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54화 (154/180)

제154화. 운석의 비밀 (4)

균열의 틈은 눈앞에서 위협적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전요한은 아찔한 속도로 돌진하며 녹티스에 검기를 실었다.

‘단번에 파훼한다!’

각성 모드로 돌입하면 이 정도의 돌파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이후에 펼쳐질 전투가 힘들어질 수 있었다.

각성 모드는 여전히 상당한 체력 소모를 필요로 하는 탓이다.

“제가 선공할게요!”

마법 시전을 마친 정희연이 화염 구체를 날렸다.

이어서 폭음과 함께 균열의 틈이 한 차례 흔들린다.

“타격을 준 것 같긴 한데 역시 무리였나 봐요.”

“아니요,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타격은 이제부터였다.

정신을 집중한 후, 전요한은 전생의 기억을 되짚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마검사 라스의 검술이 가장 효과적이야.’

육체적으로 부담은 좀 가겠지만, 그만큼 파괴적이고 변수가 적다.

치지직.

서슬 퍼런 검신으로부터 붉은 스파크가 일었다.

응축되는 마력이 거센 불길을 일으키며 주위의 공기를 집어삼킨다.

카랑!

검격이 들어가자 강렬한 파열음이 귓전을 때렸다.

충돌의 반동으로 나가떨어질 법도 했지만, 전요한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크아아아아!”

승산은 충분했다.

정희연이 선제공격으로 한차례 약화시켜 준 덕분에, 검격은 위협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결국, 균열의 틈은 본래의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와해되어 버린다.

“훌륭하군요. 당신이라면 가장 먼저 시련을 통과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이 안도하고 있을 때, 허공에서 은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를 본 정희연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다, 다시 나타나다니!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위험해요!”

일찍이 수많은 헌터들을 손짓만으로 간단히 학살한 존재였다.

정희연이 공포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전요한은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까요.”

이대로 물러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은발 여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특별히 당신에겐 그와 만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누구를 의미하는진 현 시점에서 불분명했다.

그래도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기에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시련이 준비되어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시작해줘. 나는 모두를 지키기 위해 여기에 온 거니까.”

“각오가 되셨나요? 그렇다면 무운을 빌게요.”

은발 여인이 가슴팍에 성호를 그었다.

이후 그녀로부터 눈부신 섬광이 발산되더니 시야를 뒤덮었다.

* * *

적막에 휩싸인 고층 빌딩 최상층.

카이젤은 소파 위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

대체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혀 엉뚱한 곳에 와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피오나도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역시 모든 게 꿈이었나.”

뇌리에 주입된 기억이 전부 사실이라면, 피오나는 이미 죽은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딴 세계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공허와 환멸이 마음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되찾고 싶다면, 파괴해라. 네가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어디선가 다시 한번 어두운 사념이 들려왔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카이젤은 입을 비틀었다.

“거짓이라.”

분명 여기는 기억으로 재구성된 환상에 불과했다.

그걸 전부 없애버리면 피오나가 되돌아오는 걸까.

솔직하지만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 운석의 힘을 믿어라. 너의 하찮은 소망을 이뤄주기엔 충분한 권능일 테지.

어두운 사념은 끈질기게 유혹했다.

그 시도가 통했는지 카이젤은 서서히 눈을 떴다.

“정말로 피오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는 없지.”

어차피 모든 게 거짓이니 극단적인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스으으윽―

전용무구인 뇌창을 소환한 카이젤이 커다란 유리창을 원형으로 도려냈다.

이후 손바닥을 뻗자, 원형 내부의 영역이 균열을 일으키며 산산조각 나버린다.

휘이이익―

고도가 높은 탓에 도려낸 공간으로 거친 바람이 파고들었다.

멋지게 기른 금발을 휘날리며 카이젤은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한결 낫군.”

행인들이 밀집한 지면을 향해 추락하면서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곧이어 등 뒤에 한 쌍의 검은 날개가 펼쳐졌고, 창공을 향한 즉흥적인 비상이 시작되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이런 기분은 처음 느껴보는걸.”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공허한 마음을 달래줄 순 없었다.

금방 지루해진 카이젤은 꿈속의 세계를 내려다봤다.

그가 마왕의 권능을 이끌어내자 돌연 강도 높은 지진이 도심 한복판에 일어났다.

콰드드득!

콘크리트 도로는 갈라져서 단면이 생겨나고,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서는 철근이 드러난다.

갑작스러운 재해.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도망쳤고, 일부 이능력자들이 남아서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한동안 아무런 사고도 없었는데.”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누군가의 의도로 갑자기 난리가 벌어진 것은 확실해.”

“죄악의 신도라고 불리는 자들의 짓인가? 목적이 무엇이든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

마치 실제로 의지를 지닌 것처럼 움직이는 것이, 재미있게만 여겨졌다.

허상의 존재들에 이만한 현실감을 부여할 수 있다니.

그동안 속아왔던 것에 화가 치민 카이젤은 이를 악물었다.

“저기 봐, 허공에 뭔가 있어!”

“흑색의 날개가 달렸는데?”

“타천사인 것 같아! 정황상 녀석이 재해를 일으킨 범인이야!”

카이젤을 발견한 이능력자들이 점차 모여들기 시작한다.

모두가 그에 대해 알지 못했고, 저마다의 추론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이제 제법 머리수가 되는군.”

