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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46화 (146/180)

제146화. 내일이라는 희망 (1)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워했던 목소리였다.

꿈을 꾸면서도 줄곧 듣고 싶었던 목소리.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비추는 한 줄기의 빛처럼 매달리며 기다려왔던 존재였다.

‘정말로 너인 걸까.’

만약 아니라면 냉혹한 현실에 다시 한번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채린은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널 다시 만나고 싶어.’

설령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말을 건네고 싶었다.

아니, 그렇다면 그녀에게 남은 기회는 이번뿐이었다.

“아아….”

올려다보는 시야에 전요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어서 오라는 듯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런 데서 잠들어 있으면 어떻게 해? 찾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미, 미안.”

채린은 무안한 표정이 되어서 사과했다.

원로원의 장로인 아버지에게 찾아갔다가 벌어진 일.

설마하니 기절한 채 끌려가서 악마종의 둥지에 갇힐 줄은 몰랐다.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네. 앞으로도 함께 나아가자.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전요한은 별생각 없이 웃으며 동료애를 과시했다.

그런데 채린은 심쿵한 듯이 얼굴이 붉어진다.

‘꿈속에서 들은 것과 똑같아.’

만년설이 쌓인 숲속에서 구원해줬던 흑발 사내도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이것은 운명인 걸까.

머릿속이 화끈해져 있던 채린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다름 아닌 전요한의 품에 안겨 있단 것을 말이다.

“내, 내려줘!”

부끄러움에 심쿵사할 것 같은 기분이라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반항하듯이 전요한에게서 벗어난 채린은 흥분한 탓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하아, 하아.”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이 없었던 그녀로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평소 사내들을 멀리한 탓에 이런 쪽으로는 면역력이 부족하다.

“장난은 그만하고 어서 승부를 내! 이쪽은 더 버티기 어렵겠어!”

달려드는 수인족들을 제압하던 레이나가 외쳤다.

단지, 수인족뿐만 아니라 멀리서부터 마물들도 몰려오고 있다.

“알았어! 내게 맡겨만 달라고!”

말을 마친 전요한이 허공을 올려다봤다.

실체를 드러낸 악마종의 둥지가 그곳에 있었다.

메데이아가 숨은 걸 보면 분명 외피는 단단한 재질로 되어 있을 터다.

“저것만 베어버리면!”

전요한은 정신을 집중했다.

최상급의 오러를 운용하여 녹티스의 절삭력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정말로 벨 수 있겠어?”

지켜보던 채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실패하면 메데이아에게 시간을 벌어준 꼴밖에 되지 않는다.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어.”

전생의 기억들과 의식이 연결되면서 무언가 말 못 할 자신감이 생겨났다.

마치 과거에도 이런 상황에 직면했었던 것 같은 기시감.

충분히 시도해 볼법하다 여긴 전요한은 본능에 몸을 맡겼다.

불사조의 날개를 펄럭이며 악마종의 둥지를 향해 곧장 날아간다.

“흥, 이건 쉽게 뚫지 못할걸? 아무리 네가 여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라 하더라도….”

메데이아는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비웃으려 했다.

그런데 날아드는 전요한의 모습이 가까워질수록 점차 말문이 막혀왔다.

‘뭐, 뭐야? 이 압도감은?!’

그것은 본능적인 경고였다.

자신은 결코 눈앞의 상대를 버텨내지 못한다는, 공포와 패배감.

놀라서 입을 벌리는 메데이아의 시야가 점차 성난 불길에 휩싸였다.

다름 아닌, 지금까지 탄생과 소멸을 무한히 반복해온 불사조의 업화였다.

“이게… 인간의 힘이라고?”

최후를 직감한 메데이아는 순간 초연해졌다.

상대의 배후에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그 진정한 정체를 어렴풋이 깨달은 탓이었다.

“어쩐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더라니.”

씁쓸한 중얼거림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이윽고 둥지가 섬광과 함께 반쪽으로 갈라지자, 메데이아는 불길에 휩싸였다.

“아아악!”

