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48화 (148/180)

제148화. 내일이라는 희망 (3)

영국의 왕립협회를 통해 나름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봉인된 마왕에 대한 것이었다.

“실은 전 세계의 인류가 아직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어요. 내버려 두면 곤란한 이능력자가 한 명 존재한다는 거죠.”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멜리사가 부연설명을 해줬다.

카이젤 나이트링거.

인류 역사상 최강이라 불렸던 자였으나, 대재해의 근원에 근접한 탓에 정신이 오염되어 버린 인물이었다.

“대재해의 근원이라면, 왕립협회에서 이야기한 정체불명의 운석이야?”

신나게 스테이크를 썰어 먹던 레이나가 질문을 던졌다.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정체불명의 운석은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루트라면 천체망원경을 통해서 관측되어야 정상인데도요.”

“즉, 상공에 출현한 게이트를 통해서 넘어온 이세계의 잔재일 가능성이 높단 거죠?”

전요한이 핵심을 찔렀다.

멜리사는 재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운석은 현재 한국에도 몇 개가 있지만, 크게 위협은 되지 않는 상황이죠.”

그럼에도 결코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불과 몇 년 전에, 운석 하나가 활성화되더니 대재해를 일으킬 뻔했기 때문이다.

“지중해 한복판에 떨어졌던 운석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고요?”

“네, 그 운석은 해양 생태계를 변이시키고, 마물들을 끝없이 생성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사상 초유의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멜리사도 당시에 참전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카이젤은 그녀의 동료이자, 정예 공략대를 최선봉에서 이끄는 리더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운석에 가까이 다가갔더니 녀석이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거야?”

벌써 스테이크를 다 먹은 레이나가 다그쳤다.

그녀는 후식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아쉬움을 달래기 시작했다.

“정확한 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카이젤은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심적으로 매우 흔들렸던 상태였죠.”

지난 이야기를 하는 멜리사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 당시 참혹했던 전투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낯을 바꾸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정신이 오염된 그는 더 이상 아군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시간을 지체했더라면 아무도 막지 못했을 테죠.”

멜리사가 목숨을 걸고 막아선 덕분에 인류는 대재해를 피할 수 있었다.

운석은 카이젤을 봉인한 채로 지중해에 가라앉았고, 한 달이 넘게 지속되었던 소란은 마침내 끝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카이젤처럼 타락한 자들을 제어하는 데 있어서 운석이 도움을 줄 수 있단 거지?”

입가를 닦던 레이나가 핵심을 정리했다.

“그렇습니다. 운석에 대해 연구하려면, 신소재 사업의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죠.”

왕립협회의 일원들은 운석을 가까이하는 일엔 소극적이었다.

자칫 잘못하여 대재해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두려움 탓이다.

그렇기에 이런 일엔 수익을 중요시하는 기업가들과 가까이 할 필요성이 있었다.

“프리메이든 사의 한나, 그 사람이 딱인데요? 그녀는 운석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잖아요.”

“안타깝게도 한나는 지금 바쁜 상황이에요. 그래서 현지의 적당한 인물을 골랐습니다.”

전요한의 제안에 멜리사는 고개를 저으며 검지를 들어올렸다.

“현지의 적당한 인물이요?”

“네, 영향력이 제법 있어서 뉴스에도 몇 번은 언급되었어요. 별로 좋지는 않은 일로.”

앨런 크라이슬러.

최근 떠오르는 신소재 산업 분야에서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크라이시스 그룹의 회장이었다.

대기업의 재벌가답게 유흥 문화에도 제법 두각을 드러내 왔다고 한다.

물론 그가 부정한 방법으로 욕망 해소를 하더라도 아랫선에서 적당히 무마된다.

구체적으로 타깃을 밝히자, 레이나는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어? 여긴 외국이잖아. 대기업의 총수라면 그와 관련된 사람들도 많을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관리국의 허락을 받았으니, 적당히 손을 봐 줘도 뒤탈은 없을 거예요.”

멜리사는 안심하란 듯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하지만 국제 정세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하면 역시 머리가 아프다.

