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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55화 (155/180)

제155화. 운석의 비밀 (5)

“헉헉….”

만신창이가 된 전요한이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였다.

벌써 몇 차례를 맞부딪쳤지만,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책이 보이지 않는다.

전생의 기억으로부터 전승받은 검술을 응용해 보기도 했고, 정신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도 봤다.

그런데도 위계 차이를 극복하기엔 터무니없이 역부족인 상태.

거듭되는 내장의 출혈로 인해 생명력이 점차 고갈되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5성급의 자질을 지니고도 고작 그 정도인가. 여기 모여 있던 녀석들보단 조금 낫지만, 기대한 만큼은 아니라 실망감이 드는군.”

쓰러지기 직전의 전요한을 보며 카이젤이 고개를 저었다.

이후 그는 시험이 끝났음을 알린 후 이대로 끝장을 내려 했다.

“그만한 자질을 아직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냥 여기서 죽어라. 그편이 너에게도 덜 고통스러운 일이겠지.”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뇌창이 무서운 기세로 불타올랐다.

이를 본 이능력자들이 나서서 다음 일격을 제지하려 했다.

“안 돼! 이렇게 끝날 수는!”

“우리를 너무 우습게 보지 마!”

하지만 그들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마왕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가볍게 휘두른 창격에 이들 역시 멀리 나가떨어졌고, 카이젤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 세계라서 그런지 별 감흥도 안 나는군. 아니, 애초에 인류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걸지도 모르겠어.”

어차피 그 자신이 없어도 명맥을 이어나가지 못할 세계라면 피오나를 위해 희생되어도 상관없으리라 여겼다.

카이젤은 다시 한번 자신의 의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크윽, 네 녀석!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제정신을 차린 전요한이 녹티스를 들어 올렸다.

그가 다시 카이젤을 향해 돌격하려고 할 때였다.

황금빛의 게이트가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후우, 드디어 최종무대로 넘어왔군요.”

“은발 여인이 말한 시련이란 게 저 자를 막는 것이었어?”

“긴장해야겠습니다. 전요한이 일방적으로 밀릴 정도면 절대 평범한 상대는 아니에요.”

멜리사. 레이나. 시르케.

상대적으로 전력이 뛰어난 그녀들은 다른 이들을 앞지르고 먼저 여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날파리가 늘었군. 시끄럽게 하지 말고 한 번에 덤벼라.”

카이젤은 상관없단 듯이 도발하는 손짓을 해보였다.

어두운 사념에 잠식되어 평소와 달리, 몸에 휩싸인 검은 기운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일렁거렸다.

새롭게 태어난 마왕은 점차 심연의 광기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제가 후위에서 구속결계를 펼치겠습니다. 최대한 카이젤을 몰아붙여 주십시오.”

말을 마친 시르케가 마법 영창을 시작했다.

멜리사와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전투태세를 갖췄다.

“자칫 잘못하면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어요. 목숨을 걸고서라도 쓰러뜨릴 것입니다.”

“나도 최선을 다할게! 아무튼 녀석이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사실이니까!”

적당히 상대하며 설득할 생각 따윈 없었다.

과거에 이미 한번 이성을 잃고 지구의 모든 생명을 멸하려 했던 존재다.

전력을 다하기로 작정한 멜리사는 각성 모드에 돌입했다.

그녀는 자신이 슬슬 5성급에 도달할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콰드드득!

여기저기서 생겨난 균열로부터 불꽃 기둥이 솟아올랐다.

비스듬하게 들려진 대검에 신성한 문자가 새겨진다.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지금이라면!”

정신을 집중하던 멜리사는 눈을 번뜩였다.

순간, 그녀의 후광이 레드 드래곤의 형체를 갖추며 주위에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했다.

화르르륵!

멜리사가 먼저 날개를 펼치며 현란한 화염격을 날렸다.

그 광경이 흡사 레드 드래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브레스 같았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일격이었으나, 카이젤은 아무렇지 않게 가만히 서 있었다.

“레드 드래곤이라… 그런 것 따윈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한때 인류 최강이라 불렸던 사내였다.

운석의 어두운 사념에 잠식된 이후로는 더욱 강한 힘을 얻게 되었다.

치지지직!

거친 풍압을 일으키며 날아간 뇌격이 브레스를 집어삼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레드 드래곤의 머리에 처박히며 멜리사를 멀리 날려버린다.

“이, 이봐! 괜찮아?”

당황한 레이나가 쓰러진 멜리사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검게 그을린 그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크윽, 잘도 내 동료를 건드렸겠다!”

여차하면 가세하려던 전요한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진노하며 카이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아아아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공격방식이었다.

지척의 공간을 짧은 간격으로 계속해서 뛰어넘으며, 이후의 움직임이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아까부터 시도하려던 게 그거였나. 뭐, 그래 봤자 뻔히 보이는 수작질이다만.”

카이젤은 조금 흥미를 보였지만,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냉정함을 유지한 채, 상대의 움직임을 눈으로 훑는다.

어찌 되었든, 회심의 일격은 자신이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날아오게 마련이었다.

스걱!

유려한 궤적을 따라 시공간이 보기 좋게 절단되어 간다.

물리 법칙마저 왜곡시키는 위력의 일격이었으나, 마왕은 이마저도 무력화시켰다.

카랑!

비명에 가까운 울림이 울려 퍼진다.

이후 전요한은 피를 토하며 멀리 나가떨어졌고, 녹티스도 허공을 회전하다 지면에 처박혔다.

“이제 정말로 끝인 것 같군. 혹시나 해서 기대했는데 역시나 실망의 연속이었다.”

천천히 거리를 좁혀가며, 카이젤은 전요한이 자신의 기준점을 만족시키지 못했음을 밝혔다.

