게 될 예정이었다.

“그럼 건투를 빌어요. 다음에 또 만나면 새로운 질문을 받아드리죠.”

은발 여인은 말을 마친 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천공섬에 균열이 생겨나며 지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구심점을 잃은 땅덩어리가 점차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자 전요한 일행은 탈출을 서둘렀다.

* * *

천계의 연옥.

절대선에 귀의한 영혼들이 정화되기 위해 머무르는 차원이었다.

그런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신성한 불길이 타오르는 옥탑의 독방에 홀로 유폐된 채 말이다.

“…이런 결말은 납득할 수 없어.”

원죄의 마녀, 릴리스.

그녀가 고통스럽게 귀를 막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회개를 강요하는 천사들의 환청이 들려온 지도 몇 주가 지난 상태다.

“깨워야만 해. 창세기의 마신을….”

오래된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마신은 필요하다.

태초의 신족에 의해 왜곡되어 왔던 선과 악의 구분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순종적이지 못하단 이유로 천계에서 추방되었던 과거의 흑역사.

자신을 버린 자들과 맞서기 위해 릴리스는 기꺼이 악녀가 되었고, 그동안 재기의 기회를 노려왔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지. 복수를 할 대상이 먼저 사라져 버리면 곤란한데.”

지난 과오를 되짚어보며 릴리스는 시스티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엔 여자애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방심한 나머지 당해버리고 말았다.

“그년이 예지의 권능을 지녔단 것만 알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겪진 않았을 텐데.”

시스티나는 최초의 신족 중에서도 자질이 뛰어난 여신이었다.

그녀가 무사히 살아 있는 한, 세계의 질서는 어떻게든 유지되고 있을 터다.

“하지만 내 아이들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금쯤 여기저기서 상당한 혼란을 일으켰겠지.”

인과율이 뒤얽히면 예지의 권능으로도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이변을 일으키면 분명 마신은 오랜 잠으로부터 깨어나겠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릴리스가 침착하게 계획을 다시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딸랑.

어디선가 맑은 종소리가 들려온다.

예전에 들었던 적이 있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든 릴리스의 시야에 작은 아기 천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회개할 생각 없으니까 꺼져.”

“당신의 마음속에서 주저하는 게 느껴져요. 정말로 예전의 순수한 인격을 죽일 생각인가요?”

순수한 인격.

타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의외의 질문에 릴리스는 멈칫하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고작 광명신의 권속 따위가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전 당신을 위해 남겨진 안배예요. 그래서 세계가 재구축된 후에도 기억이 온전히 남아 있죠.”

아기 천사는 릴리스가 낙원에 머무르던 시절부터 존재해온, 위계 낮은 권속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

매사에 불만이 많았던 자신의 말 상대가 되어준 녀석이었다.

“너를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재미있구나. 예전과 많이 달라진 내 모습이 혐오스럽지 않니?”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그저 상처 입고 아파했을 뿐, 아직도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이 바로 내면의 순수함이 남아 있음을 증명해요.”

아기 천사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고는 릴리스의 손을 붙잡고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회유했다.

“당신의 순수한 인격은 오랫동안 봉인된 채 사념 세계에 갇혀 있었어요. 그래서 그 소중함을 망각해버린 걸지도 몰라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녀를 잃지 마세요.”

한때는 릴리스도 인간이었다.

물론, 최초의 인간 중 하나란 점에서 그 격이 다르지만 영생을 얻은 마녀가 되기 전엔 유약한 존재였단 의미다.

원래대로라면 당시의 인격은 오래전에 동화되어 사라져야 했다.

그런데 릴리스는 그녀를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가두어놓고 정체성이 흩어지지 않도록 조치해 두었다.

후일 모든 과업이 끝나고 나면 다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유희를 누리기 위해.

새로운 창세기를 여는 첫 여주인공이 되는 게 릴리스의 염원이었고, 따라서 순수한 인격은 그녀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만약 그걸 잃어버리면 더는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기 천사가 경고하자, 릴리스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마신을 깨우려면….”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이미 수많은 필멸자들을 피의 제단에 바쳤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데도 부족한 지경이라 필사의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집착에 사로잡힌 릴리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딸랑.

다시 한번, 맑은 종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비취색 머리칼의 어린 악마종이 자신을 향해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는….”

오래 전에 바깥 세계로 떠밀어 보냈던 순수한 인격.

그것이 현생자라는 화신으로서 구체화된 존재였다.

릴리스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주저하던 도중, 어린 악마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계속 살아가고 싶어. 더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고 전요한과 함께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싶어.”

내면의 순수한 인격이 소망하는 한 가지의 바람.

그건 창세기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도, 마신의 재림도 아니었다.

아무도 관심 가져 줄 리 없는 일반인의 삶.

오래도록 전승되는 이야기가 될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업의 위계에도 관심이 없다.

눈앞의 악마종을 말없이 쳐다보던 릴리스는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하구나. 그 바람은 들어줄 수 없단다. 왜냐하면 너는 처음부터 마신을 깨우기 위해 내보내진 존재니까.”

물론, 기억을 망각한 악마종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운명에 이끌려 가겠지.

이윽고 악마종의 모습이 릴리스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아기 천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선택의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요. 아직 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단 사실을 잊지 말아요.”

모든 건 그녀의 정체성이 다시 하나로 합쳐질 때 결정될 터였다.

릴리스와 그리젤다.

오래전에 분리되었던 정체성이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하게 되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주어진 임무를 다했음을 확인하며 아기 천사는 조용히 물러났다.

* * *

전요한 일행은 겨우 해안가에 도달했다.

관리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쯤 지중해의 어딘가를 표류하고 있었을 터.

별일은 없었지만, 저질 체력인 알티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아, 하아.”

그녀는 일반인이기도 하므로 일단 호텔에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는 편이 좋아 보였다.

“멜리사 씨가 숙소까지 태워드릴 겁니다. 거기서 당분간 지내대록 하세요.”

“감사해요. 그건 그렇고, 은발 여인의 말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요?”

부축하는 전요한을 향해 알티나가 질문을 던졌다.

멜리사가 다가오며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현재로선 밝혀진 게 없습니다. 뭔가 단서가 나오면 공유해 드리죠.”

분명 재해를 일으킨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이변이 없었다.

관리국의 요원들이 지중해 일대를 면밀히 수색 중이라고 하니 조만간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알티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멜리사와 함께 검은 차량에 탔다.

이후 검은 차량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한나가 중얼거렸다.

“병약한 것치고 당돌한 아이네. 이런 판국에 재해의 근원에 대해 궁금해하다니.”

한나는 아까 전부터 몹시 불안한 표정이었다.

프리메이든 사도 그동안 운석에 대해 연구해왔는데, 괜히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게 아닌가 하는 의문감 때문이다.

“어떻게든 될 겁니다. 지금까지도 난관을 잘 헤쳐 왔잖아요?”

옆에 있던 전요한이 씨익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셋이서 잠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때였다.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통해 잠시 잊고 있던 존재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왔다.

- 왕립학회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겠습니다.

시르케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심상치 않은 내용이라 전요한은 표정을 굳혔다.

“중요한 사실이라, 혹시 운석에 대한 걸까?”

자세한 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편이 빠를 듯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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