전요한은 곤란한 표정으로 관자놀이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런데 앨런이 여기엔 왜 머무르고 있는 겁니까?”

“여긴 역세권에 있는 호텔입니다. 주로 비즈니스나 관광 차원에서 묵는 곳이죠.”

하지만 오늘은 연예인과 재계 인사의 부정한 만남을 위한 장소가 될 예정이었다.

“앨런은 동양계 아이돌에게 성적인 편향성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번 덫에 걸려든 거죠.”

“딱히 덫을 놓지 않았어도, 평소에 이런 식의 만남을 자주 즐겼단 말이죠?”

“맞습니다. 인간이란 게, 돈과 권력이 생기면 그다지 욕망을 억제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요.”

사실 앨런은 톱스타급 여자 연예인들과 접선을 여러 차례 시도한 바 있었다.

이를 거부하면 외부적인 압박을 행사해서 그녀의 대외적인 출연 기회를 박탈한다고 한다.

악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물인 만큼, 철저히 이용해 먹어도 되리라 판단했다.

“어서 가죠, 지금쯤 방 안에 들어가 있을 겁니다.”

영향력 있는 재계 인사가 여자 연예인과 만나서 하려는 일 따윈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뻔하다.

만일에 대비하여 호텔 프런트부터 보안 직원이 배치되어 있는 상황.

체크인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다가서자 곧바로 제지가 들어왔다.

“죄송합니다만 현재 여기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리는 중입니다.”

“투숙객이 아니면 불편하더라도 신원을 밝혀 주십시오.”

여자 연예인과의 부정한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호텔 출입까지 통제하다니.

하지만 이런다고 전요한 일행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멜리사 씨, 부탁드립니다.”

“알았어요.”

흘끔 눈길을 주자 멜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녀는 신속한 발차기로 눈앞의 사내들을 기절시켰다.

“검술뿐만 아니라 격투기도 연마했나 보네? 나중에 나랑 대련 시합하자!”

출중한 실력을 확인한 레이나가 두 눈을 빛내며 친선시합을 제안해 왔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상대해 드리죠. 저도 수인족에 대해 호기심이 있거든요.”

멜리사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다른 보안 직원들이 이어서 나타났다.

이번엔 레이나가 시원한 펀치를 날리며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해준다.

“쳇, 귀찮게 하는 녀석들이 많네.”

덕분에 별 무리 없이 앨런이 투숙 중인 방문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똑똑.

“룸서비스입니다. 주문하신 메뉴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뻥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동양계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

그런데 무언가 수상한 분위기가 신경 쓰이는지 아무런 말이 없다.

“앨런은 안에 있습니까?”

굳이 설명할 필요성까진 못 느꼈기에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 중년의 사내가 가운을 걸친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뭐, 뭐야. 너희들은?”

무방비로 있던 앨런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것 같은데, 못 볼 꼴을 보게 되어서 유감이다.

“이야기를 좀 하죠. 크라이시스 그룹의 회장님.”

출입문을 걸쇠로 잠근 후, 전요한은 앨런을 향해 사나운 눈빛을 보냈다.

녀석에게선 알아내야 할 정보가 상당히 많이 있다.

* * *

예상했던 대로, 앨런은 운석에 대해 제법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전적인 협조를 약속받은 후 일행은 잠시간의 휴식을 즐겼다.

“주량이 많이 늘었네요? 저번에는 소주 세 병이면 뻗어 버렸잖아요.”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맞은편의 멜리사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수인족인 레이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확실히 그녀의 주량은 예전에 비해 큰 폭으로 늘긴 했다.

“그, 그런가? 아마도 이쪽 세계의 술에 익숙해진 것 같아.”

“어쨌거나 레이나는 전요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무슨 말이야, 갑자기?”

예상치 못한 멜리사의 질문에 레이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전요한도 어안이 벙벙해져서 두 여인을 멍하니 쳐다봤다.

“대미궁에서 오랫동안 함께 했다고 들었어요. 레이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곳에 있었을 테니까,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저 사람, 제법 강하기도 하고요.”

“그, 그건….”