아래쪽에서 바글바글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카이젤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꿈속의 세계이니 이 정도의 난리는 쳐줘야 이변이 생겨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상으로 내려온다!”

“다들 전투태세를 갖춰!”

“척봐도 만만치 않은 상대야!”

저공비행하는 카이젤에게 형형색색의 마법 스킬이 쏟아졌다.

티티팅! 팅!

하지만 어떤 것도 마왕의 위계를 뛰어넘어 그를 상처 입히진 못한다.

이세계에서 돌아온 대마도사 한 명이 호기롭게 메테오를 시전하기도 했으나, 새롭게 태어난 마왕의 눈엔 일개 장난질일 뿐이었다.

“…형편없군. 너무도 안일하고 보잘 것 없는 세계야.”

내심 기대하던 카이젤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자들이 세계를 지키겠다고 나서다니.

소중한 여인을 잃은 자신보다 더 무책임하고 한심하게만 보였다.

“그동안 안일하게 살아온 벌을 주겠다. 대가는 확실히 치르게 해주지.”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실력행사를 하려던 도중, 거대한 황금빛 차원문이 생겨났다.

그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전요한.

예상치 못한 등장에 카이젤은 재미있단 표정을 지었다.

“네놈은 기존의 세계에서 온 것인가?”

난동을 부린 덕분인지 조금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신이 카이젤입니까?”

주의 깊게 사방을 관찰하던 전요한이 허공에 떠 있는 카이젤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셈이지?”

“당신은 운석이 심어 놓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여기에서 상대해 드리죠.”

담판을 지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전요한은 주저하지 않고 녹티스를 들어 올렸다.

“성미가 급하군. 제대로 대화도 하지 않고 승부부터 내려 하나?”

카이젤은 건방지다는 듯이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주위의 인물들이 저마다 웅성대기 시작한다.

“저 녀석은 또 뭐지?”

“이야기를 듣자하니 날개 달린 놈의 횡포를 막으려는 모양이군.”

“여차하면 우리도 가세하자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물론, 그들의 대화를 카이젤은 신경 쓰지 않았다.

현재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눈앞에 서 있는 전요한이 자신에게 맞설 만한 실력이 있는지의 여부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네가 얼마나 강한지 한번 시험해주마.”

뇌창이 칠흑빛으로 번쩍이더니, 외곽 지점을 따라 거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위기감을 느낀 이능력자들이 다시금 공격을 퍼부었으나 무용지물.

한편, 전요한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어차피 일대일로 싸우는 방법 외엔 무의미해.’

카이젤의 시선은 오직 자신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도 주변의 방해를 받지 않고 결전을 벌일 방법을 마련해낼 터다.

콰라라락―!

깊게 파인 영역이 밑바닥의 잔해를 떨구며 공중부양하기 시작한다.

마치, 현실 세계의 천공섬처럼.

안되겠다고 여긴 이능력자들이 하나둘씩 이탈했고, 어느덧 주위는 이전보다 한적해졌다.

“너와의 결전을 위한 장소가 딱히 없어서 적당히 구색을 갖춰봤다. 마음에 들지 모르겠군.”

점차 고도가 높아지자, 카이젤이 기대된다는 듯이 말했다.

실로 엄청난 권능.

어쩌다가 휘말린 이능력자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건 대체….”

“자, 장난 아니긴 하네.”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그 어떤 적들보다도 카이젤은 강하다.

아니, 애초에 그를 감당할 수 있는 자는 꿈속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적대자인 전요한을 제외하면 말이다.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만 물어 보죠. 현실의 세계가 멸망하면 피오나가 되돌아올 거라고 믿는 겁니까?”

“운석의 힘을 이용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실낱같은 희망에 나는 모든 걸 내걸겠어.”

별로 숨길 것도 없단 듯이, 카이젤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다.

전요한은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피오나는 죽기 전에 당신에게 환각을 걸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습니까?”

타락하여 미쳐 날뛸지도 모르는 카이젤을 묶어두기 위한 계획이었다.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절규하며 살아갈 바엔, 달콤한 꿈을 영원히 꾸도록 해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적어도 카이젤이 자신을 위해 손을 더럽히는 걸 원하진 않았을 터였다.

“네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녀를 살리겠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라고.”

말을 마친 카이젤이 뇌창을 겨눴다.

그로부터 느껴지는 위세가 엄청났으나, 전요한은 주저하지 않고 먼저 달려들었다.

“하아아아아!”

인류 최강이었단 사내를 상대로 간이나 볼 생각 따윈 없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검술을 펼쳤고 녹티스도 그 어느 때보다 사납게 울부짖었다.

고오오오오―!

둘의 격돌로 인해 천공섬을 중심으로 거센 폭풍이 몰아쳤다.

“크윽…!”

마신의 위계를 견디지 못한 전요한이 강압에 밀려 결국 멀찌감치 나가떨어졌다.

이후 폭풍이 잦아들었고, 카이젤은 엄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그 정도냐? 한심한 녀석. 나는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다.”

여기는 다름 아닌, 카이젤의 심상세계였다.

비등한 전력이라도 그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압도적인 격차를 느낀 전요한은 녹티스에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조금 다를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격차를 줄이면 그만이다.

이후 다시 한번 격돌이 일어났고, 천공섬은 이상기류에 휩싸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