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구원의 손길 (2)
“어딜 도망가려고.”
정황상 백발 사내는 각 거점에 서신을 보낸 장본인이었다.
싸움을 유도해놓고 불리하니까 혼자서만 내빼려고 하다니.
덕분에 여기까지 온 전요한으로서는 봐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사사삭!
등을 돌린 백발 사내가 허공에 몸을 내던지더니 검은 그림자로 변했다.
쏜살같이 도망치는 녀석을 쫓으려 하자 눈빛이 멍한 자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악마의 능력으로 세뇌당한 포로들이야! 상대해봤자 시간낭비라고!”
스멀거리는 마기를 확인한 레이나가 놈들을 무시하고 우회하려고 했다.
하지만 숲속의 그늘진 곳으로부터 뻗어 나온 촉수들이 그녀를 방해했다.
“크윽!”
날렵한 움직임으로 피한 레이나가 추격을 잠시 중단했다.
숲속에 음침한 기운이 감돌면서 무언가 위험한 직감이 든다.
“협력해서 돌파하는 수밖에 없겠어. 누군가는 미끼가 되어야 해.”
주위를 둘러보던 전요한이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레이나도 의견이 같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시선을 끌게. 그동안 촉수들을 제치고 포위망을 빠져나가!”
불리한 상황이긴 하지만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레이나가 재촉하자 전요한은 망설이다 몸을 돌렸다.
“그럼 부탁할게!”
지금은 백발 사내를 사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레이나가 시간을 버는 동안 나무를 타고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끈질기게 쫓아오는군요. 언제가 돼야 포기할 겁니까?”
그림자 상태로 도망치던 백발 사내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전요한은 씨익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네가 죽을 때까지.”
악마종과 그 하수인은 절대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는다.
그것이 전요한의 첫 번째 전투 수칙이었다.
스걱!
한 차례 휘둘려진 녹티스가 그림자의 끝자락을 베어냈다.
흡사 피 보라 같은 마기가 허공에 흩날려진다.
“네, 네놈!”
따라잡혔다 생각한 백발 사내는 하는 수 없이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는 다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며 잔뜩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말투가 바뀌었네? 존댓말이나 하며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라 판단한 거야?”
전요한은 도발하는 포즈로 백발 사내를 바라봤다.
녀석은 이제 독 안에 든 쥐.
여유롭게 사냥하는 일만 남았다.
“조금 성장했다고 메데이아 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래 봤자 넌 인간일 뿐이니까.”
말을 마친 백발 사내는 체내의 마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평범했던 모습이 괴수처럼 부풀어 오르며 진정한 죄악의 사도로 거듭난다.
“그거 알아? 나한테 인간이 약하다고 했던 놈들, 전부 땅 밑에 묻혀 있다고.”
전요한이 녹티스를 양손에 쥔 채 먼저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뻗어 나온 촉수들이 진로를 방해했지만, 그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푸슉!
눈으로 좇기도 어려울 만큼의 속도로 모든 장애물을 베어 넘기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발 사내는 처음으로 자신이 질 수도 있단 느낌을 받았다.
“이, 인간 주제에….”
정교한 움직임으로 눈앞의 모든 장애물을 쾌속으로 베어내는 전요한의 경지는 예술에 가까웠다.
아까는 봐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활약상을 펼치고 있다.
당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한 백발 사내는 시간을 벌어야겠다 생각했다.
“네놈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사실 다음 층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설령 기존의 계획이 상당 부분 틀어지게 되더라도 말이다.
예상치 못한 말에 전요한은 잠시 멈춰섰다.
“그럼 여기가 최심부라고?”
“아니, 정확히는 이중 던전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거지.”
이번 층계엔 숨겨진 지하 유적지가 존재했다. 오직 자격 있는 자만이 진입할 수 있었으며, 그 기준은 강함의 순서였다.
“갑자기 정보를 알려주는 이유가 뭐지? 무슨 꿍꿍이야?”