최소한 6성급에 달할 만큼의 위계는 갖춰야 진정한 화신으로서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터.

하지만 남은 시간 동안 그만한 과업을 달성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자질을 제대로 일깨우지 못한 네 자신을 저주해라.”

말을 마친 카이젤이 뇌창을 높이 들어올렸다.

처형식이 집행되던 순간, 푸른 섬광과 함께 레이나가 앞으로 막아섰다.

“내 동료를 건드리지 마! 옛날 동료도 못 알아보는 주제에!”

관리국의 요원으로서 함께 활동했던 멜리사를 가차 없이 날려버린 카이젤이었다.

그렇게 형편 없는 녀석에게 질 수는 없다고 레이나는 생각했다.

휘아아아아!

거친 야성의 불꽃이 건틀렛으로부터 타올랐다.

레이나는 부족장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필살의 기술을 선보였다.

“하아아아아!”

수인족의 육체적인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권격이었다.

어지간한 마물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소멸할 만큼 강력한 파괴력일 것이다.

그럼에도 마왕이 된 카이젤에겐 실오라기만 한 생채기조차 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가로막힌다.

촤아아아악!

반격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뇌창이 휘둘려졌다.

가녀린 몸에서 선혈의 파도가 뿜어져 나온다.

정면에서 그것을 본 전요한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레이나?”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레이나는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는 신음하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올렸다.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해… 그래도 포기하지는 마….”

레이나가 힘겹게 웃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눈을 감고 기절해버린다.

“…….”

한편, 카이젤은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타이밍 좋게 시르케의 구속마법이 발동된 탓인지, 확실한 마무리를 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빌어먹을…!”

좌절하고 있던 전요한이 출혈된 눈으로 다시 녹티스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홀로 한 가지 굳은 맹세를 했다.

“반드시 너를 쓰러뜨리고 말겠어.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되살릴 수 있겠나? 고작해야 동료를 희생하며 버티는 것이 전부인 지금의 네 수준으로.”

카이젤의 차가운 시선이 다시금 전요한에게로 향했다.

상처 입은 마음을 후벼 파는 일침.

하지만 지금의 전요한에겐 어떤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지키지 못했던 네놈이 할 말이냐!”

이미 만신창이가 된 육체는 생각하지 않고, 미친 듯이 검격을 날렸다.

카랑! 카랑!

카이젤은 그런 전요한을 무심하게 상대했다.

“동료를 죽게 만든 건 너의 무력함이다.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건가?”

“크아아아아!”

무리한 전투로 팔다리가 너덜너덜해진 전요한이 재차 포효하듯 달려들었다.

영혼마저 갉아먹는 공격을 받아내면서 그는 단 한 번의 기적을 염원하고 있다.

카랑!

이러한 갈구는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자질을 서서히 일깨우기 시작했다.

“……!”

조금 전의 검격으로부터, 카이젤은 그가 점차 한계를 뛰어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아직도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군. 일행이 더 희생되어야 정신을 차릴 셈인가?”

비록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휘아아아―!

시련으로서 가하는 강도가 점차 올라갔다.

이를 버티지 못한 전요한이 저만치 나가 떨어졌고, 카이젤은 시르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다음은 이 녀석이 좋겠군.”

죽음의 그림자가 주문을 영창 중인 시르케 쪽으로 드리워진다.

거리를 거의 좁혀가고 있을 때, 배후로부터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마지막 일격이다…!”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카이젤은 흡족한 표정을 지은 후 가만히 뒤돌아섰다.

무언가 이질적인 분위기에 휩싸인 전요한이 달려오며 다시금 결전 스킬을 시전하려 하고 있다.

“……!”

이윽고 접전이 벌어지자, 맞상대를 해주던 카이젤이 조금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이제 막 자질을 일깨우기 시작했을 텐데, 상당한 정도로 위계 차이를 상쇄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아아아!”

6성급의 전력이 발현되면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마력의 폭풍이 몰아쳤다.

둘은 괴리된 시공간의 나락으로 떨어졌고, 그곳에서 진정한 결전을 시작했다.

“그것이 너의 화신인가? 어쩐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었다.”

형형색색의 불꽃에 휩싸인 전요한을 향해 카이젤이 말했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한번 뇌창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확실히 숨통을 끊어주마. 네가 데려온 여마법사의 수작질도 더는 방해되지 않으니까.”

시르케의 구속마법으로 인해 카이젤은 잠시 행동이 느려져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마력의 폭풍이 주위를 휩쓸어버리면서 그 영향력은 사라져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기에 카이젤은 눈을 빛냈다.

스스스스!

뇌창의 끝자락에 방대한 마력이 집중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형성된 극점을 상대의 주위에 타격하기만 해도 승부는 쉽게 날 터였다.

카이젤이 전요한과 함께 서로에게 달려들던 때였다.

- 그만두세요, 카이젤. 지금 죽이려는 상대는 과거의 당신일 뿐이에요.

어디선가 나타난 피오나가 카이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카이젤은 심적으로 흔들렸다.

“어째서….”

너는 이렇게까지 나를 막아서는 거지?

내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너를 되살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인데.

사그라들던 마력으로 환각을 걸어 달콤한 꿈을 계속 꾸게 하고, 그 거짓된 세계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활짝 웃어왔다.

자신을 희생시킨 이들에게 어떤 분노나 유감도 표현하지 않고, 오로지 모두를 구원하겠다는 일념만으로.

그렇게 일방적인 개죽음 따윈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 설령 인류를 멸망시키는 마왕이 되더라도!’

다시금 어두운 사념에 잠식당한 카이젤이 뇌창을 휘둘렀다.

허공을 찢는 파공음과 함께 양쪽의 기세가 첨예하게 맞부딪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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