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구원의 손길 (1)
“무슨 일입니까?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진 바깥 경계를 서라고 했을 텐데요.”
별일 아니리라 여긴 시르케가 힐난하는 표정을 지었다.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마물이라도 본 걸까나? 어지간히 호들갑이네.”
레이나도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밤을 새워서 혼란을 수습했는데, 또 골치 아픈 사건이 연달아 발생할 것 같지 않았다.
“그, 그게… 누군가로부터 서신이 날아왔습니다.”
수인족은 말을 더듬으며 품에 있던 양피지를 꺼냈다.
먼저 그것을 건네받은 전요한이 글귀를 읽어나갔다.
“각 거점의 리더들에게 고한다. 서로 눈치나 보며 소모전을 벌일 바엔 차라리 중립지대에서 제대로 승부를….”
요약하자면, 다음 층계로 진입하기 위한 자격을 두고 최종 결전을 제의하는 내용이었다.
바라던 바이긴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함정처럼 느껴지는 구석도 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우리를 유인해 내려는 속임수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시르케가 신중하게 결정할 것을 조언했다.
한편, 레이나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뭐, 속임수라고 해봐야 수풀에 트랩 좀 깔고 매복하는 정도이지 않겠어? 조금 거슬리기만 할 뿐이야.”
확실히 그녀를 상대로 동등하게 겨룰 수 있는 생존자는 드물 터였다.
비록 전력이 예전만 못하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전요한은 조금 신중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번에도 죄악의 사도들이 관련되어 있는 느낌이야. 방심하는 건 일러.”
메데이아의 사주를 받은 수인족이 같은 층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죄악의 사도가 그들뿐일 거라고 단정 짓는 건 섣부른 판단이다.
“그래도 시간을 끄는 건 좋지 않습니다. 메데이아가 계속 배후에서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시르케는 탁상 위에 펼쳐진 전략 지도를 지팡이로 가리켰다.
대마법사 이안네스의 발명품인 마장병기로 지형을 탐색한 후 완성한 것이다.
덕분에 어느 위치에서 전투를 벌여야 유리한지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변수가 너무 많군. 자칫 잘못하면 숲속에서 적대적인 집단과 연속으로 마주칠 수 있어.”
전요한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책상을 내리쳤다.
깜짝 놀란 수인족이 히익 하며 뒷걸음질 친다.
“뭐, 뭔가 안 좋은 예감이라도 드신 겁니까?”
“아니. 그냥 이런 건 생각하나 마나인 듯해 보여서.”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질서한 상황이라면 차라리 감에 맡기는 편이 낫다.
전요한이 몸을 일으키자 골머리 앓던 레이나가 생긋 웃었다.
“역시 그렇지? 우리는 아무래도 두뇌파하곤 거리가 멀다고.”
“너무 자랑인 것처럼 말하진 말아주십시오, 레이나.”
전략 회의에서 아무런 소득도 없었단 사실에 시르케가 미간을 짚었다.
그녀는 수인족 동료 대신 출전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제가 따라나선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죠. 그럼 무운을 빕니다.”
연이은 전투로 마력 소모가 상당한 탓이었다.
“거점을 잘 부탁해, 시르케.”
잔류한 수인족들을 독려한 후 전요한은 곧바로 출정에 나섰다.
기동성을 위해 음식도 부피를 최대한 줄인 전투 식량 위주로만 챙겼다.
“그럼 계획대로 숲속을 가로질러서 갈 거야?”
“응, 우회한다고 해서 안전해지는 게 아니니까.”
이런 상황에선 목적지까지 일찍 도착한 쪽이 어떻게든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서신에 적힌 결전 장소는 유적 잔해가 있는 중앙부.
은신하여 매복할 만한 장소가 많아서 미리 함정을 파놓기 좋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트랩 따위는 안 걸려. 수인족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줄게!”
말을 마친 레이나가 빠른 움직임으로 앞질러 나갔다.
무성한 수풀과 나뭇가지 사이를 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전요한은 씨익 웃었다.
“이제 좀 기운이 나나보네?”