“궁금한가? 그렇다면 알려주지. 그곳에 네가 아는 여자애를 붙잡아뒀다. 채린이라고 했던가?”
학생회장 채린.
아카데미에서 알고 지냈던 그녀가 인질로 붙잡혔다는 말에 전요한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뭐? 도대체 린을 어쩔 셈이야? 너희가 얻을 수 있는 게 뭔데?”
“그녀는 괜찮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메데이아 님의 말씀에 의하면 혹한의 마녀가 될 수 있을 거라더군.”
다만, 반항을 너무 심하게 해서 기를 꺾을 겸 가둬놓고 동료들이 전부 죽는 모습을 지켜보게 할 계획이라고 했다.
백발 사내가 아무렇지 않게 떠들어대는 말에 전요한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해갔다.
“린을 건드리지 마. 만약 그녀가 다치기라도 하면 너희를 전부 죽여 버리겠어.”
대미궁에서 우여곡절 끝에 현실로 되돌아온 이후 새롭게 알게 된 친구였다.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전요한으로선 자극되지 않을 수 없다.
“호오, 네가 그녀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메데이아 님의 선택을 받은 이상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계속해서 나불대던 백발 사내는 눈앞에서 솟구치는 신비한 불길에 놀랐다.
각성모드에 돌입한 전요한이 날개를 펼치며 전력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근접한 전요한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보려 노력하는 백발 사내.
하지만 쇄도하는 검격에 점차 불리해져만 갔다.
“…크큭!”
완전한 열세임에도 백발 사내는 뭐가 재미있는지 음침하게 웃었다.
그것은 자조적인 느낌을 주다가도 비웃음처럼 변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렵게 했다.
“지하 유적지의 입구가 어디 있는지 말해!”
“재주껏 알아봐라. 네가 제시간에 어디까지 다가갈 수 있는지 궁금해지는군!”
이로써 주어진 임무는 충분히 해내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한 백발 사내는 눈을 감았다.
“으아아아아!”
화가 난 전요한이 녀석을 난도질하듯 베어냈다.
하나하나가 치명상이어서 백발 사내의 숨통을 끊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털썩.
무릎 꿇은 백발 사내가 검은 재로 화하며 흩날리기 시작했다.
최후를 맞이하면서 녀석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지금쯤이면 지쳐서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녀가 깨어났을 땐 혹한의 마녀로서 완전히 각성한 후일 것이다.”
메데이아 님의 계획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한다.
그녀의 종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했다고 믿으며 백발 사내는 완전히 소멸했다.
“녀석은 해치운 거야?”
때마침 뒤따라온 레이나가 상황을 물었다.
전요한은 그녀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숨겨진 지하 유적지로 진입해야 해. 위치를 알 수 있겠어?”
“뭐? 수인족의 후각이 예민하긴 하지만 이렇게 막연한 상황에선….”
“나도 도와줄게. 시간이 없으니까 서둘러.”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채린이 위험에 빠질지도 몰랐다.
전요한이 다그치자 레이나는 하는 수 없단 듯이 고개를 숙였다.
“주위에 피 냄새가 짙어서 좀 헷갈릴지도 몰라. 정확한 위치는 네가 판단해.”
여우귀를 쫑긋한 채, 킁킁거리며 네발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녀를 따라다니던 전요한은 순간 미래시가 발동한 것을 확인하고 멈춰 섰다.
“멈춰, 여기야.”
푸른빛으로 휩싸인 영역이 교묘하게 위장된 암벽 밑에 있었다.
레이나는 격투 자세를 취한 뒤 그쪽으로 달려가 강한 발차기를 날렸다.
투두두둑.
지하 유적지로 통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두 사람은 자격을 갖췄다고 인정받았는지 진입 시에 아무런 제약도 없었다.
“내려가자. 린을 찾아야 해.”
횃불을 든 전요한이 굳은 결의를 다지며 앞장섰다.
