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내일이라는 희망 (2)
사방팔방이 온통 피로 물든 숲속이었다.
시체가 널브러진, 잔혹한 현장 속에 흑발의 사내가 있었다.
피투성이 속에서도 영롱한 푸른빛이 바래지지 않은 장검에 기대어 무릎 꿇은 채, 그는 최후를 기다린다.
“…끝인가.”
사내가 살아남은 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신화적인 존재들이 목숨을 걸고 맞붙은 전장에서 제 모습을 유지한 인간은 달리 없다.
“그래도 다행이다.”
지켜야 할 것을 지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역을 보호하겠다는 약속.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들더라도 반드시 침입자들을 막아야 했었다.
녀석들이 성역에 남겨진 여신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쿨럭.”
고통스럽게 내뱉은 기침에 피가 한가득 쏟아져 내렸다.
의식이 아득해지고 시야가 점차 어두워져 간다.
무뎌지는 감각에 세상이 고요해진 느낌마저 받고 있을 때였다.
“…살아남은 건가요? 최후의 전투에서.”
어디선가 나타난 은발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순백의 우아한 날개를 움츠린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저 때문에 이런 꼴을… 게다가 목숨까지 위험한 상황이라니.”
눈앞의 사내는 기구한 운명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래서 성역에 머무르는 것을 특별히 허락했는데, 이런 식으로 죽음에 가까워졌다.
“울지 마, 시스티나.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흑발 사내는 차갑게 식어가면서도 자상하게 미소 지었다.
인간이었으나 누구보다 강했던 그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소녀는 멸망해가는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신족.
가장 어렸으나, 살아있는 것만으로 모두에게 구원의 빛이었다.
“지금 빌고 싶은 소원이 있나요? 어떤 것이라도.”
잠시 침묵하던 소녀는 품에 안고 있던 상자를 열어 보였다.
그 안엔 지고의 유물인 「정화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신족들의 골육상잔을 일으킨 원흉이자, 최후의 희망.
그것을 손에 넣는 자에겐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난…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앞으로의 세상과 함께.”
흑발 사내는 솔직하게 자신의 마지막 바람을 말했다.
아직 어린 소녀에게서 예전에 죽은 여동생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렇다면 당신이 지켜주세요. 세계의 미래를. 저의 소망을.”
소녀는 결심한 듯이 상자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러자 「정화의 불씨」는 이글거리며 사내의 심장에 흡수되어 간다.
“뭐 하는 거야? 이러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잖아.”
“아니요. 당신이 적합자입니다. 신화시대는 이제 끝났으니까요.”
소녀가 꿈꾸는 건 모두가 각자의 색채를 지닌 세계였다.
그런 세계에 권능자로서 군림하는 유일신은 필요하지 않다.
위계와 서열을 애써 지키려고 봤자, 괜한 다툼만 일어날 뿐이었으므로.
이와 같은 이유로 소녀는 그저 지켜보기만 할 것이었다.
자신을 지켜낸 사내가 몇 번이고 전생하며 언젠가 다가올 위기와 맞서 싸우는 모습을.
“당신은 이제부터 불사조가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꿈을 꾸며 지상의 모두를 구원하는 자. 유한한 인간의 삶을 반복하며 지난 업의 무게를 계승하는 자.”
눈앞의 사내라면 분명, 잘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장차 어머니신이 될 소녀가 유일하게 무한한 신뢰와 은총을 내리는 존재.
홀로 남겨지게 될 그녀의 부탁에 사내는 하는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동료를 많이 만들어 둬야겠네. 너의 소망을 제대로 이루어 주려면.”
이글거리는 불꽃이 사내의 육체를 휩싸고 돌았다.
“그럼 다녀오세요. 저의 단 하나 뿐인 영웅님.”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소녀가 살며시 등을 떠밀었다.
이윽고 사내가 자취를 감춘 자리엔 날개를 펼친 불사조의 잔재만이 남아있었다.
* * *
‘방금 꿨던 꿈은 뭐지?’
정신이 든 전요한은 놀란 표정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생생한 기억.
전요한이 본 것은 전생의 기억들 중 하나였다.
‘혹시 내 능력의 본질과 관련이 있는 건가?’
오래전부터 의구심이 들었던 부분에 설명이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고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소미궁에서 발견한 어린 악마종, 그리젤다는 질투의 대리자가 되었고 채린도 마녀 후보로서 조정을 당한 상황.
만약 그녀들이 불순하게 변해버린다면 전요한으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혼자서 고민을 잔뜩 떠안은 표정이군요.”
창가에 기댄 채 기다리고 있던 멜리사가 말했다.
그녀는 만일에 대비해 저택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리젤다와 린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네, 하지만 감시를 붙여뒀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동료들 중에선 시르케가 두 사람의 저주를 풀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도니아의 대마법사였던 그녀도 쉽사리 해결책을 찾지 못할 정도면 심각한 사안이다.
“학원도시에서는 해결책을 찾기 어렵겠군요.”
“영국의 왕립 학회라면 적당한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들에게 조언을 구해볼래요?”
가입하기 위한 자격 요건이 제법 까다로운 걸로 알려진 집단이었다.
기본적으로 연금술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지만, 예외 사항도 있다.
혹시 관심 있냐는 듯이 이쪽을 향해 멜리사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다.
“물론, 왕립 학회의 조언은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겁니다.”
유럽의 상류층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전문 분야의 소식들을 손쉽게 수집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번 만남을 주선해 주시죠. 학원도시에 초청하는 게 어렵다면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그동안의 인연을 봐서 소개해 줄게요. 단, 일원이 된 후엔 비밀 유지를 위한 내부 규정을 따라줘야 해요.”
