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운석의 비밀 (6)
“크윽!”
전요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맞부딪친 충격의 여파로 금방이라도 몸이 날아갈 것만 같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버텼다.
여기서 무릎을 꿇으면 모두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그의 의지를 강하게 붙들었다.
- 기억해 내세요. 당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성장해 왔는지. 전생의 미숙함을 발판 삼아 몇 번이나 더 도약하여 여기까지 도달했는지.
어디선가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포근하면서도 그리운 존재.
그녀의 형상이 배후에서 나타나 전요한을 살포시 감싸 안는다.
-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모두에게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세요. 저의 단 하나뿐인 영웅님.
여신은 격려하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이후 전요한에게 내려진 은총이 완전히 베일을 벗으면서 진정한 실체를 드러낸다.
휘아아아–!
날개를 펼친 불사조의 형상이 카이젤을 집어삼켰다.
운석의 힘으로 마왕이 된 그조차도 모든 걸 정화하는 업화의 불길엔 당해낼 길이 없다.
“이, 이럴 수가.”
순식간에 역전당한 카이젤은 환각을 보았다.
전요한을 뒤따라서 함께 달려드는 수많은 인물들의 모습을.
그들은 각자 다른 인생을 살았으나, 한 가지의 공통된 목표에 의식이 집중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중한 이들을 지키겠다는 의지인가?’
순수하게 미래를 향하는 집념이 한계를 뛰어넘고, 새로운 지평선을 열고 있다.
그 너머의 희망을 얼핏 본 카이젤은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이길 수 없다. 지켜내기 위해 몇 번이나 전생을 거듭해온 녀석을 상대로는.’
왜냐하면, 자신에겐 더 이상 지킬 수 있는 존재가 없었으므로.
실제로 카이젤이 휘두른 뇌창은 전요한에게 닿지 못했다.
촤아아악!
어느 때보다도 거세게 일어났던 업화의 불길은 그대로 카이젤을 두 동강 내며 지나갔다.
마왕의 재생력으로도 원상 복구할 수 없는 치명상.
바닥에 힘없이 쓰러진 채, 카이젤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나는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거였어.”
사랑하는 연인조차 지켜내지 못한 것에 분노했다.
인류를 멸망시키면 그녀를 정말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걸까.
단지, 어두운 사념의 현혹에 넘어가 멋대로 이용당했을 뿐이었다.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걸 느끼며 카이젤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가 말없이 최후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 당신은 충분히 노력했어요. 그러니 자책하지 말아요. 언제나 부족한 건 저였으니까요.
피오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카이젤의 곁에 머물렀다.
환영일 뿐이었지만, 그녀의 의지가 남아 있단 점에서 진짜 그녀와 다름없었다.
“미안해. 멋대로 행동해 버려서.”
꿈속의 세계에서 영원히 함께했더라면, 이런 추태는 보이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피오나의 의도를, 그녀의 배려를 알아주지 못한 것이 한심했다.
- 사과할 정신이 있으면 그만 중얼거리고 어서 일어나요. 다들 기다리고 있잖아요.
아무래도 괜찮다는 듯, 피오나가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녀의 뒤쪽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운석의 폭주를 막는 작전에서 희생되었던 관리국의 동료들.
기억 속의 모습대로 얄궂으면서도 친근감이 느껴진다.
“대장, 이대로 피오나만 떠나게 내버려 둘 거야?”
“사후 세계에서는 행복하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결혼식 올리고 제대로 함께 시간도 못 보냈으면서.”
“걱정된다고 형수님이 여기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덕분에 우리도 성불하지 못하고 함께 있었다고.”
저들에게 있어 생전의 일들은 이미 모두 끝난 것이었다.
카이젤은 피식하고 웃은 후 몸을 일으켰다.
“죽어서까지 너희들의 대장 노릇을 해야 하는 거냐? 편하게 지내는 건 꿈도 못 꾸겠군.”
하지만 피오나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설령 그 종착지가 지옥의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설레는 마음을 뒤로 하며 카이젤은 모두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눈부신 섬광이 그들의 모습을 집어삼켰다.
