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구원의 손길 (6)
난생처음 경험해보는 기분이었다.
전생이라는 꿈이 끝없이 뇌리에 펼쳐지며 한 자락씩 현실과 겹쳐진다.
‘기억이 연결된다.’
단지 기억뿐만이 아니었다.
과거의 자신이 바랐던 소망, 지켜내고 싶었던 이상, 끝내 굴복해야 했던 현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말 못 할 고양감을 이끌어낸다.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포근하고 온화한,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목소리.
- 지켜내세요.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지구의 여신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묵해왔던 그녀가 지금 환상처럼 나타나 등 뒤를 떠밀고 있다.
‘여신은 단지 지켜봐주고 있었다. 내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헤쳐왔던 과정을.’
그녀와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득할 정도로 머나먼 과거의 일이란 점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베어낸다. 눈앞의 적을.’
어떤 검술을 펼쳐야 할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전생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하나의 궁극적인 연속 동작을 보여준다.
- 당신은 해낼 수 있어요. 설령 그 상대가 죄악의 마녀라고 하더라도.
녹티스의 검신으로부터 거센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몰려온 촉수들이 일거에 덤벼들었으나 전요한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여신에게 어지간히도 사랑받는 모양이네. 질투심이 생겨날 정도로 말이야.”
식은땀을 흘리던 메데이아가 다시 마수를 들어올렸다.
손가락으로부터 자색 광선이 뻗어져 나와 전요한을 위협해온다.
“나는 물러서지 않아!”
전요한은 외침과 함께 눈을 부릅뜨며 날개를 펼쳤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피비린내 나는 고독한 전장의 저 너머였다.
다시 평온을 되찾은 지구에서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하루하루 웃으며 살아가는 미래.
그 미래엔 자신의 모든 것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다.
“으아아아아!”
내면에 잠자고 있던 불사조가 눈을 떴다.
업화의 불길에 휩싸인 채, 전요한은 더욱 걸음을 내달렸다.
티잉!
자색 광선은 불사조의 화염을 꿰뚫지 못한 채, 반사체에 부딪친 듯 튕겨나가며 무력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당황한 메데이아는 재차 공격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이, 이런!”
설마 본모습으로 현현한 단계에서도 밀릴 줄은.
최후의 수단이라도 써야 했기에 저만치 떨어진 수인족 무리에게 환각을 걸었다.
“싸워라! 너희들의 적은 바로 이놈이야!”
마녀의 환각은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다.
“녀석의 말대로 하자! 지금이야말로 마녀를 토벌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이야!”
장창을 치켜든 타우린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의 시야엔 전요한과 메데이아가 서로 뒤바뀌어 있었다.
나머지 수인족들도 마찬가지.
일제히 돌격해가자 레이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갑자기 용감해진 거지? 저놈들은.”
“마녀의 속임수에 넘어간 겁니다. 아마도 승부가 거의 난 것처럼 보였을 테죠.”
시르케는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나서고 싶지만, 지금은 메데이아의 은폐 마법을 무력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리고 함부로 자리를 비우면 그리젤다가 위험해질 수 있다.
“무, 무서워…”
옷깃을 붙잡은 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여자아이.
전요한이 그녀를 보호해 달라고 한 것엔 무언가 이유가 있을지 몰랐다.
곤란한 표정을 짓던 시르케의 시선이 전요한에게로 향했다.
그는 현재 메데이아의 코앞까지 거리를 좁혀간 상태였다.
발이 빠른 몇몇 수인족들이 중간에 방해를 했었지만, 전의에 불타오르는 전요한을 막을 순 없었다.
“크윽!”
아찔한 위협감을 느낀 메데이아가 뒤로 몸을 젖혔다.
그와 거의 동시에 녹티스의 서슬퍼런 검날이 날아들며 왼팔을 베어낸다.
촤아아악!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다면 목이 날아갔을 터였다.
