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57화 (157/180)

제157화. 베스트셀러 작가 (1)

“내가 싫은 거야? 왜 자꾸 거부하고 피하는데?”

채린은 더욱 과감하게 신체를 밀착해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애정의 대상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지금 너는 마녀의 의지에 잠식되어가고 있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점차 자아가 붕괴되고 말거야.”

전요한은 양손으로 채린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역으로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힌 후 똑바로 눈을 바라봤다.

“자아가 붕괴돼? 내가?”

채린이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위기의식을 느꼈던 탓인지 잠시 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다.

“어라? 그러고 보니 왜 둘이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부 기억나지만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식으로 전요한을 요녀처럼 유혹하다니.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어. 마녀의 자질은 마치 저주처럼 우연히 발현되는 거니까.”

“저주라고?”

“그래, 분명 풀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전요한은 침울해져 있는 채린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그러자 채린은 뒤늦게 수치심을 느끼고는 얼굴을 붉힌다.

“어, 어서 나가줘! 계속 이러고 있으니까 쑥스럽잖아!”

채린은 현재 블라우스를 절반쯤 벗은 상태였다.

그녀가 양손으로 상체를 가리자 전요한은 무안해하며 뒤돌아섰다.

“오늘은 좀 분위기가 이상해졌으니까 다음에 만나자. 먼저 돌아갈게.”

계속 있어봤자 대화가 진전될 것 같지 않았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채린을 뒤로한 채, 전요한은 숙소로 돌아왔다.

온수에 목욕한 후,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웠다.

“오빠, 잘 거야?”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리젤다가 머리를 들이민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아까 사왔던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권이나 읽을래.”

저번부터 탐독하던 시리즈인데 오늘 마무리를 지을 모양이군.

별생각 없이 그리젤다에게 질문을 던졌다.

“작가는 누구야? 상당한 인기작이라고 했었지?”

“음… 필명은 알티나인데 소개란에 영국인이라고만 나와 있어.”

영국인이라.

익명을 사용하는 걸 보면 대인 접촉을 꺼려하는 타입 같다.

소설의 내용이 이쪽 세계엔 전승되지 않은 실제 신화와 많이 유사해서 의문점을 자아낸다.

직접 물어보고 싶지만 만날 기회따윈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응? 알티나가 팬 사인 이벤트를 할 예정이래. 조만간 한국에서.”

휴대폰으로 검색해보던 그리젤다가 탄성을 내지른다.

잠시 눈을 붙이려던 전요한은 그녀를 향해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응응. 유명한 작가인가 봐. 첫 작품인데도 대박이 나서 곧 애니메이션까지 나올 예정이래.”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전개다.

호기심이 동해져서 직접 휴대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주황색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의 병약 미소녀. 취미는 온라인 대전 게임. 이상형은 잘생긴 군 전역자….”

최근 유행하는 SNS에서는, 알티나에 대한 사적인 정보가 공유되고 있었다.

검색을 통해 확인해보니 알티나의 방문 일정은 내일모레였다.

“와아, 나도 만나고 싶어. 악수하고 사인까지 받을 거야.”

갑작스럽게 예정된 접선에 그리젤다가 기대감을 내비쳤다.

서브 컬처에 입문하게 해준 장본인이니 경외감이 생기는 모양이다.

“함께 가자. 또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닌지 걱정되지만.”

이대로는 잠이 오지 않아서 SNS로 알티나에게 연락을 시도해봤다.

“이제야 계정 만드는 거야?”

“응, 난 평소에 이런 어플은 거의 안 했거든.”

사교 모임이나 문화 교류가 싫다기보다는, 별로 흥미를 못 느꼈었다.

그럴 듯한 닉네임까지 지어냈는데 정작 프로필 사진이 문제다.

“오빠는 뭘로 할 거야? 난 직접 그린 캐릭터 이미지로 했어.”

그리젤다가 자랑하듯이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보여준다.