“…그래도 마지막엔 평안을 되찾아서 다행이군요.”
죽은 자들의 재회를 지켜봤던 시르케가 입을 열었다.
전요한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적으로 맞서긴 했지만, 안타깝게 느껴졌어. 분명 이것보다는 나은 결말을 원했을 텐데.”
따지고 보면 모든 게 다 운석의 폭주로 인한 비극이었다.
이제 카이젤이 쓰러졌으니, 당장의 위기는 넘긴 셈이다.
“그나저나, 이 공간은 신기하군요. 아무런 매개도 없이 영혼과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했어요.”
시르케는 현재 위치한 차원의 틈새에 호기심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신경 쓸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멜리사와 레이나가 치명상을 입었어. 지금은 그녀들을 회생시키는 일에만 신경 쓰자고.”
전요한이 쓰러진 레이나를 양손으로 들어올렸다.
멜리사는 시르케의 도움으로 등에 업은 후, 곧장 탈출을 시도했다.
“돌아가자, 더 늦기 전에.”
“알겠습니다.”
허공에 형성된 검은 틈을 통해 두 사람은 몸을 내던졌다.
* * *
카이젤을 쓰러뜨린 후, 천공섬의 결계는 완전히 해제되었다.
은발여인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운석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기대했던 정보를 얻지 못한 것에 시르케는 낙담한 표정이었다.
천공섬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긴 하지만, 중앙부의 마탑도 무너져 버렸고 해서 별 의미가 없다.
“아직 운석은 더 남아 있어. 그러니까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
전요한은 괜찮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후 두 사람은 동료들의 부상이 완치되길 기다리며 잠시 현지에 머물렀다.
“저는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시르케는 왕립협회와 교류하고 싶단 의사를 밝히고는 금방 자리를 비웠다.
혼자 남겨진 전요한이 호텔의 방구석에서 따분함을 호소하고 있을 때였다.
“오빠, 오늘은 뭐 해?”
허공에서 그리젤다가 나타나더니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녀는 악마종이기에 이따금 지금처럼 깜짝깜짝 놀래키듯 등장하곤 했다.
“글쎄. 딱히 일정이 없어.”
현지에선 천공섬의 등장으로 한바탕 난리가 난 터였다.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되려면 몇 주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전요한이 멍한 표정을 짓자 그리젤다는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린 언니와 만나 보는 게 어때? 지금 마음고생이 심한 모양이야.”
채린은 마녀의 자질이 발현되었단 사실에 적잖이 소외감을 느끼는 상태였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의 행방을 물었다.
“지금 어디에 있어?”
“이 근처일걸? 잠시만. 내가 약속을 잡아줄게.”
그리젤다는 아기자기한 휴대폰을 꺼내더니 낑낑대며 장문의 텍스트를 보냈다.
“응, 다행히 언니도 오늘 한가하대. 한 시간 후에 만나자고 하니까 서둘러야 해.”
그렇게 해서 예고에도 없었던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일찍 나왔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채린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매번 10분이나 빨리 오는데, 그녀는 절대 늦는 법이 없다.
“복장이 잘 어울리네.”
“이번에 새로 산 옷인데, 마음에 들어? 다행이야.”
이전에 비해 채린은 유달리 쑥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전체적으로 코디도 제법 신경 쓴 것 같고, 마치 데이트를 하러 나온 느낌이다.
아무래도 젊은 남녀가 함께 자리를 갖는 것이라서, 로맨틱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고풍스러운 양식집에서 서로 마주하고 앉아 있으니 채린이 예쁘게 보이긴 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 그냥 잠시 딴생각 좀 했어.”
“후후… 이런 때는 별로 솔직하지 못하네.”
전요한이 당황하자 채린은 순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여신 같아서 주위의 이목을 끌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청순가련한 미인상인데, 마녀의 자질까지 구현되면서 성적 매력도 엿보이기 시작했다.
