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운석의 비밀 (3)
“다들 몬스터들의 물량 공세를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군요….”
“저 소용돌이가 좀처럼 사라지질 않으니까요.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네요.”
흩어진 다른 파티원들도 별 진전이 없는 걸 보며 정희연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타심 강한 그녀는 자신보다 주위 동료들의 안위가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그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한 가지 중대한 제안을 했다.
“음, 균열의 틈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공격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 여기서 죽치고 하급 몬스터만 상대하고 있는 게 튜토리얼 미션의 전부일 거라 생각되진 않습니다.”
이런 무대 상황을 조성한 것엔 나름의 의도가 숨어 있을 터다.
전요한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정희연도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위험한 것 같지만 확실히 시도해볼 가치는 있네요. 그런데 저 높은 곳까지 무슨 수로 접근하죠?”
“마침 얼마 전에 전리품으로 하나 획득한 게 있습니다.”
전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초승달 형태의 장신구 하나를 꺼냈다.
룬을 결합하여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장치, 라피스.
헌터 아카데미에서도 가끔 접했던 고가의 유물이다.
“어라? 오늘따라 정말 운이 좋으시네요. 가장 낮은 등급의 라피스이긴 하지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혹시 룬을 주웠으면 몇 개만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네. 물론이에요. 잠시 몬스터들 좀 정리하고 보여 드릴게요.”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다시 몬스터들의 수가 꽤나 쌓여 있었다.
하지만 정희연의 강력한 화염 마법에 의해 금방 정리되었다.
시커멓게 불탄 채 여기저기 널브러진 몬스터 사체들.
산책 나온 것처럼 가볍게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다시금 전요한을 향해 돌아선 정희연이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어떤 종류의 룬이 필요하시죠? 각각 수량은 충분하니까 뭐든 말씀하세요.”
“흑옥의 룬과 백옥의 룬, 하나씩이면 됩니다. 어차피 제 라피스는 소켓이 두 개밖에 없거든요.”
“그걸로 충분하시겠어요? 무리 같으면 차라리 제 라피스를 활용해요. 이번에 큰맘 먹고 높은 등급으로 샀거든요.”
별로 아깝지 않다는 듯 정희연이 흔쾌히 5소켓의 라피스를 내밀었다.
실거래가 1억이 넘는 유물.
하지만 저걸 사용하기엔 지금으로선 너무 아깝다.
라피스는 기본적으로 내구성이 좋지 않아 몇 번 사용하면 금방 망가지니까 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미리 생각해둔 계획이 있으니까요.”
“어떤 계획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상상이 잘 안 되네요.”
두 종류의 룬을 건네주며 정희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룬 조합이 같더라도 각자에게 주어지는 보조 마법의 유형은 대부분 다른 탓이었다.
“혹시 로켓몬 고라는 증강 현실 게임을 아십니까?”
“네? 설마….”
“날아다니는 놈들 중 좀 큼지막한 종류로 고를 생각입니다.”
2소켓 라피스에 룬을 결합하며 전요한은 결계 내의 허공을 주시했다.
때마침 탑승 수단으로 적합한 개체가 파티원들을 공격하기 위해 강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력을 불어넣자 라피스가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으며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수락 버튼을 누른 후 잠시 기다리니 순조롭게 동기화가 시작되었다.
[각인된 라피스가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반응합니다.]
[현재의 룬 조합에 따른 효과가 상태정보창과 연동되어 해당 부분만 간략히 표기됩니다.]
이러면 모든 절차가 끝난 것이다.
확인 결과, 보조 마법은 정확히 예상했던 종류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라피스
마력 방벽 : 일정한 범위에 무형의 방벽을 세워 외부적인 위협을 차단한다.
어둠의 칼날 : 대상을 향해 예리한 마기를 날린다. 적중 시, 10%의 확률로 암전 효과를 일으킨다.
우선 이것들은 각각 백옥의 룬과 흑옥의 룬에 대응하는 속성 마법.
상기의 설명대로 제법 유용하지만 당장 라피스의 내구도를 소모해야 할 정도로 절실히 필요하진 않다.
