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구원의 손길 (5)
“드디어 만났군. 널 찾아내려고 지금까지 고생 좀 했어.”
어둑한 너머를 주시하던 전요한이 이를 드러냈다.
레이나도 그간 고생한 것이 떠오르는지 표정을 굳힌다.
“단단히 각오해. 조금도 봐줄 생각 따윈 없으니까.”
스산한 마기로 가득한 상위 악마종의 둥지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인족들이 긴장한 채로 무기를 들어 올렸다.
사사삭!
청동문이 닫히자마자 기다란 촉수들이 매서운 공격을 펼쳐 왔다.
아무리 잘라내고 괴사시켜도 무한으로 재생하는 괴랄함이었다.
혀를 차며 타우린이 다급히 나를 쳐다봤다.
“뭔가 방법이 없겠어? 저 녀석들, 전혀 수가 줄어들질 않아!”
“조급해하지 마세요. 우선은 공격루트부터 확보해야 합니다.”
전요한은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기로 했다.
상대는 질투의 대리자, 메데이아.
그녀의 본진으로 들어와 있는 셈이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를 악물고 한참을 더 견뎌내자 일순간 촉수들의 맹공이 멎었다.
이후 어디선가 불길이 뿜어져 밀려왔고, 모두는 허겁지겁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쪽이야!”
“응, 응!”
전요한은 푸른빛이 보이는 쪽으로 레이나를 이끌었다.
안전지대에 거의 다다랐을 때, 기고만장한 메데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 따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희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화르륵 하는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다시 거친 불길이 밀려와 시야를 뒤덮었다.
이윽고 사방이 용암 지대처럼 변해버리며 둘을 고립시킨다.
“이제 어쩌지? 순식간에 퇴로가 차단되어 버렸어!”
끓어오르는 마그마를 보며 레이나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간신히 당장의 위기는 모면했으나 덕분에 꼼짝없이 갇힌 꼴이 된 탓이다.
고압의 열기로 인해 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심호흡도 어려운 극한 상황.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기에 전요한은 각성 모드로 돌입했다.
“잘 붙잡아! 이제부터 날아다닐 거니까!”
불사조처럼 화려한 날개를 펼친 후 부글거리는 용암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에게 매달린 채, 레이나는 창백한 표정으로 외쳤다.
“무, 무섭잖아!”
자칫 잘못해서 추락하기라도 하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건방진 것! 어디서 그런 얕은수를 부리는 거냐!”
메데이아의 진노한 고성이 귓전을 울렸다.
사방에서 촉수들이 맹공을 펼쳐 왔으나 전요한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전부 베어냈다.
금방 재생하고 말아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레이나, 아무래도 네 목걸이를 써야 할 타이밍 같아.”
“뭐? 이거 아빠한테 물려받은 소중한 유물인데.”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야. 어서 줘.”
전요한은 뻔뻔한 표정으로 한손을 내밀었다.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레이나는 눈 딱 감고 시키는 대로 했다.
“나중에 배로 갚아! 안 그러면 네 비상 식량까지 전부 먹어버릴 테니까!”
건네받은 목걸이엔 퇴마의 권능이 깃들어 있었다.
전요한이 그걸 활성화시키자 무력화된 촉수들은 이전처럼 곧바로 재생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이쪽을 노리던 대부분이 보기 좋게 괴사해 버렸다.
“빌어먹을 애송이 녀석들….”
계획에 철저하게 당한 메데이아가 분개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이를 갈아도 녀석은 아직 스스로 나서지 않았다.
전요한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타일을 넘어가자 조금 넓은 공백 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치상으로 최심부의 한복판.
여기서 다른 일행이 모일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만 한다.
“저희는 당분간 집중 공격을 받을 겁니다. 그러니 진영을 방어적으로 형성해 두세요.”
“알겠어. 그런데 마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여태껏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이 기존의 레이드와는 양상이 매우 다르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타우린이 착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나름의 경력 있는 전사인 그로서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압도당하는 레이드는 처음일 것이다.
“메데이아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특기인 환술 마법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것부터 깨부숴야겠죠.”
“환술 마법이라니… 혹시 파훼법을 알고 계시나요?”
“네, 내면적인 트라우마 같은 게 있는 분들은 조심하세요.”
대화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수인족들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크르르!”
“쿠에에엑!”
슬슬 시간이 되었다 싶었을 때, 가장자리의 용암 지대에서 단탈리온의 권속들이 기어 올라왔다.
권속들의 종류는 제법 다양했다.
케르베로스처럼 머리가 세 개 달린 짐승도 있고 온몸이 불타오르는 구울도 있다.
“치잇!”
개체 수가 제법 많았지만, 과감히 적진으로 파고들었다.
풍압이 실린 매서운 참격에 의해 한 무더기의 권속들이 속절없이 사그라진다.
놈들과 뒤얽혀서 정신없이 싸우고 있을 때, 레이나가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네 친구는 어디에 잡혀 있는 거야? 아무리 찾아봐도 눈에 안 보이네.”
확실히, 채린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한 상태였다.
“메데이아가 환각 마법으로 숨겨둔 모양이야. 그녀를 쓰러뜨리기 전까진 찾기 어렵겠어.”
아직 미래시가 발동하지 않아서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전요한은 다시 단탈리온의 권속들을 해치우는 일에 전념했다.
녀석들은 용암 지대에서 끝도 없이 계속 기어 올라온다.
개체 수를 줄이지 않으면 주위가 가득 찰 판이었다.
휘이익!
불타는 해골 병사가 쏜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타우린의 옆구리를 스치듯 지나쳤다.
“크윽!”
난전이 거듭되면서 수인족의 피해가 점차 생겨나고 있었다.
그들이 내심 무력함과 좌절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으음?”
