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베스트셀러 작가 (3)
“휴가 계획이 망쳐져서 그런지, 상당히 화가 나네.”
한나는 상당한 저기압 상태였다.
휴양차 영국으로 오고 나서도 복잡한 사건에 시달린 모양이다.
“일단 문제를 일으킨 범인들부터 붙잡죠. 제겐 권한이 있습니다.”
비공식적이지만 전요한은 관리국으로부터 죄악의 사도에 대해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다.
따라서, 국외로 나와 있더라도 저들을 제압할 명분은 충분했다.
“용의주도한 놈들이야. 사전에 모든 걸 계획해 놓았어.”
한나가 여기저기에 숨겨져 있던 인화성 물질을 가리킨다.
그녀의 적절한 진압 덕분에 테러의 피해가 최소화되었다.
“유럽의 사건을 조사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가요?”
“그래, 맞아. 조사를 계속해보니 크라이시스 사의 회장이 배후에 있는 것 같더라고.”
크라이시스 사의 회장이라면 얼마전에 협조를 요청했던 앨런이었다.
그 자의 사생활이 문란한 걸 보고 바로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이번 테러 사건을 제압하고 난 후에 곧장 죄를 물을 것이다.
“범인들은 어디로 도망쳤죠?”
“지하철역 쪽이야. 몰려드는 인파에 파묻혀서 잠적할 셈이겠지.”
한나의 말에 의하면 놈들은 전원이 범행 전에 기괴한 기면으로 위장한 상태였다.
그러니 가면만 벗어 던지면 수월하게 정체를 숨길 수 있으리라.
요새는 외국인도 많아서 한데 모여서 관광객인 척할 수 있다.
“곤란하네요. 설마 정말로 사건이 터질 줄은….”
알티나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특성이 병약 미소녀인데, 중간에 기절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기계종의 정보수집 능력을 좀 빌려야겠군.”
일행과 함께 지하철역으로 달려가며 전요한은 상공을 배회 중인 드론을 호출했다.
- 혹시 이쪽 주위에 배치해둔 소형 개체가 있으면 보내줘. 위치는 공유할게.
방금 연락한 드론은 기계종의 최상위 관리자, 알베르티의 지시에 의해 이쪽 세계로 넘어와 전요한을 돕고 있었다.
본래 한 기밖에 되지 않았으나, 무한양산이 가능한 기계종의 특성으로 최근에 동료가 늘었다.
신기술이 발달하여 자율주행 자동차도 나오고 하니, 이 같은 소형 개체가 돌아다니는 건 별 이슈가 되지 않는다.
- 알겠습니다. 다급하신 모양이니 지금 바로 준비해 드리죠.
드론은 몇 초 만에 문자 메시지로 답신을 해왔다.
기계종이라서 녀석은 굳이 휴대폰을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
자신의 기체를 보완하여 그 기능만 추가하면 되니까 말이다.
조금 기다리자, 소형 바이크 형태의 기계종이 전력 주행하며 홀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기 타시죠, 알티나 님.”
“이건 뭔가요?”
“자율주행 관련한 신기술이 탑재된 차세대 이동 수단입니다.”
기계종이 편입된 세계관은 이처럼 편의 기술의 발전을 가속화할 것이다.
탑승을 권하자 알티나는 조금 부끄러워하다가 바이크 위에 올라탔다.
“무,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치마를 입고 와서….”
알티나의 오늘 복장은 흡사 아이돌이 입는 제복 같았다.
치마가 조금 짧아서 신경 쓰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를 태우고 있던 기계종이 문제를 해결해줬다.
삐리릭―
근처에 있던 다른 개체와의 교신을 통해 어디선가 금속 합금 소재의 치마를 제작해온 것이다.
언제 치수를 쟀는지 사이즈도 맞고 무게도 가벼워서 알티나는 상당히 만족했다.
“현대 과학의 신기술은 정말 놀랍네요. 차기작에서 소재로 활용해야겠어요.”
아무튼, 문제는 이게 아니다.
지하철역 주위를 계속해서 수색하며 나는 알베르티와 새롭게 교신을 했다.
- 주위의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수상해 보이는 자들을 찾아줘. 대략적인 인상착의를 알려줄게.