고민하고 있던 전요한은 순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걸 직접 그렸다고?”

“응, 유튜브에 올라온 작화법대로 따라 해봤는데 잘됐어.”

이제는 그리젤다도 현대 문물에 많이 적응한 것 같다.

말이 나온 김에 그녀에게 간단한 캐릭터 이미지를 부탁했다.

“디테일한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임시적으로 사용할 요량이니.”

“잠깐만. 금방 그려줄게.”

그리젤다는 전문적인 어플을 실행하더니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섬세한 작화법은 아니긴 한데, 휴대폰으로 저렇게 그릴 수 있는 것도 상당한 재능이다.

“다 그렸어.”

신기한 기분으로 보고 있으니 어느덧 캐릭터가 완성되었다.

호감형으로 표현되어서 그런지 주관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고마워, 그리젤다.”

포상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곧바로 알티나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녀가 가장 최근에 남긴 것에 덧글의 형태로 말이다.

- 알티나 : 한국에선 요새 재해가 많이 일어난다던데 조금 걱정이 되긴 하네요. 하지만 역시 팬분들이 계시니 괜찮겠죠?

∟로안 : 물론입니다. 최근에 거진 정리가 되어서 안전해졌거든요. 그런데 평소에 작품 구상은 어떻게 하세요? 개인적으로 궁금합니다.

로안이란 닉네임엔 딱히 별 의미는 없었다.

그저 이세계적인 이름을 쓰는 편이 이쪽의 서브 컬처에선 친밀감이 느껴질 거라 생각했을 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시 기다리자, 새로운 댓글이 달렸다.

∟알티나 : 음… 그냥 자유롭게 떠올리는 편이에요. 전 세계의 설화를 참고하기도 하고, 다음 전개가 막히면 제가 좋아하는 스팀펑크 성향의 로큰롤을 듣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답변이다.

보통 스토리를 구상할 땐, 신화나 전설을 모티브로 삼는 경우가 많지.

취향에 맞는 음악도 영감을 얻기 위해 자주 도움을 받을 터다.

작가로서 활동해본 적은 없지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내용.

지레짐작이긴 해도 뭔가를 숨기고 있단 느낌이 조금 들었다.

그녀는 이세계의 신화 내용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나저나 취향은 특이하네.”

온라인 대전 게임과 스팀펑크 성향의 로큰롤을 좋아한다라.

특히 후자는 마니악해서 어떤 느낌인지조차 상상하기 어렵다.

“알티나 님은 건강했으면 정말 활동적이셨을 것 같아.”

함께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던 그리젤다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병약 미소녀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뭐, 그럴지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이대로 의심을 거두기에는 여전히 찝찝한 면이 있다.

팬 미팅도 공개된 장소에서 진행될 테니, 알티나와 사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서 솔직한 답변을 듣게 될지 고민해 봤다.

“단기간에 친해지긴 어렵겠고, 협회의 도움을 받기도 애매하네.”

영국에 있는 멜리사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하나.

관리국의 요원을 끌어들일까 고민하자, 그리젤다는 반발하는 반응을 보였다.

“알티나 님은 나쁜 사람 아닐 거야! 숨기는 게 있어도 일단 정중하게 대해야 해!”

바로 옆에 극성팬이 있단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후, 어떻게든 SNS를 통해 기회를 마련해 보기로 했다.

∟로안 : 사실 저는 마탑의 생존자인데, 그동안 이세계적인 요소들을 다양하게 경험해 봤습니다. 한번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은데, 한국에 오시면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비밀 댓글)

비밀 댓글로 작성한 이유는, SNS엔 수많은 이들의 눈길이 쏠리는 탓이었다.

여기서 전요한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면 아마 난리가 나겠지.

공개 석상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건 최대한 삼가긴 했으나, 여태까지의 활약으로 그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알티나 : 흥미롭네요. 안그래도 차기작의 소재를 고민하던 차인데, 최근 이슈가 되는 것들이라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일단 팬 미팅에 나와서 간단히 이야기를 해보실래요?