전요한의 시야에 돌연 붉은빛이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명백하게 위험을 예고하는 미래시의 형태.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먼저 앞장서며 길을 열었다.
서걱!
서걱!
검격이 허공을 찢으며 매섭게 날아가 괴이한 형상의 권속들을 난도질했다.
“벌레 같은 놈들이 살고 싶어서 끝까지 발버둥을 치는군! 하지만 헛된 희망은 일찌감치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안전지대를 찾아 달려가고 있을 때, 메데이아가 어디선가 다시 한번 호통을 쳤다.
그녀는 여전히 직접 나서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주위는 지옥을 방불케 할 만큼 극한의 상태로 변해버렸다.
“으헉!”
“조, 조심해!”
이후 화염 기둥이 차례로 솟구치자 수인족들이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후우…. 정말이지 힘드네.”
아슬아슬하게 안전지대까지 도달한 레이나가 허리를 푹 숙이며 숨을 돌렸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그녀도 슬슬 질리는 모양이다.
“메데이아는 일곱 죄악 중 질투를 대변하는 존재야. 대미궁에서 상대했던 하얀 마녀와 최소한 동급이라 할 수 있지.”
전요한은 상대의 위험성에 대해 거듭 설명했다.
살아남고 싶다면, 매 순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터다.
‘적어도 기회가 오기까지는 버텨내야해.’
주위에서 불안정하게 소용돌이치는 화염 기둥을 보며 둘은 식은땀을 흘렸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각도 무뎌져 가던 때였다.
마지막 함정 패턴까지 무사히 넘긴 전요한 일행에게 독설이 쏟아졌다.
“주제를 모르고 잘도 여유 부리고 있군! 그 어리석음을 죽는 순간까지 고통스러운 후회로 남겨주마!”
지금까지 말로만 우리를 위협하던 메데이아가 어둠 속에서 거대한 마수를 뻗어온 것이다.
‘드디어 녀석이 움직인다.’
심상치 않은 마기를 느낀 수인족들이 기겁하며 공격을 퍼부었다.
“저건 도대체 뭐야?!”
“또 허튼수작 부리지 못하게 해!”
화려한 스킬들이 허공을 수놓았지만 마수는 별다른 피해 없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이 손바닥을 펼친 순간, 삽시간에 지옥이 펼쳐졌다.
콰쾅쾅쾅!
폭음과 함께 여러 갈래의 자색 광선이 주위를 휩쓸었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수인족들이 그대로 비명횡사했고 생존한 동료들은 절망한 표정을 지었다.
“미, 미친….”
“어떻게 이런….”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강함.
보조 마법 따위로는 막아낼 수 없는 위력이었다.
“이봐,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기에 전요한은 다급히 레이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충격을 받았는지 미동도 하지 않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으, 응….”
아마도 대미궁의 최심부에서 벌였던 격전이 떠오른 탓이리라.
당시에 목숨을 잃었던 입장으로서는 충분히 트라우마가 도질 만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테니까.”
전요한은 굳건하게 곁에 서며 레이나를 안심시켰다.
그때 배후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황이 매우 혼란스럽군요.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 뒤따라왔습니다만.”
대마법사 출신의 하프엘프, 시르케였다.
그녀는 전요한과 레이나에게 감지 마법을 걸어놓아서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지하 유적지에 진입하면 거점을 더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너, 전에 변이종의 여왕을 쓰러뜨린 마법사구나.”
시르케가 데려온 수인족들을 보며 메데이아는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해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흉측한 마수를 뻗어 모두를 다시 한 번 공격하려 한다.
기존의 수인족들이 필사적으로 그 접근을 막는 동안 시르케는 마법을 영창 했다.
“밤하늘을 밝히는 수많은 영혼들이여. 여기에 선 내가 그대들의 아득한 열망을 노래하노라. 눈앞의 어둠과 함께 맞서 싸울….”
이후 시르케가 서 있는 지면에 심상치 않은 마법진이 생겨나자 주위의 암막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본모습이 드러난 메데이아가 위협을 느꼈는지 뒤로 물러나며 이를 갈았다.
“크으… 빌어먹을….”
각성 모드에 돌입한 시르케는 상위마족도 멸절시킬 공격 마법을 시전 가능하다.
“전부 죽여 버리겠어. 내 비장의 수를 써서라도….”
용암 지대의 저 너머에서 칠흑빛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메데이아의 수작질을 막기 위해 전요한과 레이나가 용감하게 돌격했다.
“위험한 짓은 그만둬!”
“함께 죽기라도 하자는 거야?”
유효타를 먹일 기회였지만, 암흑장막이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시 고전하던 와중에 녹티스가 순간 빛을 발하며 암흑 장막을 파훼했다.
“그 검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메데이아가 의문을 표했다.
그녀는 녹티스의 외형을 잠시 살피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그랬었지. 너는 불사조의 의지를 이어받은 현생자. 지구의 여신에게 받은 은총을 통해 지난 업을 전승받을 수 있어.”
전요한의 정체에 대해서는 마계영지의 마족들을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
불사조는 오래된 전승에 등장하는 신수이자, 무한한 순환과 업화의 상징.
시련에서 살아남을수록 지난 생의 결실을 재현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 그렇다.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 아직 끝내지 못했으므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할 과업의 종장부다.
순간, 뇌리에 그동안 도움을 줬던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각자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음 짓는 것이, 전요한의 승리를 믿는 듯했다.
“…기억이 뒤얽힌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전생의 시련들이 물줄기처럼 뻗어나간다.
이윽고 과거의 의지들이 전승되자 전요한은 투지를 불태웠다.
“반드시 쓰러뜨린다!”
메데이아의 목젖을 향하는 녹티스가 주인의 의지에 반응하며 사납게 울부짖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