감시용 드론들이 수도권의 상공을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수사기관의 협조가 없이도 범죄자들의 위치를 어렵지 않게 추적해나갈 수 있었다.
-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들이 확인되었습니다. 실시간으로 그들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전송하겠습니다.
덕분에 사건은 금방 해결되었다.
범죄자들을 발견한 그리젤다가 염력으로 움직임을 봉쇄했고,
“자, 이걸 집중해서 잘 보도록 해.”
곧바로 한나가 다가가서 회중시계로 자기 암시를 걸어버렸다.
검거된 수는 다섯.
놓쳐버린 놈들도 있는 듯했지만, 상당한 쾌거였다.
“이전보다 범죄자를 잡는 방식이 매우 세련되어졌는데? 수사 기관에서 파견된 전문가라고 해도 믿겠어.”
범인들을 무릎 꿇린 채 채찍질하던 한나가 문득 칭찬을 건넸다.
전요한은 어깨를 으쓱한 후에, 옆쪽의 관리국 요원을 응시했다.
“보셨죠? 저들은 크라이시스 사의 끄나풀입니다. 그동안 여기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악마 숭배 집단의 배후라는 거죠.”
이로써 관리국도 결단을 내려야 할 결정적인 증거가 잡혔다.
크라이시스 사가 상당한 규모의 기업인 탓에 이들은 그동안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이건 협회 본부에까지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사안이야.”
파견나왔던 관리국 요원은 사태의 위중함을 이해했다.
그동안의 소동으로 죄악의 사도를 소탕해야 한단 문제의식이 내부적으로 커져 있었다.
“그런데 저번 작전의 정산금은 왜 아직도 입금해주지 않은 거죠? 분명 신속하게 처리해 주신다고 했는데.”
“아아, 미안. 최근에 무슨 일이 있는지 상부에서 승인을 늦게 해주는 모양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간단히 사과한 후, 관리국 요원은 상관으로 보이는 자와 다시 통화를 계속했다.
“당신네들, 일 좀 똑바로 처리해. 테러범이 이렇게 설치고 다니는데 너무 한가로운 것 아니야?”
굳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며 한나는 관리국 요원에게 성화를 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녀는 프리메이든 사의 장녀였다.
딱히 관리국 소속도 아니고, 어쩌다보니 함께 얽힌 셈이다.
“뭐, 나라고 늦장 대응을 하고 싶었겠어? 따지려거든 상부에 하도록 해.”
관리국 요원은 자기 소임이 아니었단 듯이 책임 회피를 했다.
사실 그에게 잘못을 묻기엔 주어진 권한 자체가 작긴 하다.
하는 수 없단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멜리사가 뒤늦게 나타났다.
“이번 일도 보고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이제 다들 귀가하셔도 될 것 같네요.”
크라이시스 사에 대한 처벌은 관리국의 특수요원들이 맡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알티나가 의향을 묻는다.
“새로운 음식점을 알아봐주실 건가요? 도중에 사고가 터져서 제대로 즐기질 못했는데요.”
갑작스러운 혼란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겼을 법도 한데, 대단한 집념이다.
그만큼 이번 기회에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것이겠지.
그녀의 바람을 들어줄 겸, 멜리사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해봤다.
“저번에 친분이 있는 유명 음식점에 대해 말씀해 주셨죠? 귀한 손님이 있어서 그런데 오늘 자리 좀 내줄 수 있는지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아, 네. 물론이지요. 복귀하자마자 또 사건 처리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그 정도의 대접은 제공하겠습니다.”
멜리사는 호의적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어디론가 한 차례 통화를 하던 그녀가 잘 나가는 쉐프의 명함 하나를 건네줬다.
휴대폰으로 검색해보니 이전에 우리가 방문했던 곳보다 수준이 더 높은 음식집이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시길.”
멜리사는 미묘한 웃음을 날린 후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에 서류철을 뒤적이던 관리국 요원이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젠장, 나는 오늘도 철야 근무인데 부럽군.”
“그쪽은 늦장 대응이나 하며 별로 일도 하지 않았잖아요? 부러워할 걸 부러워해야죠.”
따끔한 일침을 날린 후, 일행과 함께 사무실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오늘 밤만은 누구보다도 호화스럽게 회식을 즐기고 싶었다.