영혼마저 태우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추락하여 그대로 지면에 쓰러졌다,

치이이익.

상처를 입은 육체는 회복되지 못하고 점차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불사조의 업화에 당한 악마종의 최후였다.

가망이 없다고 여긴 메데이아는 한쪽 눈으로 전요한을 올려다봤다.

“잘도 내게 이런 짓을 하다니. 아무것도 잃지 않은 주제에.”

마음속으로 간직해왔던 독설이 힘없이 새어나온다.

“아니, 그동안 계속해서 잃어왔어. 내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들을.”

전요한은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그리고는 고요한 눈초리로 주위의 동료들을 한 명씩 바라본다.

“모두가 내게는 사랑하는 연인이었어. 그녀들을 지키겠다 맹세했지만, 끝내 지켜내지 못했지.”

각각의 전생에서 그녀들은 소중한 동료이자, 인생의 반쪽이었다.

윤회하고 나서도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지난 업을 이어받는 대가로 치러야 하는 시련.

전요한의 표정엔 어느덧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전부 지켜내겠다고? 흥미롭네.”

무엇이 재미있는지 메데이아는 킬킬거렸다.

그러다가 웃음을 멈추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

“내가 죽으면 질투의 자리는 다시 공백이 된다. 스반힐트 님이 깨어나시려면 적어도 천 년은 걸릴 테니 후계자를 정해야겠지.”

힘겹게 들어 올린 메데이아의 손가락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가리킨 대상을 확인한 전요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 설마?”

“나의 후계자는 바로 그리젤다야. 이건 악마종으로선 거절할 수 없는 계승이니 어디 한번 잘해 보라고.”

표독스러운 메데이아는 마지막까지 하나의 저주를 남겼다.

이윽고 그녀가 완전히 소멸하자, 마물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러났다.

“뭔가 변화라도 있어?”

전요한은 걱정하며 그리젤다에게 다가갔다.

시르케의 뒤에 숨어 있던 그리젤다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무언가 내 안으로 갑자기 들어왔어. 밀어내려 해도 꿈쩍하지 않아.”

그것은 다름 아닌 질투의 의지였다.

시르케는 그리젤다가 이상하게 변해버릴 것을 염려했다.

“이 아이는 점차 메데이아의 모습을 닮아갈 겁니다. 그전에 대책을 마련해야 해요.”

“방법을 찾아보자. 모두가 있는 학원도시에서.”

그리젤다의 머리를 쓰다듬던 전요한은 몸을 일으켰다.

어찌 됐든 지금은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소미궁을 공략하고 귀환한 전요한 일행.

그들을 반기고 있는 건 관리국 국장, 유명학이었다.

“보아하니 무사히 메데이아를 물리친 모양이군.”

어찌 된 일인지 유명학은 학원도시를 접수한 상태였다.

“저희가 소미궁에 있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죠?”

“대략 한 달이 걸렸네, 전요한 군. 그동안 우리가 개입해서 상아탑을 점거한 것이네.”

멜리사가 제때 정보를 제공해준 덕분에 타이밍을 맞출 수 있었다.

위원회의 주요간부와 원로원의 장로들은 전부 관리국 지하감옥에 구속 중이라고 했다.

다만, 학원도시 자체는 필요성이 있어서 잔존시키기로 결정했다 한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이곳의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당분간은 일상으로 돌아가서 쉬도록 하게.”

유명학은 자신의 직권으로 일행을 곧장 돌려보냈다.

학원도시와 연관된 이능력자들이 의무적으로 개별조사 받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호의였다.

그렇게 해서 저택으로 돌아온 일행은 저마다의 관심거리에 몰입했다.

“당분간은 그리젤다와 함께 연구를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악마종과 가까이 지낸 건 처음이니까요.”

예상대로 시르케는 그리젤다에게 지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그녀가 질투의 의지에 사로잡혀 문제를 일으키면 곤란했으므로, 이러한 연구는 필수적이었다.

“나는 관리국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 아버지에 대한 일도 조금 마음에 걸리고 해서.”