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메데이아는 자리를 피했다.
“여, 여기서 죽을 순 없어!”
궁지에 몰렸긴 하지만 여기는 자신의 본거지였다.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 만한 방법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허공으로 떠오른 후 메데이아는 결계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 계집의 봉인을 풀어야겠어.”
지금 이곳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는 바로 마녀의 둥지였다.
채린을 확실히 세뇌시키기 위해 가둬놓았던 것인데, 어쩌다보니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도 바빠졌다.
“놓칠 것 같으냐!”
허공에 생성된 둥지로 들어가려는 메데이아를 향해 전요한이 소리쳤다.
그는 날갯짓을 하여 그녀에게로 날아가려 했지만, 누군가에게 때 아닌 방해를 받게 되었다.
“어이, 이쪽을 보는 게 어때?”
잠시 잊고 있던 존재였다.
순간, 불길한 직감에 전요한은 서서히 뒤를 돌아봤다.
타우린이 서슬 퍼런 단도로 시르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설마 배신하려는 겁니까?”
“무슨 말이지? 내가 언제부터 너같이 흉악한 마녀와 손을 잡았단 거냐?”
대충 상황은 알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메데이아가 환각을 걸면서 자신들을 적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런 수법은 보통 상위 악마종이 즐겨 사용하는데, 강력한 술자의 환술을 풀어내려면 상당히 골치 아프다.
“그녀는 시르케야. 내게 있어 매우 소중한 동료지.”
“그렇다면 더욱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겠군. 너의 장난질에 그간 수많은 동료들이 죽었다.”
타우린은 백여 명이 넘는 동족을 데리고 소미궁에 들어왔다.
그런데 살아남은 녀석들은 고작해야 서너 명.
소미궁의 주인인 메데이아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을 만도 했다.
“미안하지만 네가 찾는 마녀는 저기 허공에 떠 있어. 최후의 은신처로 숨어들어 가려는 중이지.”
“내가 환각에 걸려 있기라도 한단 말이야? 그렇다면 너는 왜 멀쩡한 채로 서 있는 걸까?”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타우린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조급해진 전요한이 시르케를 바라봤다.
시르케는 곤란한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미안해, 마녀에게 신경 쓰다가 녀석이 시르케를 노리는 걸 눈치채지 못했어.”
레이나가 다가오며 사과했다.
만약 시르케가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
곁에 있는 그리젤다를 지켜내며 영계 마법을 유지하고 있던 와중이라 빈틈을 보인 것이었다.
“대장! 대화할 필요도 없으니까 어서 죽여 버리자!”
“그래, 맞아! 언제부터 마녀가 협상 가능한 상대였다고!”
보다 못한 수인족 두 명이 타우린에게 다가가 따지듯 말했다.
메데이아와의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최후의 생존자들.
그들 역시 현재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녀석들은 왜 끼어드는 거야? 모처럼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데.”
둥지에 들어가려던 메데이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타우린이 시르케를 죽이거나 하면, 분노한 전요한은 주위를 뒤집어 버리고 순식간에 자신에게로 날아올 것이다.
당분간은 전요한이 자신을 신경쓰지 않길 바랐으므로, 새롭게 환각 마법을 걸었다.
“네, 네놈들도 악마의 하수인이었던 거냐? 나를 속이고 이년을 구하려고 하는 거지?”
환각이 덮어씌워진 타우린의 눈빛이 순간 분노로 물들었다.
푸와아악!
타우린이 휘두른 장창에 억지웃음을 짓던 수인족들의 허리가 잘려나갔다.
그 참혹한 모습을 본 그리젤다가 경악해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악!”
어리고, 상처 많은 그녀에게 있어 이 참혹한 광경은 또 다른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갔다.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비극적인 상황이었지만 이런 걸 즐기는 메데이아였다.
“이제 좀 낫네. 역시 너희들은 서로 싸울 때 진가를 발휘한다니까.”
