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운석의 비밀 (2)
“당장 멈춰! 이런 식의 학살은 용서 못 해!”
잘은 모르겠지만, 눈앞의 은발 여인은 뭔가 격이 다른 존재라는 걸 직감했다.
그렇기에 전요한은 더 늦기 전에 그녀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은발 여인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 전요한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당신은 자질이 있군요. 시련의 종류를 정하시겠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갑작스러운 권유에 전요한은 잠시 머뭇거렸다.
“시련의 종류라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모르고 계셨나요? 운석은 최초의 신족이 안배해둔 종말의 전조입니다.”
“종말의 전조?”
전요한은 잠시 머릿속을 뒤적여봤다.
과거로부터 전승받은 기억 중에 그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최초의 신족은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켰다.’
신화시대가 전성기에 달했을 무렵에 그들은 서열 다툼으로 골육상잔을 벌이고 있었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사태가 매우 심각해졌는데, 이들 중엔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할 정도로 극단적인 선택도 서슴지 않는 부류가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신족이 전부 소멸된 후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계획이었던가.’
대혼돈의 차원으로부터 재앙을 소환하여 종말의 씨앗을 퍼트린다는 내용이었다.
도중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던 일이라고 했는데 완전히 막진 못했던 모양이다. 아마 그 운석이 그들이 퍼트리려던 씨앗이겠지
단지, 시간만을 늦췄을 뿐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라도 재앙은 이렇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대혼돈의 차원과 통하는 틈이 열려 있단 의미예요. 그것을 완전히 닫지 않는 한, 시련은 계속될 것입니다.”
은발 여인은 친절하게 그들이 당면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 설명해줬다.
그녀의 말에 잠시 침묵하고 있던 헌터들이 다시금 웅성거린다.
“대혼돈의 차원이라니, 그게 대체 뭐야?”
“저런 괴물이 나타난 근원지를 말하는 것 같은데, 기존의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네.”
“일단은 상황부터 파악해야 하니 너무 자극하지 말자고. 저 녀석이 말을 거는 동안은 안전한 것 같아.”
사방이 고립된 천공섬에서 곧바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전력 면에서도 은발 여인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압도적이다.
그렇기에 헌터들은 자기들끼리 떠들기만 할 뿐, 괜히 대화에 끼어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너의 정체는 뭐지? 이제 최초의 신족은 거의 사라지고 없을 텐데.”
전요한은 최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다.
이대로 시련을 시작해봤자,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단 걸 깨달은 탓이다.
“저는 오래전에 종말의 의지를 이어받아 그 적정한 시기를 기다려왔던 자입니다. 창조주였던 신은 소멸했지만, 마지막까지 본분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이 은발 여인의 유일한 존재 이유였다.
이어서 그녀는 자신의 기준대로 시련의 유형을 확정했다.
“아무래도 당신은 이 세계를 지키려고 하는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구원자의 시련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자, 잠깐! 조금만 기다려줘!”
전요한이 황급히 저지하려 했으나 은발 여인은 기다란 머리칼을 흩날리며 자취를 감췄다.
그로부터 얼마 후, 지면을 울리는 격렬한 진동과 함께 천공섬 주위에 구체 형태의 검붉은 결계가 형성되었다.
“저, 저건 또 뭐야?”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헌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검붉은 결계 때문인지 외부와의 통신도 끊겨버려 지원 요청을 하지 못하는, 완전한 고립 상태.
주위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거리는 이들을 보며 전요한 일행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래도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이 되어 모두의 눈앞에 나타났다.
[메인 미션]
명칭: 자격 증명
내용: 주어진 시련을 극복해낼 것
제한: 탈출 불가, 파티 단위로 진행, 타임 어택(1일)
보상: 득점한 총합을 기준으로 개인마다 차등 지급
기타: 실패 시 데스매치
생소한 미션 정보창이었다.
잘은 몰라도 그 내용이 꽤나 심상치 않다.
“메인 미션이라고?”