현재 상황에서 요구되는 건 그 아래쪽에 있는 위상 마법이었다.
본능 지배 : 제압당한 몬스터를 일정 시간 권속으로 다룬다. 도중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효과가 끝날 수 있다.
위상 마법은 서로 다른 속성의 룬을 조합하여 나오는 유형이다.
그래서 더욱 어떤 게 주어질지 예측하기 힘든데 이번 경우엔 예외라 할 수 있다.
일찍이 아카데미에서 흑과 백의 조합을 시도해본 기억이 남아 있던 덕분이었다.
아무튼, 이제 남은 건 지금 저만치서 저공비행 중인 몬스터를 포획하는 일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네, 너무 무리하시진 말고요.”
정희연은 혼자서도 괜찮은지 여유로운 자세로 지팡이를 흔들어 보였다.
그녀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야수형 몬스터 한 마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크르르!”
별로 까다롭지 않은 개체였다.
간단한 돌진기를 시전하자 눈부신 일섬이 야수형 몬스터의 살점을 파고들었다.
이어서 피륙을 베어 넘기는 소리와 함께 배후로부터 고약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오호라, 실력이 제법인걸? 아까 은발 여인과 대화할 때부터 비범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말이야.”
돌아서서 드랍된 전리품이 없나 살펴보던 와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한수.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쓴 검객 차림의 사내가 의구심 어린 눈초리로 전요한을 응시하고 있었다.
“별로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의 전리품엔 크게 관심이 없으니까요.”
“흠, 믿기 어려운 말이군. 아무튼 계속 지켜보겠어. 우리는 목숨을 걸고 온 만큼 보상이 중요하거든.”
“그건 그렇고, 한 가지만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꽤나 중요한 사안이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되도록 간략히 김한수에게 상황 설명을 했다.
김한수는 이야기를 듣더니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일리는 있군. 그러니까 네가 먼저 위험을 감수하고 저 안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네, 하지만 우선 저 녀석부터 온전한 상태로 생포해야 합니다.”
전요한은 고개를 돌려 날갯짓하는 비행체 하나를 검지로 가리켰다.
아직 근접 딜러의 사정거리에 들어올 정도로 낮은 고도는 아니였다.
하지만 하급 몬스터인 만큼 조금만 자극해도 가까이 다가오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다지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기에 김한수는 곧바로 승낙했다.
“좋아, 한번 해보지. 마침 내가 맡은 영역의 몬스터들도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니까.”
그럼 어떻게 하는지 한번 지켜보도록 할까.
기대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김한수는 먼저 앞질러 나가 비행형 몬스터 가까이에서 시선을 끌었다.
“키에에에엑!”
예상대로 비행형 몬스터는 곧바로 김한수를 향해 강하를 시작했다.
대분류상으로 익룡종에 속하는 저 녀석은 날카로운 발톱과 기다란 부리를 이용한 3단 공격을 즐겨 한다.
또한, 가끔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상태 이상도 걸기 때문에 혼자선 생포하는 게 까다롭다.
2인1조로 시도한 결과, 그리 어렵지 않게 녀석을 때려잡을 수 있었다.
퍼억!
금속 재질의 검집이 익룡종의 머리를 내리쳤고, 그대로 전투는 신속하게 종결되었다.
익룡종이 완전히 제압당하자 김한수가 뒤를 돌아봤다.
“이제 됐지?”
“네,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서둘러 가까이 접근한 전요한은 라피스에 마력을 주입한 후 정신을 집중했다.
[눈앞의 대상에게 ‘본능 지배’를 시도합니다!]
[포획 성공! 이제 한시적으로 대상을 휘하의 권속처럼 부릴 수 있습니다!]
김한수에게 제대로 참교육을 당해서 그런지 본능 지배는 한 번에 성공했다.
익룡종의 눈빛에서 적의가 사라지자 전요한은 전투 배낭으로부터 로프를 꺼냈다.
비행 시에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안장이나 등자 같은 게 없으니 로프를 녀석의 몸체에 결속시켜 그 대용으로 삼아야 한다.