죄악을 떠받드는 마녀에게 죄의식 따윈 없다.
뻔뻔한 태도에 전요한이 화난 표정으로 올려다봤지만.
“이봐,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걸? 난 이년을 죽여버리고 그냥 너와 싸워도 딱히 손해 보는 건 없거든?”
타우린이 그러지 말라는 듯이 경고를 보내왔다.
단도의 서슬 퍼런 끝자락이 시르케의 새하얀 목을 살짝 찔렀고, 그로부터 붉은 혈액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실실 쪼개면서 혓바닥을 놀리는 것이 진심 같았기에 일단 녀석의 뜻에 따르는 척 연기했다.
“알았어, 움직이지 않을게.”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그럼 우선 순순히 투항하라고.”
타우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이 유리한 상황이라 자신했다.
환각에 의해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일단 녀석을 제압해야 해.’
고민하던 전요한은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뒤돌아서 걸음을 내달린 후 그대로 타우린의 목을 베기엔 조금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현재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면 그럭저럭 해볼 만한 도박이기도 했다.
“저기? 너무 꾸물대시는 거 아니야? 자꾸 시간 끌면 이 마녀의 목숨이 위험하다고요?”
“아, 미안. 지금 넘겨줄게.”
다시 한번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전요한은 마음을 정하고 녹티스를 내려놓는 척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기에, 그대로 몸을 비튼 후 타우린을 향해 단검을 투척했다.
“크윽!”
예상대로 녀석은 반사적으로 단도를 들어 올려 투척 공격을 막아냈다.
그로 인해 단검이 튕겨졌고 전요한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찰나의 틈을 노리고 예리하게 파고들자 시르케의 목에 닿아 있던 단검이 다급히 이쪽으로 향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빈틈을 보이고 말았으며 녹티스가 그대로 심장을 꿰뚫었다.
푸욱!
시르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든 한계치까지 능력을 이끌어낸 덕분이었다.
피를 토하며 뒤로 고꾸라진 타우린은 믿기지 않는단 표정이었다.
한편, 녀석을 배후에서 조종했던 메데이아는 분개하며 둥지로 들어갔다.
“쓸모없는 것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그래도 시간은 조금 벌 수 있었어.”
이런 식으로 동료들 간의 분열을 유도하면 승리할 수 있다.
그렇게 확신한 메데이아가 내부에 잠들어 있는 채린을 밖으로 밀쳐냈다.
“버림받는 것의 고통을 한번 느껴 보라고,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계집아.”
일찍이 작은 왕국의 공주였던 메데이아였다.
한 영웅과 사랑에 빠져 가족까지 배신했지만, 돌아온 건 잔혹한 결말뿐이었다.
남편이 되어 평생 함께해줄 것만 같았던 영웅에겐 어느새 다른 여자가 생겨 있었다.
영웅은 메데이아를 버렸고, 그녀는 처절한 복수를 계획했다.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나 그로 인해 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가둬놓고 세뇌하는 것보단 직접 비극을 경험하게 하는 편이 더 빠르겠지.”
마녀의 자질은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깨달았을 때 빠르게 눈을 뜬다.
메데이아의 손에 밀쳐진 채린은 잠든 채로 지면을 향해 추락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눈이 오는 숲속에 봉인되어 있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봄을 그리워하며, 점차 흩어지는 희망을 붙잡고자 노력한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아득한 기억 속에서 한 사내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을 때마다 찾아와 구원의 손길을 뻗어줬던 그는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너라는 꿈을 꾸고 있어.’
얼마나 시간이 흐르더라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때까지는 달콤한 환상 속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치 밖으로 나가는 애벌레에겐 날개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날개가 돋아나려면 너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하니까.
아련한 마음을 앓으며 채린은 손을 뻗었다.
아래쪽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던 전요한은 망설이지 않고 도약했다.
“드디어 찾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