“응, 네가 준 사슴고기가 도움이 되었어.”
수인족의 신체 능력은 인간으로선 따라잡기 어려울 만한 수준이었다.
경쟁하듯 내달리던 두 사람은 어느덧 무너진 유적지에 도달했다.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걸? 매복 중인 녀석들은 없나 봐.”
여우 귀를 쫑긋한 채 주위를 살피던 레이나가 안심했다.
그녀와 함께 인내심 있게 기다리자 멀리서 하나둘씩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번 지켜보자. 놈들이 어떻게 하려는지.”
평야와 같은 개활지라면 모를까, 시야가 제한되는 숲속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함부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주위를 관찰하기만 했다.
사사삭. 사사삭.
저 너머로부터 은밀하게 이동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켰나 싶었을 때, 낯선 목소리가 저편으로부터 들려왔다.
“생쥐처럼 숨어서 대체 무얼 하는 거야? 덕분에 한참 찾아다녔잖아!”
아마존 여전사처럼 보이는 생존자였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사사사삭!
마치 의지를 지닌 것처럼 여러 방향으로 휘어지는 사복검이 빈틈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크읏!”
레이나가 간발의 차로 그 기습적인 일격을 피해냈다.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극도로 흥분했는지 이성적인 대화는 처음부터 무리였다.
계속해서 취약점을 노리는 사복검을 피하며 전요한은 녹티스를 들어 올렸다.
‘저번에 마검사 라스가 알려줬던 기술을 따라 해봐야겠군.’
기민한 움직임으로 돌격하여 거친 풍압과 함께 상대를 베어 넘기는 도검술이었다.
이리저리 휘어지며 변칙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사복검을 상대하기에 나쁘지 않다.
카랑!
카랑!
여전사의 곡예는 사복검의 움직임을 더욱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정신을 집중한 후 전요한은 사복검의 칼날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다.
“뭐, 뭐야! 갑자기….”
움직임이 단기간에 거듭하여 진일보하자 여전사가 적잖이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불균형은 일시적이었고 그녀는 다시 표독스러운 암표범의 형세로 돌아왔다.
“웃기지 마아아아!”
무슨 일이 있어도 질 수 없다는 각오가 여전사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운다.
그 결과, 꼭두각시 인형 조종 스킬까지 동원하여 주위의 아군을 전요한에게 집중시킨다.
“으윽….”
“흐어어….”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운, 미세한 마력 실들이 지면을 통해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곤란하겠어.’
어둠의 사도 중에서도 서열이 조금 있는 녀석 같았다.
위기감을 느끼자 순간 녹티스가 푸른 검광을 발하더니 마력 실들을 전부 끊어버렸다.
“이, 이럴 수가….”
자신이 보고도 믿을 수 없는지 여전사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후 그녀의 심장이 쇄도하는 녹티스에 의해 가볍게 꿰뚫렸다.
“쿨럭!”
여전사가 눈을 부릅뜨며 붉은 피를 토해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죽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흑마법의 저주가 풀리자 함께 달려들려던 적들도 하나둘씩 정신을 차린다.
“내가 뭘 했던 거지?”
“허공에 계속 스킬이나 쓰고 있었다니….”
조종당하고 있던 동안 그들의 기억은 없었던 듯했다.
안심하려던 찰나, 심상치 않은 시선이 전요한의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
* * *
혹시 메데이아인가?
아니, 녀석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엔 시기상조다.
그렇다면 죄악의 사도일 가능성이 높았기에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단검을 날렸다.
휘익!
번뜩이는 투사체가 일시에 표적을 노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적중하는 덴 실패했다.
푸드득!
칼날 부리를 지닌 사냥매가 놀라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아깝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녀석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다. 사실 아까 인사를 하려 했는데 상황이 안 좋아보여서 말이지.”
나뭇가지 위로 착지한 백발 사내가 정식으로 자신을 밝혔다.
이후엔 무용담이라도 늘어놓는 양 자신이 벌였던 일을 자랑스럽게 떠벌린다.
확실히, 죄악의 사도에 걸맞은 성향을 지닌 인물.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전요한은 화제를 돌렸다.