* * *
유명 쉐프가 운영하는 최상급의 한식집은 확실히 레벨이 달랐다.
같은 종류의 음식에도 격이 있단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고, 특히 알티나와 한나가 만족감을 드러냈다.
“낮에 고생했던 걸 완전히 보상받은 기분이에요.”
“아아, 휴가 온 게 아닌데 기분이 좋아지네. 이걸로라도 정신 승리를 해야겠어.”
알고보니 양쪽 모두 맛있는 음식에 조금 약한 타입이다.
“그렇지, 그렇지? 양질의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한편, 그리젤다는 어느덧 맛집 감별사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싱글생글 웃는 걸 지켜보고 있으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슬슬 숙박할 호텔을 예약해야겠네요. 더 늦어지기 전에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무렵, 현재시간을 확인하던 알티나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한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검지로 나와 그리젤다 쪽을 가리켰다.
“이미 우리와 같이 다니는 것이 목격되었으니 혼자 숙박하긴 위험해. 조금 불편하더라도 저 녀석들의 숙소에서 생활해줘.”
“네에…?”
뜻밖의 권유에 알티나가 멍하니 눈을 깜박인다.
한편, 그리젤다는 좋은 생각이란 듯이 그녀의 팔을 잡아끈다.
“맞아, 맞아! 우리가 묵는 곳에 적당한 방 하나가 더 있으니까 거기서 지내요, 알티나 님!”
졸지에 식객이 한 명 늘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
알티나의 이능력에 대해 이대로 넘어가기는 조금 찝찝했었다.
“아, 알겠어요. 혹여라도 납치되면 여러분에게 전부 민폐를 끼치는 셈이니까….”
알티나는 우물쭈물 말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갑자기 얼굴을 붉힌다.
알티나는 육안상으로 기껏해야 여고생 정도 되는 나이였다.
“다들 피곤하실 테니 그만 되돌아가죠. 오늘 못 가본 장소는 내일이나 모래에도 기회가 있으니까요.”
이번 사건으로 크라이시스 사의 만행이 확실히 밝혀졌긴 해도,
당분간은 관리국의 대처를 지켜보며 현지에 머물고 있어야 한다.
여긴 대미궁이 아니라 현실 세계, 자본과 권력의 논리가 중요한 시대였다.
“오빠, 내일은 어디서 뭐 하고 놀지 생각해뒀어?”
함께 음식점을 빠져나오던 그리젤다가 돌연 향후의 계획을 물었다.
전요한이 고개를 젓자 그녀는 잘됐다는 듯이 웃어 보인다.
“그럼 운석과 관련된 장소들을 둘러보자! 알티나 님에게 좋은 창작 소재가 될 거야!”
창작 소재라.
물론, 이쪽에서도 충분히 현지 답사를 나갈 필요성은 있었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합치하는 일이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하자.”
내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 * *
세계관상의 균열이 생겨난 이후,
현실 세계엔 수많은 유적지들이 생겨나서 기존의 풍경과 뒤얽혔다.
이러한 현상은 이세계적인 요소가 균열점을 통해 내포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세계관은 외부적인 위기를 경험하며 점차 확장되어 가고 있단 의미다.
물론, 혼란상을 견뎌내지 못하면 그대로 무너지고 말겠지만
새로운 균형점을 형성하여 통합에 성공하면 일종의 변혁이 일어난 것이라 봐야 한다.
“만약 이게 건재했다면 무슨 일이 발생했을까.”
천공섬의 무너진 마탑을 올려다보며, 전요한은 잠시 감상에 젖었다.
일반인은 접근이 제한된 구역이었지만, 그의 일행은 관리국의 특별허가를 받은 터였다.
“내부의 각층은 던전으로 통해 있었을 테니 엄청 오래 걸리지 않았을까요? 전요한 님께서 공략하셨다던 대미궁에 비할 법했겠네요.”
인류의 대위기가 닥칠지도 몰랐단 사실에 알티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현지 답사를 왔던 그리젤다도 머리를 긁적인다.
그녀들과 함께 운석과 관련된 단서를 찾아보고 있을 때였다.
“슬슬 시련에 본격적으로 도전할 마음이 드신 모양이네요.”
전에 한 차례 조우한 바 있는 은발여인이 돌연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