“무슨 자격을 증명하라는 거야?”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지금 우리를 시험하는 건가?”
예상 밖의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자 헌터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했다.
던전에 진입해서 몬스터를 잡았으면 잡았지, 이런 식으로 도전 과제가 부여된 경우는 전무하다.
그나저나 실패 시 데스매치라니….
전요한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렇게 고립된 곳에서 헌터들이 서로 치고 받는다면 피해가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이, 이제 어떻게 하지?”
엄습해오는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레이나가 한탄하듯 말했다.
그녀도 전요한과 마찬가지로 별반 대책이 없는 처지다.
“…우선은 몸부터 추스르죠. 무언가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멜리사가 허공을 올려다봤다.
맑았던 하늘이 비가 올 것처럼 흐릿해지고 어디선가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이어서 허공에 여러 개의 칠흑빛 소용돌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오한과 함께 전율이 일었다.
[균열의 틈이 생성되었습니다.]
[균열의 틈은 주어진 조건을 달성할 때까지 소멸하지 않습니다.]
“저게 균열의 틈인가?”
“조심해! 뭔가 떨어진다!”
각각의 칠흑빛 소용돌이는 천공섬을 떠다니며 끊임없이 불덩어리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불덩어리들은 지면에 도달하자마자 가지각색의 몬스터로 화해서 공격을 일삼았다.
“다들 침착하게 행동하시오! 튜토리얼이라고 했으니 난이도가 그리 높진 않을 거요!”
포효하며 달려들던 괴수를 대검으로 단번에 도륙한 후, 한네스가 뒤를 돌아보면서 외쳤다.
과연 최정예 부대의 총지휘관다운 모습.
그의 독려에 힘입어 하나둘씩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 시스템 메시지가 새롭게 갱신되었다.
[본격적인 진행을 위해 천공의 섬이 여러 개의 구역으로 분할됩니다.]
[시스템상의 안배에 따라 소규모 파티 구성을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헌터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한 무리씩 반구형의 투명 결계 속으로 투입되기 시작했다.
놀라서 눈을 깜빡하니 어느새 공간이 전이되어 모두가 그중 한곳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이런….”
같은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서로 떨어진 건 별로 내키지 않지만 그건 일단 아무래도 좋다.
말없이 분위기를 살피던 와중에 검은 두건을 쓴 검객 차림의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어이, 그쪽은 소속이 어디야? 우린 전부 이지스 길드원인데.”
겉모습은 전요한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아 보이는데 불행히도 엿보게 된 운명카드가 좋지 않다.
[악마의 계약자].
표정 관리가 조금 힘들었으나 억지로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무소속입니다. 같이 다니던 일행하고는 흩어진 상태고요.”
“…그렇군. 혹시 적대 길드인가 해서 물어봤어.”
경계심이 풀렸는지 검객 사내가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무리를 대표해 간단히 통성명을 했다.
“내 이름은 김한수. 이지스의 길드장이고 포지션은 근접 딜러야.”
“전요한입니다. 전투에서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저만치 떨어져 있어도 뭐라 안 할 테니까 괜히 무리만 하지 말라고.”
검객 차림의 사내, 김한수와의 대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균열의 틈이 계속해서 불덩어리들을 쏟아내는 탓에 눈앞의 몬스터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전투가 시작되었고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 * *
“크윽!”
제법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아슬아슬한 장면이 계속해서 눈앞에 펼쳐진다.
몬스터 개체 수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면도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난이도였다.
‘어지간히도 어렵군.’
너무 앞서나가면 이지스 길드의 경계를 받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은발 여인과 대화를 주고받은 터라 주위의 이목이 쏠려 있는 터였다.
주위에 다른 파편이 있나 살펴보는데 난데없이 불덩어리 하나가 눈앞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야수형 몬스터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아….”
귀찮기도 하고 해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염 구체가 날아와 야수형 몬스터에게 작렬했다.
이어서 콰앙! 하고 수류탄처럼 들려오는 굉음.