나름 고심해서 작업을 마친 후 시험 삼아 익룡종을 조종하고 있을 때, 김한수가 다가와 뭔가를 건넸다.
“이걸 받아.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 부탁해.”
모험가의 비밀일지.
주로 길드에서 통신 보안을 위해 많이 사용하는 유물이다.
이것의 이점은 한 묶음으로 결속될 경우 그 내용이 공유된다는 점이다.
아무튼, 연락수단이 생기면 좋은 일이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지원자가 있으면 한 명 정도 동승시켜도 되겠습니까? 저 혼자선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만.”
“좋을 대로 해. 하지만 난 일단 사양하겠어. 길드원들을 버려두고 혼자 갈 순 없으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며 김한수가 손을 내저었다.
그럼 허락도 받았으니 본격적으로 계획을 실행에 옮겨볼까.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자 화염 마법으로 몬스터들을 정리하던 정희연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어머, 테이밍에 성공하셨네요?”
“네, 2인 탑승이 가능한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음… 좋아요. 그런데 부속 장비가 딱히 없어서 비행 도중에 좀 위태로울 것 같네요.”
임기응변으로 올라타 있는 모습이 불안했는지 정희연이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나름 고삐처럼 익룡종의 머리에 매듭도 묶고 했는데 역부족처럼 느껴진 모양이다.
주위에 몬스터도 없겠다, 전요한은 간단하게 비행 시험을 보이기로 했다.
“와아! 생각보다 능숙하게 하시네요! 조금 더 연습하셔야 할 것 같긴 한데… 뭐 괜찮겠죠.”
주위를 몇 바퀴 돈 후 연착륙하자 정희연이 잘했다는 듯 손뼉을 쳐댔다.
하지만 처음이라 미숙했던 탓인지 내심 불안해하는 반응도 보였기에 나름의 준비를 더 하기로 했다.
결국, 뒷좌석에 앉은 채로 허리까지 매듭 묶음을 당한 정희연.
최대한 추락을 방지한 건데 왠지 몰라도 보기에 기분이 미묘했다.
“전 이 녀석을 조종하는 데만 집중할 테니, 아까 말한 대로만 부탁드립니다.”
“네, 맡겨주세요!”
드디어 본격적인 비행.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조금 긴장감이 생겨났다.
이윽고 익룡종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다른 비행형 몬스터들이 견제해오기 시작했다.
화르륵!
녀석들은 제법 위협적이었으나 정희연이 날리는 화염 구체에 의해 하나둘씩 제거되었다.
개체 수가 꽤 줄어들었을 때, 그늘이 지며 균열의 틈에서 떨어져 나온 불덩어리 하나가 이쪽으로 수직 강하를 해왔다.
그런데 머리를 얻어맞은 후유증 탓인지 익룡종이 비틀거리며 제대로 반응을 못 하고 있다.
“크윽…!”
눈앞이 아찔해진 전요한은 다급히 본능 지배로 녀석을 직접 조종했다.
덕분에 상승각이 급격히 높아져서 두 사람의 모습은 절벽에 매달린 것처럼 위태로워졌다.
“꺄악!”
순간 몸이 뒤로 확 젖혀지자 놀란 정희연이 비명을 지르며 내 허리를 꽉 잡았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밀착되며 뭔가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것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무튼, 천만 다행스럽게도 불덩어리는 아슬아슬하게 피해냈고 정신을 차린 정희연이 수줍은 듯이 사과를 했다.
“죄, 죄송해요.”
“아닙니다. 전부 조종을 미숙하게 한 제 탓이죠.”
만약 비행 도중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건 순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마음을 다잡은 후 낙하하는 불덩어리들을 계속 헤쳐가자 균열의 틈은 어느새 지척까지 가까워졌다.
“준비되셨습니까?”
“네, 네!”
정희연이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허리를 붙잡았다.
“후우….”
전요한은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눈앞의 칠흑빛 소용돌이를 들여다봤다.
여태까지도 나름 위험천만했으나 진정한 난관은 이제부터다.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고삐를 잡아당기자 익룡종이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균열의 틈을 향해 뛰어들었다.
“키에에에엑!”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