“발악하지 말고 이제 포기하시죠. 당신은 우리가 처참하게 때려눕힐 예정이니까요.”
“과연 그럴까? 자신감이 넘치는 녀석이라서 마음에 드는군.”
백발 사내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더니 여전사가 쓰러져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예쁘장한 년은 대체 왜 죽인 거야? 표독스럽긴 해도 제법 탐스러웠는데 말야.”
무언가 불쾌한 소리와 함께 거친 왼손이 불길한 마기에 휩싸였다.
이후 마기가 쓰러진 여전사의 몸을 탐욕스럽게 휘감았고, 백발 사내는 이내 그녀의 존재를 흡수했다.
“역시 심장 미인은 전부 매력 있다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손으로 가지고 놀다 죽이는 건데.”
녀석이 저런 기행을 벌이는 건 포식의 권능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낮은 전력인데도 단기간에 빠른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당신을 상대하기에 적합한 동료가 있는데 두고 와서 아쉽군요.”
“과연 적합할까? 누구든 모두 결함을 지니고 있지. 차라리 악마에 영혼을 팔아버린 쪽이 더 나을 듯싶은데.”
백발 사내는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지 조금도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당신을 이쯤에서 저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지금 매우 혼란한 상태니까요.”
메데이아의 소미궁이 이대로 방치되면 그 혼란은 가중되고 말 것이다.
전요한이 일갈하자 백발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알 게 뭐야?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사는데. 그 끝에 피할 수 없는 종말이 있다면 운명으로 받아들여야지 뭐.”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다.
문답무용임을 깨닫고 녀석을 향해 녹티스를 들어 올렸다.
“그 종말은 당신에게만 찾아올 겁니다. 바로 심연이 몰고 온 파멸에 의해서요.”
이 정도면 최소한 언변으로는 승리한 셈이겠지.
배후에 메데이아가 있음을 감안하면 최대한 속전속결을 하는 편이 좋다.
상황을 파악한 후 전요한은 백발 사내를 향해 검을 겨눠 보였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전요한이 유려한 움직임으로 백발 사내의 허리를 베려 했다.
그 담대하고 자유로운 기세에 백발사내는 흠칫 놀라며 뒤늦게 쌍검을 들어 올렸다.
“이런….”
허나 대미궁에서도 살아남는 고인물이 내딛는 걸음이었다.
이미 검신은 살갗을 파고들었고 백발 사내가 피했을 땐 붉은 피가 한 차례 흩뿌려진 후였다.
“지구의 여신이 노련한 살수를 풀었나 보군. 보기 드문 실력이라 조금 당황했어.”
뒤로 물러선 백발 사내는 크게 동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치명적인 자상을 입었던 복부는 어느새 재생되고 있었고 레이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가신 녀석이네, 정말로.”
단순히 재생 능력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 그럼 어디 놀아 볼까?”
먼저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백발 사내였다.
그의 형상은 그림자처럼 변하며 이쪽으로 뻗어 나간다.
“치잇!”
전요한은 몸을 비틀며 간단히 일격을 피해냈다.
“호오, 역시….”
안 그래도 한번 붙어 보고 싶었는지 백발 사내는 결투를 즐기는 중이었다.
반면, 전요한은 자신의 검에 언제나 그 특유의 담대함을 실었다.
카랑!
카랑!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그림자와 물러섬이 없는 검사의 격돌.
승부가 쉽게 나지 않을 것 같을 찰나에, 틈을 보인 그림자가 끝자락을 베인 후 뒤로 물러났다.
“솔직히 말하지. 너는 대단해. 나와 함께 세상을 뒤엎지 않겠어?”
어깨의 상처를 재생한 백발 사내는 이쪽을 보며 진지하게 동료가 되라고 권유했다.
물론 전요한은 간단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카랑!
올곧은 심성을 지닌 그가 메데이아 같은 마녀와 손을 잡을 리 없었다.
“안타깝게 되었군. 그럼 다음에 만나도록 하지.”
전요한이 심판을 위해 다시 녹티스를 들어 올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