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내일이라는 희망 (4)
학원도시 상아탑의 최상층부.
관리국 국장, 유명학은 유리창 너머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법 괜찮은 곳이군.”
이대로 파괴해 버리기엔 아까운 인프라였다.
헌터 아카데미의 이능력자 육성 방식을 확대 적용하여 자율적인 방어 체계를 갖춘다는 발상.
적어도 그 과감한 시도만큼은 칭찬해주고 싶었다.
“네, 네놈이 배신할 줄은 꿈에도 몰랐군.”
창가의 벽에 기댄 채 신음하던 서창곤이 입을 열었다.
원로회의 의장이었던 그는 모진 구타를 당했는지 몰골이 만신창이였다.
“배신? 무슨 소리지? 나는 그저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시선을 아래쪽으로 향한 유명학이 표정을 굳혔다.
앞으로 걸어 나가며 잘 들으란 듯이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모든 건 그분의 뜻대로. 여기에 적혀 있는 대재앙을 막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유명학이 한 손에 쥐고 있던 고서를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본 서창곤은 무언가 뒤늦게 눈치챘는지 이를 악문다.
“설마, 우리에게 제공한 예언서의 내용은 조작된 것이었냐? 네놈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할 목적으로?”
분명히 중간에 수상쩍은 내용이 있긴 했었다.
하지만 상대가 관리국 국장이라 그냥 넘겼는데 지금 생각하면 큰 오판이었다.
“진정한 계시를 알려줄 거라고 생각했나? 혼란을 틈타 성벽 안에서 구원자 행세나 하려는 자들 따위에게.”
말을 마친 유명학이 거침없는 발길질을 시작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거센 발길질에, 안 그래도 만신창이였던 서창곤은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커헉.”
“잘 들어라. 이능력은 지구의 여신께서 선택받은 자들에게 내리신 은총이다. 그것을 악용하려는 흑심 따윈 어떤 경우에도 용납하지 못한다.”
자신이 그동안 변절자인 척 행세했던 이유는 단지 내부의 불순종자들을 걸러내기 위함이었다.
유명학의 뒤편으로 갈색 머리칼의 요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서연.
그녀는 정중한 자세로 상관을 향해 허리 숙였다.
“감시를 맡기신 자들 말인데,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아직까진 국장님의 예상대로 움직이는 중입니다.”
감시 대상은 전요한 일행을 말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왕립 학회와 접촉한 후 정체불명의 운석에 대해 조사 중이란 보고 내용.
잠자코 듣고 있던 유명학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점점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는 건가. 그가 최종 국면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지 궁금해지는군.”
자신이 알고 있는 선에서, 전요한은 예언서상의 구원자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과연 동료들의 희생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모두를 구원하고 진정한 신의 사자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결과는 머지않아 발생할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을 터였다.
* * *
포근한 분위기의 침실.
채린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누워 있었다.
‘이제 어쩌면 좋지.’
붙잡혀 있을 때 메데이아가 속삭였던 말이 생각났다.
「마녀의 낙인」이 새겨졌으니, 조만간 충동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었다.
소외당하고 버려졌던 것에 대한 보복과 일탈 심리.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언젠간 마음이 낙인에 잠식당해 어쩔 수 없게 될 것이라니.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쳐가면서까지 구원받았는데, 또 그런 식으로 발목을 잡고 싶진 않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관리국에 의하면, 자신의 아버지가 심각한 내란죄에 연루되어 있다고 했다.
정략결혼을 부추겼던 것도, 학원도시의 건설에 앞장선 것도 전부 개인적인 야욕 때문이라고 한다.
채린은 순간 자신이 거대한 음모의 희생자처럼 느껴졌다.
“흑…”
마침내 희망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꿈이 산산조각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좌절감이 온몸을 엄습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다급히 눈가를 소매로 닦고 뒤돌아봤다.
문이 열리며 시르케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니야아옹.”
시르케의 어깨 위에 있던 검은 고양이 캣시가 채린을 발견하고 울음소리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제 심신은 안정되셨습니까?”
“아, 네. 덕분에 푹 쉴 수 있었어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상하다 여긴 시르케는 채린의 앞에 앉은 채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역시, 마녀의 낙인이 마음에 걸리는 겁니까?”
“그, 그걸 어떻게…”
“저는 마법사입니다. 당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 정도는 눈치챌 수 있죠.”
인질로 붙잡혔다고 아무에게나 생겨나는 표식이 아니었다.
심연의 마기를 받아들일 자질이 있는 자에게만 낙인은 생겨난다.
그것은 족쇄와도 같아서 한 번 구속당하고 나면, 집요하게 정신을 침식해 들어간다.
“저는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걸까요? 안 그래도 모두에게 힘든 상황인데, 더는 피해를 끼칠 수 없어요.”
“포기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전요한이 방법을 찾아낸 것 같으니까요.”
“방법이요?”
“자세한 건 더 연구를 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정체불명의 운석이 억제재로 활용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예전에 읽은 고문서의 내용에도 「현자의 돌」이라는 유물이 소개되어 있었다.
마녀의 저주를 막아내고 강제되는 운명으로부터의 구속을 풀어준다는 전설.
어쩌면 그 재료가 미지의 세계로부터 넘어온 운석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운석은 어떤 방법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어요. 혹시 영계 마법으로 가공을 시도할 생각인가요?”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질적인 원소로 이루어졌단 점을 고려하면 촉매제가 필요하리라 예상합니다.”
시르케는 연금술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었다.
그녀가 자신만의 가설을 떠들어대고 있을 때였다.
“나도 들어가도 돼?”
어느새 찾아온 그리젤다가 문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물론입니다. 여기는 당신의 집이니 허락을 구하거나 눈치 볼 필요 없습니다.”