그 위력이 상당했는지, 야수형 몬스터는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해보고 털썩 쓰러졌다.
“저기, 괜찮으세요?”
뒤쪽을 돌아보니 검은 로브를 걸친 여성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앳된 모습이 아직 남아있는 그녀는 상당히 보기 드문 미인이다.
윤기 나는 긴 생머리에 또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가녀린 턱선.
전체적으로 청순함이 돋보이는데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우수에 차 있다.
아무튼, 도움을 받았기에 짧게나마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까부터 위태로워 보이길래 조금 신경 써드리려 온 건데 마침 타이밍이 잘 맞았네요.”
검은 로브를 걸친 여성이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주위에 위협 요소가 없는 걸 확인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정희연이에요. 마법사 포지션이라 원거리 지원 위주지만, 그래도 절 따라다니면 혼자 있는 것보단 안전할 거예요.”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려고 한 건데 위험에 처한 줄로 착각한 모양이다.
선뜻 호의를 베푸는 마음씨가 정말 고와 보인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전요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혼자서 다니면 눈에 띄는 활약을 하게 되고, 자연스레 이목을 집중받는다.
그렇게 해서 동행을 시작하자 확실히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정희연은 3성급의 화염계 마법사.
하위 마법 정도는 동시에 두 개 시전할 정도의 수준이다.
게다가 광역 마법까지 배워서 혼자서도 상당수의 몬스터들을 손쉽게 해치웠다.
“참 이상하죠? 어느 날 갑자기 섬이 하늘에 떠오르고 이런 미션이 주어지다니 말이에요.”
전투 직후의 여유를 틈타 정희연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균열의 틈에선 끝도 없이 불덩어리가 쏟아지고 있어서 이런 순간이 아니면 서로 대화를 주고받기가 어려웠다.
“네,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동료들과도 떨어져서 상황이 적잖이 골치 아파졌네요.”
“제가 곁에서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그런데 몬스터 개체 수가 줄어들질 않네요. 뭔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은데….”
허공에서 소용돌이치는 균열의 틈을 올려다보며 정희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그곳에 머물러 있는 동안, 전요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은 구역을 나누고 있는 결계부터 해제해야겠어.’
동료들을 한데로 불러모으려면 미션을 클리어해야 한다.
아마도 균열의 틈을 소멸시켜야 하는 모양인데, 능력을 숨긴 상태로는 힘들 것 같았다.
“괜찮으신가요? 혹시 두통이라도 있으세요?”
“아아, 별일 아닙니다.”
“다행이네요. 슬슬 또 전투가 벌어지려는 모양이거든요.”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린 정희연이 다시금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몬스터 군세는 계속해서 규모를 키우고 있다.
개체들의 등급은 대체적으로 낮은 편이나 무한 증식한다는 점이 문제.
전투가 끝없이 지속되면 언젠간 모두가 지쳐 버리고 말 것이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까진 충분히 할 만하니까요.”
안절부절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곁에서 화염 구체를 날리던 정희연이 격려의 말을 건네왔다.
“아, 네…. 그래도 정희연 씨를 만나서 다행입니다.”
물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다.
가만히 있기만도 뭐했기에 그녀의 주위는 정리해 주기로 했다.
곧이어 매서운 참격이 야수형 몬스터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스걱!
녹티스의 절삭력이 뛰어난 덕분에 단번에 두터운 가죽을 파고들어 치명상을 냈다.
그럴듯한 솜씨로 전투를 돕자 정희연도 한층 힘을 냈다.
“좋아요! 요한 씨가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도 더욱 공격적으로 나갈 수 있어요!”
이윽고 불꽃이 일어나는 소리와 함께 펼쳐지는 화염 장벽.
일직선상에 있던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불타오르며 녹아내렸다.
과연 3성급의 마법사다운 광역 스킬이군.
하지만 지금 이런 거나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표정을 고친 후, 전요한은 허공에 있는 균열의 틈을 올려다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