채린은 자신이 학원도시에서 겪은 일들을 알릴 생각이었다.

원로회 장로의 자녀이기도 해서 이번 사건에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이런, 다들 그렇게 바쁘면 누가 이쪽세계에 대해 설명해주는 거야?”

저마다 용무를 밝히며 흩어지자 레이나는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평소 지구의 현대문명에 관심이 많아했는데 기회를 놓치겠다는 염려를 하는 중이다.

“가이드 역할이라면 내가 해줄게. 언젠가 약속했었잖아?”

전요한이 외투를 걸치고 문밖으로 나섰다.

반색한 레이나는 여우귀를 쫑긋하더니 그의 뒤를 따랐다.

“어디로 갈 생각인데?”

충동적으로 움직인 거라 딱히 정해놓은 목적지는 없었다.

함께 거리를 걷다가 요새는 보기 드문 오락실 하나를 발견했다.

“들어가자.”

쾌활한 수인족이 시간을 보내기엔 여기가 최적의 장소다.

“여기는 뭐 하는 덴데?”

레이나는 머뭇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종의 놀이문화야. 동전을 넣고 즐기기만 하면 돼.”

“그러니까, 조이스틱하고 버튼을 조작해서 플레이하는 거라고?”

“맞아. 한번 해볼래?”

어차피 승리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전요한은 적당히 재미있어 보이는 게임을 골랐다.

처음으로 플레이한 장르는 격투 게임이었다.

지금은 고전 명작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모두가 열광하며 밤낮으로 연습했던 히트작이라나.

“3판 2선승제로 하자.”

먼저 규칙을 정한 후 예전에 주로 플레이했던 캐릭터를 골랐다.

동양풍의 의복을 걸친 반인반수.

녀석, 이때부터 뭔가 동물적인 것에 연결점이 있었다.

“그걸로 할 셈이야? 그거 내 동족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백발의 무술가를 고른 레이나가 신기하다며 물었다.

이쪽 세계에도 수인족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그냥 가상의 캐릭터일 뿐이냐. 그럼 시작한다!”

딱히 져줄 생각은 아니었기에 최선을 다해 격투 게임을 플레이했다.

결과는 완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져버렸다.

“하하, 어떻게 하면 처음 하는 게이머한테 지는 거야? 너는 반격을 가하는 타이밍부터 연습해야 해.”

잔뜩 긴장해 있던 레이나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하지만 아직 장르가 두 개나 더 남아 있었으므로 절망하지 않았다.

“다음엔 뭘로 할래?”

“총 쏘는 걸로 하자. 상대적으로 더 오래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거야.”

레이나가 제안한 게임은 협력 모드로만 플레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각자 버티는 쪽으로 진행했는데, 이번엔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와, 너 총 게임은 왜 이렇게 잘해? 역시 이쪽 세계의 무기라 그런지 빠삭하네.”

반응 신경이 중요한 장르이다 보니, 위기가 별로 없었던 탓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그만 실수로 함정을 밟아버리고 말았다.

고전 게임의 특성상, 이건 모르면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는 건데 여기까지 온 적이 전무했다.

“하하, 이번에도 내가 이겼네!”

가뿐히 최종 보스까지 쓰러뜨린 레이나가 뒤늦게 승리를 선언했다.

녀석은 연속으로 이겨서 먼저 목표점을 달성한 상태다.

“…역시 게임으로는 상대가 안 되는 거였나.”

계속해서 연습한다면 언젠간 이기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레이나가 도달한 경지를 넘어서기 어렵다.

수인족의 선천적인 감각은 게임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적응력을 보여주는 탓이다.

“벌칙으로 내일도 놀아줘! 물론 오락실 말고 다른 데서!”

레이나가 승리자로서의 권리를 요구해왔다.

전요한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뭐, 오락실만 보여주고 끝내면 제대로 된 가이드라 할 수 없겠지.”

이번에는 어디로 데려가서 함께 놀아줘야 할까.

벌써부터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레이나를 보며 전요한은 흐뭇하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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