얼굴이 붉어진 레이나는 좀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워낙 솔직한 타입인 탓에 거짓말을 하면 바로 티가 난다.

게다가 전요한의 앞이라 더욱 본심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진심을 고백할 생각이라면 지금이 적기 같은데, 어때요? 주저하다간 채린이나 시르케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도 있다구요.”

“…모, 몰라! 그냥 술이나 마실래!”

잔뜩 부끄러워진 레이나는 곧장 벌컥 마시더니, 바짝 구워진 고기 몇 점을 집어먹는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당신의 주위엔 괜찮은 여자들이 많아요. 그중에서 한 명 정도는 애인으로 삼아도 될 것 같은데, 전혀 마음에 둔 애가 없는 건가요?”

조금 취했는지 멜리사는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곤란한 질문이 이어지자 전요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연애 관계는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시르케도, 레이나도 오랜 동료로서 지켜주고 싶을 뿐이고요.”

“옆에서 지켜본 입장으로서 조언하자면, 레이나와 가장 어울리는 것 같아요. 당신처럼 둔감한 남자는 적극적인 타입이 상성상 더 좋다고요.”

연애관계에 있어서 채린은 너무 소극적인 면이 있었다.

시르케도 지적인 관심사에 탐닉하는 성향이라, 개인적인 감정은 묻어두는 편이다.

멜리사가 헛바람을 불어넣자, 전요한은 헛기침을 했다.

“아직까진 누구를 더 편애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제겐 전부 소중한 동료들이니까요.”

“양다리도 아니고 세 명을 거느리겠단 건가요? 이거 정말 문어발 다리군요?”

술잔을 기울이던 멜리사는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생각해보니 이 여자, 취하고 나면 훨씬 적극적으로 변하는 타입이었다.

전요한이 곤란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어? 멜리사 님 아니세요?”

“한동안 안 보인다 했더니 여기에 계셨네.”

낯선 얼굴들이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홉 꼬리가 달린 여우 느낌의 반인반요.

얼핏 보면 레이나와 같은 부족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특징이 유사했다.

“로잔나였던가요?”

“네, 맞아요. 이번엔 제대로 기억하고 계시네요!”

멜리사가 알아봐준 것에 기분 좋았는지 로잔나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그녀는 진화의 조각을 흡수하면서 구미호와 같은 형상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저도 누군지 기억하세요?”

로잔나 옆에 있던 암표범 느낌의 반인반요가 물었다.

멜리사는 고민하다가 적당히 떠오르는 이름을 언급했다.

“샐리?”

“어머, 어떻게 해. 내 이름도 알고 있어! 첫인상이 마음에 드셨던 것일까나.”

제멋대로 오해를 하기 시작한 샐리가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로잔나는 순간 눈빛을 찌릿하더니 먼저 멜리사의 옆자리에 앉는다.

“그동안 사건을 해결하셨던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저희 몫의 음식은 따로 계산할 테니까요.”

구미호의 특성을 이어받아서 그런지 행동도 불여우 같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시죠? 전에 함께 다니던 건 못 봤는데….”

아쉽다는 듯이 남은 자리에 앉은 샐리가 질문을 던져왔다.

둘이서 멋대로 합석해 버리자 레이나는 당혹스럽단 반응이었다.

“…….”

녀석이 눈빛으로 어떻게 할 건지 의사를 물어온다.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나쁠 건 없어 보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휴식 시간인데 멜리사의 지인들이 합석하는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 전우들입니다. 여러분이 들으면 놀랄 만한 업적을 세웠죠.”

“어머, 정말이에요?”

“멜리사님이 동등하게 여길 정도의 실력자들이라니, 호감이 가네요.”

다 같은 이능력자들이다 보니, 대화 주제는 어렵지 않게 통일되었다.

그렇게 해서 일행은 즐겁게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밤이 점차 깊어져 갔고, 비어버린 술병은 갈수록 늘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엔 여인들은 완전히 만취한 상태였다.

‘대책도 없이 전부 뻗어버리면 어쩌라는 거지.’

아무래도 날이 밝을 때까진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멜리사의 술주정을 들으며 전요한은 적잖이 난감해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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