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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42화 (142/180)

제142화. 구원의 손길 (3)

타다다닥!

전투 자세를 취한 레이나가 걸음을 내달렸다.

조금만 더 거리가 좁혀지면 이제 전투 범위 안이다.

이윽고 광기의 처형자가 갈고리 형태의 닻을 높이 치켜들자….

휘이익!

전요한은 여기서 전리품으로 얻었던 아이템 중 하나를 녀석에게 투척했다.

마력 수류탄.

원래 대량 살상 용도인데 덩치 큰 우두머리 몬스터에게도 효과는 좋은 편이다.

콰콰콰쾅―!

마력 수류탄의 위력은 확실히 강력했다.

하지만 최심부의 중간 보스가 이 정도로 쓰러질 리는 없겠지.

폭발음이 멈추자 예상대로 회갈색 안개 속에서 커다란 실루엣이 움직임을 재개했다.

“크르르….”

조금 전의 폭격으로 화가 났는지 처형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비록 투박한 투구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대충 상상이 간다.

닻을 끄는 소리가 조금 빨라졌고 레이나의 심장도 더불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확실하게 어그로를 끌려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피해를 줄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그건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함을 의미한다.

콰지지지직!

광폭하게 내리쳐진 갈고리 형태의 닻이 레이나가 서 있었던 지면을 무참히 박살 냈다.

아슬아슬하게 그 범위에서 벗어난 후, 처형자의 복부를 향해 단검을 날렸다.

푸욱!

앞서 마력 수류탄이 활약해준 덕분인지 녀석의 마력 보호막은 단번에 꿰뚫렸다.

그리고 단검의 손잡이 부분에 매달려 있는 작은 주머니.

저 안엔 인화성 물질인 「환영의 가루」가 들어 있는데 불꽃과 반응하면 일정 범위에 환각 효과를 일으킨다.

“지금이야!”

“응, 알겠어!”

단검이 박힌 부분을 확인한 레이나가 화염병을 날려 보냈다.

이어서 폭발음과 함께 주위를 뒤덮는 푸른 안개.

뒤로 물러나 잠시 대기하고 있으니 광기의 처형자가 헛것이 보이는지 주위를 닥치는 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르르!”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진척이다.

단검을 회수한 후 두 사람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중간에 당혹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

콰드득!

내구도에 무리가 갔는지 레이나가 사용하던 건틀렛이 비명을 지르며 망가진 것이다.

“이런….”

그동안 변변찮은 장비로 버티고 있었는데 타이밍이 안 좋았다.

뒤로 물러나 있을 때 광기의 처형자가 정신을 차렸다.

“크르르….”

잠시 어리둥절하던 녀석의 시선이 곧바로 레이나를 향했다.

다시 닻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시간을 벌 만한 것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아까부터 함께하던 전요한이 대타로 나서줬다.

“고마워.”

“당연한 거잖아. 동료끼린데.”

대미궁의 최심부까지 동고동락하며 지내온 사이였다.

씨익 하고 웃어 보인 후 전요한은 전투에 돌입했다.

콰지지지직!

광기의 처형자는 그간 두 사람이 입혔던 데미지 때문에 상당히 난폭해진 상태였다.

이러면 패턴이 좀 불규칙해져서 파고들 때 조심해야 한다.

갈고리 닻이 내리쳐진 틈을 타서 처형자의 하체에 돌격 검술을 한 번 더 먹였다.

푸콱!

유효타는 제대로 들어갔다.

전요한은 잠시 움찔하는 처형자와 거리를 두고 틈을 노렸다.

‘이번에 끝을 맺어야겠어.’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고 클라이밍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타다다닥-!

갈고리 닻이 엄한 곳에 내리쳐진 순간을 이용하여 단숨에 견골갑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기로 한 것이다.

사실 제대로 클라이밍을 하려면 로프 등의 부속 장비가 필요한데 아쉽게도 지금 그런 건 보유하고 있지 않다.

“크르르!”

광기의 학살자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팔에 올라탄 전요한을 우악스러운 왼손으로 낚아채려 했다.

그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던 전요한은 타이밍 좋게 녀석의 상박근에서 도약을 시도했고,

푸욱!

서슬퍼런 녹티스의 검날이 처형자의 목에 처박혔다.

이어서 상처 부위에 샘솟듯 발생하는 출혈.