가입 절차는 꽤나 복잡했다.
영국의 왕립 학회.
표면상으로는 각 학계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교류하는 모임이다.
하지만 실상은 연금술사들의 비밀집단이고, 학문적인 연구는 겸업으로 하는 격이었다.
마침 그들의 정기모임이 조만간 현지에서 열린다고 한다.
“아참, 레이나도 함께 데려가면 안 될까요. 유럽 여행을 시켜주고 싶은데.”
“좋습니다. 유명학 국장님에게 비용은 따로 청구하도록 하죠.”
그렇게 해서 전요한 일행은 비행기를 타고 지중해로 넘어갔다.
레이나는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 있는 구름들이 신기한지 창밖을 해맑게 내다봤다.
“와! 마치 솜사탕 위에 휩싸여 있는 기분이야!”
떠들썩해하는 그녀와 놀아주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영국의 중심지, 런던 근교에 위치한 호화로운 성.
그곳은 영국의 왕립 학회가 주기적으로 비밀스러운 모임을 갖는 장소였다.
일행과 함께 연회를 기다리며, 전요한은 침착한 표정으로 거울 속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국 귀족의 예법에 맞게 갖춰 입는다고 조금 행색이 고지식해졌다.
“되도록 저속한 표현은 삼가도록 해요. 많이 개방적으로 변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린 격식을 많이 따지거든요.”
귀부인처럼 단장한 멜리사가 충고를 해줬다.
평소의 그녀와는 많이 다른 이미지였기에 어색하기 그지없다.
“한국의 클럽에서 백댄서처럼 머리를 흔들던 분 맞으신가요?”
“조용히 해요. 혹여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미간을 찌푸린 멜리사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세게 찔렀다.
순간, 입에서 헛바람이 나왔지만 주위의 이목을 고려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멜리사 씨는 저 고상한 신사들과는 결혼하기 틀린 것 같습니다. 성격이 너무 왈가닥이니까요.”
“요즘이 어떤 시대인지 모르네요. 그리고 제 남편은 나를 여왕님이라고 받들어 모시게 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멜리사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내 힐난을 받아넘겼다.
설마 남편도 채찍질로 조련하려는 속셈인 건가?
누가 그녀의 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연회를 시작하도록 합시다. 우선 새롭게 참여하는 일원을 소개해 드리죠.”
왕립 학회의 대표 격인 윌리엄 해링턴이 나타나서 나를 불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이쪽으로 향했고, 전요한은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이능력자입니다.”
학문적인 업적이 쟁쟁한 이들에게 괜히 커리어를 들먹이진 않았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고, 윌리엄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이 친구는 그동안 혼돈에 맞서 현실 세계의 질서를 지켜 왔습니다. 또한, 미지의 영역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인물이죠.”
그것이 바로 일행이 영국의 왕립 학회에 초대된 이유였다.
이들은 숨겨진 비밀에 알고 싶어 하며, 나아가 현실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한다.
아담 카다스키처럼 딱히 불순한 목적이 있다기보단, 그동안 발전의 시대를 이끌어온 지성인들이 지닌 책무감에 가까운 것이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이번에 학원도시를 안정화시켰던데, 세계의 안보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어요.”
“대재해는 앞으로 얼마나 더 발생할 거라고 전망하십니까? 전문가의 고견을 듣고 싶군요.”
여기저기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윌리엄은 잠시 멈추라며 손을 들어 보인 다음, 모두를 연회장의 좌석에 앉혔다.
“오늘밤은 충분히 깁니다. 그러니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죠.”
영국 고위층의 만찬답게 제법 호화로운 음식이 놓여 있었다.
눈앞에 놓여 있는 식기들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던 전요한은 기억을 되짚었다.
전생의 기억들로부터 적절한 사용법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영국에 오신 것이 처음인가요? 이쪽의 예법에 맞게 식기를 능숙하게 사용하시는군요.”
반대편에 앉은 귀부인이 솜씨를 칭찬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노년의 신사도 고개를 끄덕인다.
“젊은 나이라 그런지 친화력이 높군. 혹시 천체의 움직임에 관심이 있나?”
갑자기 복잡한 물리학 용어가 잔뜩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식은땀을 흘리며 듣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해가 저절로 되었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전생의 한 인물이 고독하게 연구했던 내용이다.
적당히 학문적인 대화를 나누며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하자, 왕립 학회의 일원들은 놀랍단 반응을 보인다.
“어쩌면 우리가 새로운 천재를 발견해낸 것일지도 모르겠군.”
“이 정도로 교류가 가능할 줄은 몰랐네요. 딱히 학계 쪽으로 이력은 없는 것 같은데요.”
덕분에, 첫 대면부터 상당한 호의를 받게 되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옆에서 점잖은 척하던 멜리사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아무튼 전요한 씨는 한 가지 공동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있다고 합니다. 이제 슬슬 그걸 들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말투와 평소와 너무 달라서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다.
그녀의 귀부인 행세를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오호, 그것이 뭡니까?”
“신입이 내거는 첫 번째 안건이라니, 귀 기울여 듣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한번 말해보시죠, 어떤 주제로 우리와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싶은 것입니까?”
영국의 왕립 학회 일원들이 귀를 쫑긋 세운 채 저마다 호응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이만한 기회가 또 있을까 싶었다.
유명한 석학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자신의 의견에 관심을 보이다니.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제 친구들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할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