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내일이라는 희망 (5)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정도로 거대한 심상 세계.
창밖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카이젤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뭔가 이상하군.”
오래전부터 느껴왔던 위화감이었다.
분명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데 정작 자신만은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다.
그 사건 이후에 잘못된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기억을 돌이켜보던 카이젤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정체불명의 운석은 성공적으로 봉인되었다.
정예 요원들과 함께 무사히 작전을 마치고 돌아왔었지.
그와 같은 사태가 앞으로 얼마나 발생할지 모르니 일선에서 조사를 계속해야 했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거야, 카이젤?”
분홍색 머리칼의 메이드가 의아해하며 다가왔다.
카이젤은 고개를 돌려 말없이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피오나.
관리국의 특수요원으로서 활동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자신의 연인이었다.
“어째서 우리는 은퇴하고 이런 데서 한가하게 시간이나 보내고 있는 거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게 된 건 분명 축복받을 일이었다.
그런데 요원직을 사퇴하고 함께 관광지에서 레스토랑이나 운영하고 있다니.
이런 식으로 한가하게 시간이나 보내기엔 인류의 미래가 결코 밝지 않았다.
“두려우신가요? 이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삶이.”
피오나는 가만히 카이젤의 눈을 들여다봤다.
오래된 인연으로서, 그녀는 줄곧 카이젤의 곁을 지켜왔다.
“그런 게 아니야. 너와 함께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건 좋지만, 역시 우리는 관리국에서 일하는 편이….”
“당신이 아니어도 재해를 막을 요원은 충분히 있지 않나요? 4성급의 능력자인 멜리사를 포함해서요.”
피오나가 반박하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카이젤은 머뭇거리다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멜리사는 강해. 그녀 혼자서도 어지간한 재해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겠지.”
“규격 외의 이능력자는 지금 이 순간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에요. 이젠 우리가 자리를 내어주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동안 충분히 인류와 세계평화를 위해 헌신해왔다.
딱히 우리까지 나서지 않아도 되니, 이대로 사랑의 도피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
피오나는 귓가에 대고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분명 그것도 나쁘진 않긴 한데….”
“게다가 중요한 시기잖아? 여기에 자라고 있는 아이를 두고 다시 위험한 전장에 뛰어들 생각은 아니겠지?”
여전히 떨떠름해하는 카이젤의 손이 피오나에게 닿았다.
이전보다 조금 부풀어 오른 복부에서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아아….”
“아이가 태어났을 때, 옆에서 함께 축복해 줬으면 좋겠어. 지금 운영하고 있는 레스토랑도 전부 미래를 위해서잖아?”
피오나가 원하는 건, 한 지붕 아래에서의 화목한 가정이었다.
오랜 노력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은 터라 그녀의 표정은 기쁘기만 하다.
“지켜줄 거지? 이 아이와 나의 행복을.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피오나….”
카이젤은 하나뿐인 연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창밖의 세상으로 향했다가 이내 그녀에게로 다시 되돌아온다.
“미안해. 조금 쓸데없는 걱정을 해버렸어. 운석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의 상황이 자꾸만 떠올라서.”
“모두에게 힘든 작전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안심해. 문제는 해결되었고 무엇도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어.”
말을 마친 피오나가 카이젤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온기는 위화감으로부터 생겨난 근심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너를 지키겠어. 만약 위협이 되는 게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버릴 거야.”
그것은 카이젤의 맹세였다.
눈앞의 가녀린 여인을 사랑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보호하겠다는 결의.
피오나만 무사하다면 세상 따윈 어떻게 되어버려도 좋다.
심상 세계의 모든 것이 거짓임을 깨닫지 못한 채, 카이젤은 다시 영원한 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 * *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전요한이 입을 열었다.
맞은편의 소파에 있는 엘런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 고로, 지중해에 가라앉은 운석을 인양하는 일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해서 카이젤의 봉인이 풀려날 수도 있으니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카이젤은 비공식적으로 5성급에 도달한 바 있는 이능력자.
가히 인류 최강이라 불릴 만했고, 관리국의 정예요원들이 모두 나서도 막기 어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우리까지 합세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이래 봬도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몸이라고?”
레이나는 별로 두렵지 않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쪽 세계에선 아직 대미궁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녀의 입장에선 대선배를 칭할 만했다.
“여러분의 실력이 뛰어난 건 알겠지만, 카이젤만큼은 저평가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요. 그는 혼자서도 운석의 영향권에서 살아남은 자입니다.”
당시의 현장을 기억하는 멜리사가 충고를 했다.
전요한의 활약을 그간 지켜봐 왔으나, 그녀는 누가 이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강조하는 걸 보면, 아비규환이었나 보네. 운석으로 얼마나 피해가 발생한 거야?”
“파견된 정예요원이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카이젤과 저를 제외하고요.”
멜리사는 트라우마가 심해지는지 현기증을 호소했다.
별생각 없이 질문했던 레이나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미안해. 딱히 너를 괴롭히려고 물어본 건 아니야.”
“괜찮습니다. 이건 당신들도 알아둬야 할 사실이겠죠.”
다시 안정을 취한 멜리사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카이젤이 광기에 빠져서 전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사건을 자세히 말해줬다.
“그에겐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피오나 이올레타. 저와 같은 수준의 4성급 이능력자이자 오랜 동료였죠.”