물론 그것으로는 부족했기에 손잡이를 잡은 채 그대로 몸에 중력을 실었다.

촤아아아아악!

어차피 투구 때문에 머리는 공격하기 어려우니 밑으로 하강하면서 등허리까지 벤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타격을 주기 위해 착지 전에 한 바퀴 돌며 하체를 베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타다다닥!

뒤로 물러나면서 잠시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레이나가 마무리를 짓기 위해 단검을 쥔 채 달려오기 시작했다.

방금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혀서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한 것 같다.

“크르르!”

하지만 그건 좀 성급한 판단이었다.

메데이아의 권능에 의해 녀석은 시간이 흐를수록 패턴이 불규칙해지기 때문이다.

‘설마 변칙공격인가?’

위화감을 눈치챈 전요한이 광기의 처형자에게 먼저 재공격을 시도했다.

콰지지지직!

광폭하게 내리쳐지는 갈고리 형태의 닻을 피하며 침착하게 틈을 노렸다.

폭주하는 바람에 패턴이 불규칙해진 건 여전하나, 공격 직후의 무방비 상태가 이전보다 확연해졌다.

지금이 바로 적절한 타이밍.

다시금 갈고리 닻을 들어 올린 녀석을 향해 검격을 날렸다.

서걱!

갈고리 닻을 들고 있던 팔이 초승달 형태의 오라에 의해 간단히 절단되었다.

이건 현존 최강이라 불리는 멜리사도 쉽게 발현하지 못하는 상급의 전투 스킬 중 하나.

아무리 수문장이라고 해도 저렇게 데미지를 입은 상태에선 막아내기 어렵다.

“크르르!”

불의의 습격에 당한 처형자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전요한을 향해 돌격해왔다.

본래 저 녀석은 갈고리 닻이 쇠사슬로 팔에 휘감겨 있어 여태껏 움직임이 느렸는데, 막 그 족쇄에서 해방된 상태다.

쿵쾅거리면서 다가온 처형자는 어지간히도 화가 났는지 다짜고짜 하나뿐인 주먹으로 전요한을 내리치려 했다.

그 권격을 간발의 차로 피하자 레이나가 도약하여 회심의 공격을 시도했다.

그녀는 단검을 휘둘러 처형자의 왼팔마저 날려버린 다음 마무리를 짓기 위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스르르르!

푸른 강기가 짧은 검신을 타고 불길처럼 치솟아 올랐다.

이후 둔탁한 절단음과 함께 처형자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 * *

첫 번째 관문의 수문장을 쓰러뜨리자 붉은 보석이 튀어나왔다.

환요석.

마족이 최후를 맞이할 때 그 의지가 결집하여 응고된 결과물.

아마도 이것이 바로 녀석의 강함에 대한 이유인 듯했다.

“괜찮은 전리품이네. 어떤 환요석은 높은 등급의 유물로 화하기도 하잖아.”

“한번 확인해봐. 그런 종류일 가능성이 있으니까.”

전요한은 흔쾌히 환요석을 넘겨주었다.

붉은 색채를 발하는 그것의 영롱함에 레이나가 눈을 반짝였다.

“아름답다. 마치 영혼이 담겨 있는 것 같아.”

그러고는 귀중한 선물인 것처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환요석의 형체가 이지러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마치 소유자의 바람을 이해하기라도 하듯, 그것은 가장 활용도가 있는 건틀렛으로 화했다.

“신기하네. 조금 전의 말을 알아들은 걸까?”

“전투를 계속하고자 하는 마족의 의지가 전승된 것이라고 생각해. 소중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라든가.”

전요한은 별생각 없이 설명을 시도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레이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모, 몰라! 아무튼 어서 가자고! 네 친구가 붙잡혀 있다고 했었잖아!”

메데이아의 지하유적지에 붙잡혀 있는 인질은 다름 아닌 채린이었다.

레이나는 모르는 존재이지만, 전요한의 소중한 친구라면 반드시 구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그래. 잡담이 길었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앞으로 나아갔다.

휘리릭!

통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을 때, 건너편의 벽에서 독화살 하나가 갑자기 날아왔다.

물론 독화살이란 걸 직접 확인하진 않았지만, 전요한의 미래시는 그 위험성을 알려줬다.

티잉!