“혹시 들었어? 천공섬에 대한 이야기.”
계속 이러고 있으면 페이스에 말려들 것 같아서 화제를 전환했다.
“운석에 갇혀 있었단 사내? 믿기 어려웠지만 뭐, 사실이라고 하니까 그러려니 했어.”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너에게 걸려 있는 마녀의 낙인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몰라.”
운석은 분명 타락한 카이젤을 상대로 억제력을 발휘했다.
그러니 예기치 못한 저주를 받은 채린과 그리젤다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전요한이 가설을 늘어놓자 채린은 순간 눈을 반짝였다.
“전에 시르케도 같은 말을 했었어. 하지만 가설을 증명할 만한 단서는 찾지 못했지.”
“단서라면 여기에 있어.”
전요한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포크로 샐러드를 먹던 채린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뭔가 찾아낸 게 있단 말이야?”
“카이젤과 최후의 결전을 벌일 때 그의 심상세계로 들어간 적이 있어. 잠시나마 영혼에 물질적으로 접근했던 거지.”
“…영혼?”
“응,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기분이었어. 그때 느꼈던 감각을 통해 운석의 효력을 확신하게 되었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채린은 가만히 전요한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영혼의 영역까지 침범해서 뭔가 음침한 짓을 저지르려는 건 아니겠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전요한은 부정의 표시로 고개를 세차게 저어 보였다.
“그런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너에게 걸린 저주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후후. 그렇다면 좋아. 나의 심상세계를 엿보는 걸 특별히 허락할게.”
채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쿡쿡 하고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더니 눈을 크게 뜬다.
“!”
마녀의 낙인이 활성화되며 그녀의 의식을 어지럽힌 탓이었다.
“괘, 괜찮아?”
“조금 어지럽네. 미안하지만 조금 잘게.”
신기하게도 채린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후우….”
전요한은 한숨을 쉰 후, 기절해버린 그녀를 데려가서 호텔의 침대 위에 눕혔다.
마녀가 되어가는 탓인지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애교를 떤다.
자꾸 가슴팍으로 손을 끌어당기려고 해서 혼났다.
‘정말이지 곤란하군.’
아무리 호감을 보인 상대라고 해도 저런 상태에서 못된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잠든 채린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전요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으음….”
정신이 조금 드는지 침대 위의 채린이 신음을 냈다.
전요한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어깨를 흔들었다.
“괜찮아, 린?”
“……!”
이름을 부르자, 순간 채린이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그러고는 상체를 일으키며 부끄러운 표정으로 사과를 해온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나 봐.”
“괜찮아. 그럼 편히 쉬어….”
“씻고 올게. 잠시 뒤돌아 있어.”
얌전히 휴식이나 취할 줄 알았는데, 그녀답지 않게 도발적이었다.
역시 마녀의 자질이 발현되면서 유혹적인 관능미가 일깨워지는 모양이다.
‘뭐, 이대로 내버려 두기도 걱정되니까 좀 더 있다 갈까.’
고개를 돌린 채 티브이나 보고 있자, 욕실로부터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으로는 거부하지만 내면의 무언가가 계속 망상을 펼치게 만들었다.
“넌 안 씻을 거야?”
욕실에서 나온 채린이 곁에 누우며 말했다.
등허리 쪽으로부터 그녀의 포근한 볼륨감이 느껴진다.
“난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 네가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되돌아가려고.”
“내가 정말로 걱정된다면 하룻밤 정도는 함께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채린의 상태는 분명 어딘가 이상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와 마주 보며 자리에 누웠다.
“너, 마녀의 의지에 벌써 잠식당해 버린 건 아니지?”
“응, 그러니 원하는 게 있으면 지금 말해. 저번에 목숨을 구해준 보답을 하려는 거니까”
채린은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녀의 요염한 눈빛과 마주한 채로 전요한은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넌 린이 아니야. 그녀를 집어삼키려는 질투의 의지일 뿐이지.”
어떻게 해서든 예전의 채린을 되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전요한은 격렬한 몸싸움을 벌일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