시르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요한의 대저택은 규모가 커서 제법 많은 인원을 동시에 수용 가능하다.
“그 운석이라는 거, 어떻게 생겼어?”
그리젤다의 관심사는 다름 아닌, 현자의 돌이었다.
자신에게 넘겨진 질투의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궁금하다면 보여드리겠습니다. 운이 좋게도, 이쪽 세계에는 정보를 검색하기 편리한 전자기기가 있어서…”
시르케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들었다.
잠시 후 모니터 액정에 사과 로고가 뜨자 그리젤다는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에에, 이건 대체 어떤 권능이 깃든 유물인 거야?”
이세계에서만 지냈던 그리젤다가 현대 문명의 이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시르케는 검지를 들어 올리며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내부엔 복잡한 마법진이 설계된 형태로 과학이라는 권능이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구현해 내려면…”
그동안 많이 조사해온 것 같지만, 어딘가 모르게 오해하는 점이 있었다.
경청하는 그리젤다의 옆모습을 보며 채린은 곤란함을 느꼈다.
* * *
아늑한 분위기의 침실.
창가로부터 내려오는 햇빛에 전요한은 눈을 떴다.
“으음….”
여긴 어젯밤 묵었던 호텔의 투숙실이었다.
새벽녘 즈음, 술에 취한 여인들을 전부 돌려보낸 후 그대로 뻗어버렸다.
그동안 피곤한 일이 연달아 발생했던 탓이다.
“술자리에서의 악몽이 계속해서 떠오르는군.”
다들 취하고 나면 뒷일 따윈 아무래도 된다고 여기는 부류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옆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완전히 뻗은 채 대자로 자고 있는 레이나가 있었다.
“…슬픈 꿈이라도 꾸나?”
감수성을 자극할 정도로 슬픈 장면 속에 있는지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혀 있다.
전요한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한창 감수성이 민감할 시기인가….”
수인족은 발정기 전후로 이런 변화가 생겨난다고 한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레이나가 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비몽사몽한 표정인 것이, 제법 깊이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기억이 안 나. 근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엄청 슬펐어.”
“괜찮아. 단순한 꿈일 뿐이니까.”
전요한은 대수롭지 않게 레이나의 이야기를 받아넘겼다.
그녀보다는 조만간 있을 탐사가 신경 쓰였던 탓이었다.
“오늘은 뭐 할 거야?”
“크라이시스 사의 앨런 회장과 함께 운석을 찾으러 가야지.”
녀석이라면 확실히 길들여둔 상태였다.
다만, 스케줄이 오후로 잡혀 있어서 오전엔 한가한 상태였다.
세안을 하고 거실로 나가자 멜리사가 아침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어났습니까?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참이어요.”
주된 메뉴는 햄과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였다.
식탁에 앉아서 함께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던 도중, 레이나가 문득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아무리 돈을 벌어도 별로 생활이 변한 게 없네. 이거 예전부터 먹던 것 아냐?”
생각해보니 분명 그랬다.
한식은 은근히 손이 많이 가서 일찍 현장에 나가야 했던 입장에겐 아침 식사로 부적합했지.
지금은 대미궁에 갇혀 있던 시절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데 체감은 적은 편이다.
“관성 때문이 아닐까. 몇 년 동안 반복해오던 일상이니 통장에 10억이 넘게 있어도 무심결에 유지하는 거지.”
“내 말은, 행복이란 적당히 돈이 있어야 느껴진단 거야. 풍족해지면 당연히 좋은 점이 많겠지. 여러모로 말이야.”
레이나는 엣헴 하고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인생론을 설파했다.
그러자 샌드위치를 금방 먹어치운 멜리사가 동의를 표한다.
“화려하게 사는 것도 좋아. 모두가 내 일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으면 만족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환상적인 이야기는 삶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래도 너무 물욕에 현혹되어선 곤란하지. 다들 명심해둬.”
본래의 주제에서 너무 벗어난 것 같았기에 전요한은 충고를 했다.
그러자 레이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물욕?”
“응, 호화롭게 사치를 하는 것만으로는 행복하다고 느끼기 어려워. 동료들과 함께 던전을 누비는 편이 더 자유롭게 느껴질 때가 있어.”
실은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느라 집안 살림이 썩 좋지 않았다.
일전에 좀비 사태가 발발하기도 했었고, 장기적으로 필요한 물건들은 구매하지 않은 것이다.
무사히 되돌아가고 나면, 티브이도 더 크고 화질이 좋은 걸로 바꿔야겠군.
식사를 마친 채동혁이 메모지에 자신의 리스트를 적어 내려갔다.
“나, 신간으로 나온 만화책 전부 구입해도 돼?”
“당연하지. 얼마 하지도 않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주문해.”
“정말? 신난다!”
현재 비어 있는 방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도 된다고 허락하자 레이나는 만세를 외쳤다.
그녀가 인터넷 쇼핑을 하기 위해 달려가자, 멜리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의외로 저런 쪽에 취미가 있었네요. 당신의 수인족 동료.”
“바깥에 함부로 나돌아 다니기 어려운 탓이겠죠. 그저 앉아서 시간낭비만 할 순 없으니까 소일거리를 찾은 겁니다.”
레이나가 이쪽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 자신의 몫이다.
그녀에게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삐리릭―
웃으며 떠드는 일행의 모습이 한가하게 보였는지, 앨런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 회사의 귀빈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금방 찾아가겠습니다.
문란한 사생활을 약점 잡힌 탓인지 제법 공손한 말투였다.
충분히 길들였다고 생각한 전요한은 몸을 일으켰다.
이제부터는 운석의 비밀을 하나씩 파헤쳐갈 차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