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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43화 (143/180)

제143화. 구원의 손길 (4)

“이봐, 너 아까 불길한 암시 같은 게 보였다고 그랬지?”

미궁 같은 통로를 뒤따르던 레이나가 질문을 던졌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솔직히 이야기했다.

“실은 저번에 대미궁을 공략하고 나서 한 번 더 환생했어.”

“환생? 알에 들어가서 며칠 간 잠자는 것 말이야?”

“응, 그러고 나면 예전처럼 약해지는 대신 새로운 능력이 생기잖아.”

“신기하네, 미래시라니. 어떻게 보면 「절대면역」보다 더 놀라운 특성이야.”

레이나는 믿기 어려운지 감탄사를 연이어 내뱉었다.

그녀가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을 때, 배후로부터 인기척이 들려왔다.

“음? 뭐지? 시르케가 수인족들과 함께 뒤따라온 건가?”

“글쎄. 아군은 아닌 것 같아.”

전요한이 경계심을 드러냈다.

예민한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그들의 걸음걸이가 수상했던 탓이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처음 보는 수인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호, 너희가 지하 유적지를 발견한 탐험가인가? 만나서 반갑다.”

수인족의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오며 악수를 청했다.

녀석은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진 않았지만, 저 너머에 있는 보상들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여기엔 유독 수인족들이 많네. 아르카나 대초원에 게이트라도 열린 건가?”

이전부터 동족을 자주 만났던 레이나가 의문을 표했다.

“너는 대초원에서 온 게 아니었나? 혼자서 다른 차원을 떠돌아다니다니, 용감도 하군.”

수인족의 우두머리는 레이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가 갈기부족장의 딸이란 사실까진 눈치채지 못했다.

“뭐, 이렇게 된 이상 함께 공략을 하죠.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저희도 그쪽에 간섭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전요한이 절충안을 제의했다.

녀석들과 싸우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채린이 위험해질지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좋다. 그러면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고.”

수인족의 우두머리는 자신을 타우린이라고 소개했다.

나름 이쪽 방면에 잔뼈가 굵다며 자기 어필을 했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제길, 이 녀석들은 왜 죽어도 자꾸 되살아나는 거야?!”

“확실히 처리하고 가지 않으면 포위되고 말 텐데 어떻게 하지?”

산산조각이 나도 형체를 되찾고 일어서는 언데드들을 보며 수인족들이 투덜거렸다.

자신감이 넘쳤던 그들은 어느덧 전요한과 레이나에게 의존적으로 변해 있었다.

“여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에도 너희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은근히 기대감을 내비치는 타우린의 질문에 전요한은 잠시 생각했다.

“어디선가 망자들의 응집된 한이 느껴집니다. 그것 때문에 망자들이 안식을 찾지 못하고 여길 떠도는 것 같아요.”

“거기가 구체적으로 어느 방향이야? 대략적으로라도 알려 줘.”

“음… 저쪽인 것 같은데….”

전요한이 가리킨 통로의 끝자락엔 검붉은 결계에 휩싸인 마법 장치 하나가 있었다.

“저걸 작동시키면 아까 그 언데드들이 더는 되살아나지 않으려나?”

“전요한의 말은 여태 틀린 적이 거의 없으니… 아마도 그렇겠지.”

“주위에 함정이 있는지만 조심해. 꼭 이런 데 많이 배치되어 있더라.”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뭔가 수상했는지 수인족들은 심증을 가지고 마법 장치에 다가갔다.

하지만 아무리 공격 스킬을 퍼부어도 검붉은 결계는 균열 하나 없이 건재했고 모두가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거?”

“결계를 해제하기 위한 선행 과제가 있나 본데?”

“하긴,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퍼즐처럼 숨겨진 요소를 찾아야 했던 게 많이 있었지.”

이제 다들 어느 정도는 공략의 방향성을 짚어댄다.

수인족들의 생각대로, 저 결계는 중간 보스를 제거해야 해제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전요한은 옆에 있던 레이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너도 눈치챘지? 준비해.”

그녀에게 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 상황과 관련된 것이었다.

배후에서 몸을 숨긴 채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는 녀석의 존재.

그리고 녀석이 마지못해 습격을 감행할 잠재적인 타이밍.

계획이 성공하면 쉽게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응, 알겠어!”

불안한 듯이 표정을 굳히고 있던 레이나가 곧바로 도약하며 하나뿐인 통로를 봉쇄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스삭 하는 소리와 함께 섬찟한 무언가가 내 앞으로 날아들었다.

예전이었으면 조금도 반응하지 못할 만큼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카랑!

현재의 전요한은 그 기습을 그럭저럭 막아낼 수 있었다.

“아까부터 뒤쪽에서 느껴졌던 기분 나쁜 기운은 이 녀석이군.”

무구를 맞대고 있는 녀석은 마치 닌자처럼 검은 복장으로 신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언데드 중에서도 제법 상위 레벨에 속하는 개체.

서열이 높은 악마종은 저런 암살자를 수족처럼 부려서 적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

암살자 언데드는 말없이 푸른 안광을 번뜩이더니 도약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레이나가 통로를 봉쇄했기에 도망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런 놈이 우리 뒤를 계속 따라다니고 있었던 거야?”

“분명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틈을 보였으면 언제라도 습격당할 수 있었겠어.”

얼떨결에 무구를 빼 들고 대치하던 수인족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다소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다시 접전이 벌어지려 할 때, 갑자기 암살자 언데드가 입을 열었다.

“큭큭… 역시 보통 놈들은 아닌 모양이로군.”

녀석은 한참 전부터 일행을 줄곧 감시해오고 있었다.

“뭐야, 전요한. 이건 왜 우리에게 미리 말 안 해줬어?”