(비밀 댓글)

역시, 이런저런 유혹 요소로 꼬드겨도 사적인 만남은 신중하게 판단하는 느낌이다.

하긴, 병약 미소녀라면 괜히 이상한 사람과 접촉했다가 화를 당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알티나와의 접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좀 더 강하게 밀어붙여 보았다.

∟로안 : 물론, 팬 미팅은 참여할 생각입니다. 혹시 제가 꺼림칙하신 거라면 먼저 실명을 밝히겠습니다. 이름은 전요한이고 세간에서 자주 언급되는 장본인입니다.

(비밀 댓글)

아마도 알티나는 이능력자가 아니겠지만, 자신에 대해 알고는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있었던 사건들이 여러 차례 신문 등에 대서특필되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자신의 활약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2차 창작 중이었다.

유명한 영화나 만화의 장면들을 편집하여 패러디하기도 하고 말이다.

∟알티나 : 정말인가요? 제 게시글에 한국의 영웅님이 댓글을 달아주고 계실 줄은… 사실 이번에 방문할 때 꼭 만나 보고 싶었어요.

(비밀 댓글)

정체를 드러내자 역으로 그녀가 자신의 팬이 된 기분이다.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로안 : 다행이네요. 팬 미팅이 끝나면 카페같이 조용한 데서 여유 있게 이야기를 나눠 보죠.

(비밀 댓글)

이렇게 쓰고 보니 자신이 알티나를 유혹하는 것 같다.

오해의 소지가 있겠다 싶었는데, 옆에서 구경하던 그리젤다가 곧바로 그 점을 지적해온다.

“오빠, 설마 알티나 같은 병약 미소녀가 취향인 거야?”

새침하게 눈빛이 변한 걸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분명하다.

누가 들으면 내가 툭하면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인 줄 알겠군.

생각해보니 기회가 많았긴 한데, 연인 관계로까지 발전시킬 마음이 생겨나지 않았었다.

그런 건 나중에 현실 세계가 평화로워지고 일상적인 나날들이 계속될 때 고민해봐도 되지 않을까?

당장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아서 연애 따위는 한동안 잊고 싶다.

그리젤다에게 변명을 하며 전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인기 작가, 알티나의 팬 미팅 장소.

제법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고,

전요한과 그리젤다는 이벤트의 주인공이 나타나길 학수고대했다.

“알티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병약 미소녀라고 했으니 분명 예쁠 거야!”

특히 그리젤다가 가슴 벅찬 감정을 드러낸다.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귀여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팬 미팅이 끝날 때까진 되도록 말을 아끼고 있어. 시선이 집중되는 건 피해야 하니까.”

이젠 나도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사건을 하나씩 해결할 때마다 이슈몰이를 하다 보니, 네임드처럼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나마 환골탈태를 해서 외모가 격변했기에 실제로 알아보는 사람은 적다만.

마음먹고 뒷조사를 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감시와 추적이 가능하다.

앙탈 부리는 그리젤다를 다독이고 있을 때, 앞쪽에서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황색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

연령은 여고생 정도 되어 보이는데, 부엉이 같은 디자인의 안경이 특징적이었다.

알티나.

직접 만나 보니 제법 작가로서의 분위기가 있다.

초히트를 친 유명작, ‘신좌의 주인’으로 유망 업계에서 러브콜을 받는 영국 미소녀.

평범하게 살아가고자 한다면, 이미 평생 먹고 놀 돈은 번 것 같다.

“반가워요, 저는 알티나라고 해요.”

수줍게 첫 인사를 하며 내뱉는 한국말.

생각보다 유창해서 그런지 현장은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사인해 주세요, 알티나 님!”

“악수하면서 사진 찍고 싶어요!”

서로 먼저 만나 보겠다고 뒤얽혀 싸우는 것이, 정말 난리도 아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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