피오나는 특별한 잠재력을 지닌 마법사였다.
하지만 운석이 예기치 못한 사태를 일으키는 바람에 현장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결국 그녀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카이젤의 정신이 이상해지는 발단이 되었다.
“단순히 연인을 잃었단 슬픔 때문은 아니었지? 활성화된 운석하고 무언가 상호작용을 하게 된 거라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레이나 님. 운석엔 우리가 모르는 이능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그것을 이끌어낼 수는 없죠.”
규격 외의 잠재력을 지닌 자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폭주하는 카이젤은 운석에 접촉하더니 마왕처럼 변해버렸고, 몰려들던 마물들을 일격에 소멸시켰다고 한다.
“마왕이라니, 정말 악인의 모습으로 흑화해버린 모양이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카이젤을 막지 못하면 전 세계적인 재해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죠.”
멜리사는 떨리는 눈빛으로 레이나를 바라봤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본능적인 공포감에 전요한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떻게 막아낸 거죠?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폭주하고 있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다행히 피오나가 도움을 줬습니다. 그녀는 기적처럼 의식을 잠시 되찾았고, 카이젤에게 영원한 환각을 심어줬죠.”
평화로운 세계에서 그녀와 함께 살아가는 꿈.
지금도 카이젤은 그 꿈속을 방황하며 헤매고 있을 터였다.
만약 모든 게 거짓이었단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할까.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었으므로 관리국에서도 운석을 엄중히 관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운석을 분석해야겠는데? 마침 유럽에도 하나 더 있지 않았어?”
깔끔하게 포기한 레이나가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봤다.
영국의 서쪽 바다에 표기되어 있는 마크가 하나 있었다.
“죄송하지만 그것도 인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위치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지만, 전문설비를 투입하는 과정이 까다롭고….”
“분명 적극 협조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사적인 문제를 모른 척해주는 대가로요.”
변명하는 앨런을 향해 전요한이 차갑게 응수했다.
그러자 앨런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고개를 조아린다.
“혀, 협조는 하겠습니다. 다만, 현실적인 요소를 고려하면 한국에 있는 운석이 적합하다고 판단됩니다. 일단 접근성이 용이한 내륙에 위치해 있고….”
시답잖은 소리에 피곤함을 느끼고 있던 때였다.
삐리리릭―.
멜리사와 레이나가 앨런을 압박하고 있을 때, 벨소리가 울렸다.
전요한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해봤다.
유명학.
관리국 국장이 직접 전화할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시죠?”
- 뉴스 속보는 보았나, 요한 군?
유명학은 대뜸 티브이부터 볼 것을 권유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요. 뭔가 대형 사고라도 터졌나요?”
- 그렇다네. 지금 관리국 내부적으로도 매우 소란스러울 정도니까 말이네.
유명학은 언론에서 대서특필 중인 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을 들은 전요한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어떻게 그런 일이….”
* * *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전대미문의 대사건.
그건 바로 지중해 한복판에 갑자기 생성된 천공섬이었다.
이변을 일으킨 원인은 카이젤이 봉인되어 있는 운석인데, 관리국에서 급히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한다.
“이건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해요.”
인터넷 기사에 첨부된 사진 자료를 보며 멜리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 규모의 천공섬이 재해를 일으킨다면 실로 광범위한 피해가 뒤따를 터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했는지 즉각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일정 수준의 이능력자들을 대거 투입하여 혹시나 깨어나게 될 카이젤을 제압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지원할 거야?”
옆자리에서 함께 인터넷 기사를 보고 있던 레이나가 물었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운석에 대해 알아내는 거였잖아? 작전을 완수하고 나면 보수도 짭짤하게 지급한다고 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지.”
“좋아, 그럼 나도 갈래. 꽤나 위험부담은 있어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잖아?”
레이나는 이쪽 세계에서의 밑천이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번 기회에 돈을 많이 벌어서 여기저기 여행 다니고 싶단 포부를 밝힌다.
“일단 지원서부터 작성하자. 유명학 국장에게서 확답은 받았지만, 형식적인 절차는 필요하니까.”
“응, 알았어. 그런데 경쟁률이 얼마나 될까? 다들 신세 한번 고쳐 보겠다고 너나 할 것 없이 도전할 것 같아.”
“아마도 그렇겠지. 분명 불순한 자들도 적잖이 섞여 있을 거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운석에 깃든 이능을 악용하려는 세력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멜리사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앞으로의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관리국에서도 인원 선별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희도 만일에 대비할 필요성은 있겠죠.”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는데 안일하게 행동할 수만은 없었다.
“좋아, 그럼 한국에 있는 동료들에게도 연락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보자.”
다시금 의욕이 생겨나는지 전요한이 팔을 걷어붙였다.
함께 해왔던 동료로서 멜리사는 그에게 의향을 물었다.
“채린과 그리젤다도 작전에 투입시킬 건가요? 그녀들이 운석과 상호작용하면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요.”
이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전요한은 씨익 웃어보였다.
“당연한 걸 왜 물어? 동료는 위기의 순간에는 언제나 함께 하는 거라고.”
지구의 여신에게 약속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중한 이들을 지켜내겠다고.
이번만큼은 냉혹한 현실에 무릎 꿇지 않겠다고.
‘지켜봐줘, 시스티나. 너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일 테니까.’
투지를 불태우는 전요한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