“미안. 저 암살자를 여기로 유인해서 가둬 놓으려면 조금 연기가 필요했어.”

“…그런 거였군. 알겠어. 자, 그럼 다들 어서 해치우자고!”

전요한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타우린이 수인족들과 함께 암살자 언데드를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암살자 언데드가 전투를 준비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운 좋게 기습을 막아냈지만 그래도 너희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이야기 들어주지 말고 그냥 빨리 처리하죠. 아무래도 겁을 주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전요한은 녀석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경험상 이건 불리해졌을 때의 수작질에 불과한 탓이었다.

“크으… 네놈은 뭐냐? 행동거지가 심상치 않아서 가장 먼저 노린 건데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 것이 내 판단 실수였다.”

암살자 언데드가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이쪽을 노려봤다.

녀석은 재차 전요한을 공격하려 시도했지만 이미 정체가 들통난 암살자의 움직임은 한계가 있었다.

결국, 녀석은 일행이 퍼붓는 전투 스킬에 의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당한 후 무릎을 꿇었고….

화르륵!

마지막으로 레이나의 불꽃 주먹질에 의해 깔끔한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거센 불길에 휩싸여 점차 형체가 사라져가는 암살자 언데드.

녀석은 완전히 사그라들기 전에 주인의 마지막 말을 남겼다.

“메데이아 님께서 너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처절한 죽음을 각오하고 있어라, 애송이들아.”

질투의 대리자, 메데이아.

분명 그녀는 유적지의 최심부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암살자 언데드가 검은 재로 화해 사라지는 걸 보며 전요한은 뒤돌아섰다.

“수고했어. 정말 너희랑 같은 일행이 아니었으면 모르긴 몰라도 여태까지 한참 고생했을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타우린이 다시금 칭찬의 말을 건네왔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이군요. 여기까지 함께 왔으니 마지막까지 잘 해보도록 하죠.”

언젠가 뒤통수를 치리라 예상했지만, 전요한은 딱히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들을 이용하는 건 자신이다.

유적지 공략에 적당히 써먹다가 본심을 드러내면 방패막이로 내세울 생각이었다.

‘배신을 어디 한두 번 당해보나.’

대미궁에서의 오랜 생활을 통해 중상모략은 이미 익숙한 터였다.

태연한 표정으로 통로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왔던 길을 되돌아오자 불사의 해골 병사들이 출몰했던 영역이 다시 나타났다.

아까와 달리 골치 아픈 문젯거리는 발생하지 않았다.

어스름한 기운의 마법 장치도 가동 중지시켰고 수문장 격인 암살자 언데드도 해치운 덕분이다.

“오호, 이 녀석들 이제 되살아나지 않는데?”

“좋았어. 어서 가자고!”

더는 불사가 아닌 해골 병사들을 차례로 무찌르며 수인족들이 쾌재를 불렀다.

‘처음 이 영역에 도달했을 땐 다들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절박한 표정을 지었었지.’

자신들의 활약이 없었으면 여기서도 시행착오를 겪고 최소 몇 명 정도는 전사자가 발생했을 터였다.

최전방에 있는 전요한이 레이나와 함께 묵묵히 길을 열고 있을 때였다.

“끼야아아악!”

외길로 한없이 뻗어 나간 통로의 저편으로부터, 소름 끼치는 비명이 들려왔다.

이곳은 외다리로 되어 있어서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상황.

뒤돌아보니 배후는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어서 가만히 있으면 밑에 있는 수로로 떨어질 운명이었다.

‘지하 수로의 수면 아래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들어가선 안 된다.’

식인을 하는 피라냐들이 수면 아래에 잔뜩 서식하는 중이었다.

결국, 밀려오는 몬스터 군세를 뚫고 어떻게든 길을 열어야 하는데 그 와중에도 몇 가지 함정이 있었다.

“제길, 이렇게 된 이상 죽기 살기로 싸우자!”

“저 지하 수로에 조금이라도 몸을 담갔다간 온몸이 썩어들어 갈지도 몰라!”

경각심을 느낀 수인족들이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조바심 나는 상황을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불의의 피해가 생기기 전에 전요한은 허공으로 푸른 시약을 뿌렸다.

그러자 저만치서 날아오던 마물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놀란 수인족들은 멈춰 선 후 저마다 다급히 전투태세를 갖췄다.

“뭐야, 은닉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거야?!”

“일단 다 해치워버려!”

실체가 드러난 마물들은 현재 전력으로 물리치기 어렵지 않았다.

그 수가 제법 많았지만 말이다.

“정말 끝도 없이 몰려오네!”

“제2구간에서 자폭하던 놈들도 있어! 조심해!”

각양각색의 몬스터들이 숨 막힐 정도로 끝없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수인족들은 분전하면서 그 물량 공세를 겨우 버텨낼 수 있었다.

뒤쪽에서 외다리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전요한은 옆에 있는 레이나를 흘끗 쳐다봤다.

“슬슬 준비해.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응, 알겠어.”

오랫동안 함께해왔던 동료였기에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외다리 통로 너머에 있는 건 바로 메데이아.

학원도시에 어둠을 드리우고 동료들에게 위협을 끼쳐왔던 장본인이었다.

‘반드시 쓰러뜨리겠어.’

마녀의 자질이 있다며 잡혀간 채린을 구해낼 것이다.

이렇게 음침한 곳에서 그녀가 혼자 악몽을 꾸는 걸 내버려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의지를 불태우던 전요한은 마침내 외다리 통로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터벅터벅.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철창을 부수고 어둑한 공간의 내부로 발을 내디뎠다.

“조금 늦었네? 지켜보고만 있느라 지루하던 차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메데이아의 음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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