그냥 피할 수도 있었으나 녹티스를 휘둘러 독화살을 튕겨냈다.

‘발을 잘못 디뎠다가 함정을 건드릴 수도 있다.’

위협요소는 독화살뿐만이 아니었다.

드르륵.

지면의 타일 일부가 붉은색으로 변하더니 옆으로 밀려났다.

그로 인해 드러난 구덩이 밑바닥엔 예리한 창살들이 밀도 있게 박혀 있다.

“이번 구간부턴 뭔가 위험한 함정이 많네.”

“내가 최대한 처리해 보겠어. 너는 누군가 다가오진 않는지 외부 경계를 해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통로를 돌아다니는 암살자 몬스터가 하나 있을 법도 했다.

만날 가능성은 적지만 그래도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렇게 한참을 더 나아간 결과, 막다른 길이 앞을 가로막았다.

“…더는 길이 없네?”

“아직 단정하긴 일러.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기도 하니까.”

어리둥절해하는 레이나를 뒤로 한 채, 착용 중이던 반지를 매만졌다.

이건 미지의 금속으로 주조된 유물인데 뇌전 속성이라 금속 탐지기 역할도 한다.

마력 주입한 반지를 벽면에 갖다 댄 후, 전요한은 천천히 좌우로 이동해보았다.

그러자 중간 즈음에서 티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부에 기계 장치가 숨겨져 있다는 의미다.

“역시 히든 요소가 배치되어 있었군. 개방 조건을 찾아야겠어.”

“이거 같은데? 아까 주웠어.”

어디서 났는지 레이나가 열쇠를 품에서 꺼내 내밀었다.

움푹 파인 홈에 끼어 넣자,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면이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계단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지하 유적지에도 층계가 존재하는 거야? 골치 아프네.”

아직 멀었단 사실이 실망스러웠는지 레이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복잡한 구조는 아닐 거야. 힘을 내자.”

계단을 완전히 내려가자 은은하게 푸른빛을 발하는 여신상 하나가 보였다.

“뭐, 뭐야 이건?”

“보아하니 원래는 마족의 소유지가 아니었나 보네.”

노련한 고고학자도 아니고, 자세한 것까진 알 수 없었다.

전요한은 눈길을 돌린 후 놀라는 레이나를 이끌었다.

“그냥 느낌일 뿐인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레이나는 푸른빛이 사라진 여신상을 물끄러미 뒤돌아봤다.

감각에 예민한 수인족이라 그런 것일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신상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따로 있는 모양인데?”

전방을 바라보던 전요한이 녹티스를 들어 올렸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변이체 여러 마리가 통로 저편으로부터 매섭게 돌격해온다.

갈고리 형태로 예리하게 튀어나온 발톱과 우악스러운 앞니.

아까 봤던 변이체들과는 상당히 형체가 다른 녀석들이었다.

“해치우면 그만이야! 얼마나 몰려오든 상관없어!”

레이나는 침착하게 변이체들과 맞서 싸웠다.

새롭게 얻은 건틀렛이 붉은 불길을 일으키며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놈들에게 너무 가까이 붙지 마! 위험해!”

적진을 주의 깊게 살피던 전요한이 다급하게 주의를 주었다.

미래시가 발동한 시야에 온통 붉은 색채만이 가득한 탓이었다.

“어어, 설마?”

맞붙어서 격전을 벌이던 변이체들의 몸체가 붉게 변하자 레이나가 당황했다.

콰광!

이윽고 폭발음과 함께 변이체들이 차례로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자폭하면서 뾰족한 파편과 함께 체내의 맹독을 사방에 퍼트리는 공격 유형.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레이나가 그대로 폭발에 휩쓸리고 말았다.

“크윽!”

황급히 호신강기를 펼쳐서 버텨보았지만, 성장치가 예전으로 돌아간 그녀로선 버티기 어려웠다.

위기의 순간.

착용 중인 건틀렛으로부터 붉은 불길이 휘몰아치며 주위의 잔해물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대, 대단한데?”

감탄한 레이나가 허공에 흩날리는 재를 바라봤다.

“예전보다 약해진 걸 좀 고려하면서 전진해. 그러다 정말로 황천가는 수가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전요한이 타이르듯 훈계했다.

그는 다시 어둑한 통로를 향해 앞장서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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