* * *
또옥! 하고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전요한은 눈을 떴다.
사방이 온통 어둡고, 기분 나쁜 악취도 나서 비위 약한 사람은 곧바로 토악질할 만한 장소.
아까 제대로 진입한 것이 맞는다면, 여긴 지하 유적지일 것이다.
“으음….”
허공에 띄운 마력 수정의 불빛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 레이나가 뒤쪽에서 신음을 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둘이서만 유적지로 들어온 상황.
이제 다른 일행과는 한동안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다.
“레이나, 일어나.”
“…으음, 음?”
어깨를 흔들어 깨우자 레이나는 놀라서 눈을 떴다.
그리고 곧 창백한 얼굴이 되어 옆에서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수인족의 후각은 매우 민감한 편이다보니 비위가 약해진 것이다.
“으으… 넌 괜찮아?”
속을 비워내서 조금 상태가 나아졌는지 레이나가 질문을 해왔다.
“나도 불편하긴 해. 사실 이런 데를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
“최대한 빨리 여기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몸에 이상한 것들이 기어오르는 것만 같아.”
그 기분은 전요한도 어느 정도 공감한다. 불쾌감이 들 정도로 살갗을 휘감는 마기.
여긴 어느 악마종의 둥지가 있어서 몬스터들이 증식하기엔 최적의 환경을 갖췄다.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키에에에엑!”
슬슬 시작되려나 보군.
여기선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침입자 쪽으로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레이나, 통로 쪽으로 나가지 말고 여기서 일단 정리하고 가자.”
“응! 알겠어!”
둘은 포지션을 잡고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흉측하게 생긴 변이체 두 마리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앞서 있던 변이체의 미간에 박혔고 녀석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콰곽!
레이나가 건틀렛을 휘두르자 뭉개지다 못해 뜯겨져 나온 구역질 나는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것을 본 그녀의 표정이 다시 창백해졌다.
“으으….”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날 거야.”
함께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해봐야했다.
레이나가 고개를 돌린 채 신음하는 동안 전요한은 변이체들이 몰려오는 통로를 향해 걸음을 내달렸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 * *
지하수로는 미궁처럼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어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웠다.
그래서 둘은 이정표가 될 만한 곳에 표식을 새기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많은 변이체를 베어 넘겼는지 모른다.
정신없이 나아가다 보니 어느덧 제1구간의 종착역까지 도달해 있었다.
스르르륵―
저 너머의 어둠 속에서 무거운 금속을 끄는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제1구간의 문턱을 수문장처럼 지키는 중간 보스, 광기의 처형자.
녀석은 쇠사슬이 얽힌 갈고리 형태의 거대한 닻을 휘두르는데 한 방 한 방이 강력한 만큼 움직임은 느린 편이다.
기계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 쇠창살이 내려와 통로를 봉쇄했다.
여길 벗어나기 위해 옆에 있는 수로로 뛰어드는 건 자살행위.
수면 아래엔 피라니아 같은 광폭한 육식어종이 서식하고 있어서 불과 몇 초도 안 되어 앙상한 뼈만 남고 말 것이다.
“꽤나 하드코어한데? 소미궁의 최심부라곤 해도 만만치 않아 보여.”
우두머리 몬스터라서 그런지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감도 있었다.
“괜찮아, 레이나. 여기까지 오면서 보여 줬던 용기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주춤하는 걸 눈치챈 전요한이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순간 부끄러워진 레이나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무, 무서워하는 거 아니야! 내가 풋내기도 아니고!”
갈기부족장의 딸로서 겁쟁이 같은 모습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스르르륵―
닻을 끄는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요한은 차분히 녀석의 공격 범위와 행동 패턴, 이동 속도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평소처럼 정공법으로 가자. 내가 어그로를 끄는 동안 빈틈을 노려줘.”
“이번엔 역할이 바뀐 거야? 그럼 맡겨만 주라고!”
자신의 활약을 예상한 레이나가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